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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틈새 17화

어린 걸음마가 남긴 것

by 담은

어느새 시린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다.

따스한 햇살이 잠시 얼굴을 스치고, 차가운 바람이 뺨을 만지고 지나간다.

익숙한 거리와 낯선 바람 사이에서 계절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벌써 쉰 번째 겨울을 맞이해도, 해마다 겨울의 무게는 조금씩 다르게 가슴에 내려앉는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병원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무심히 걷던 발걸음이 문득 멈춘 건, 골목 모퉁이에서 마주친 한 장면 때문이었다.

막 돌을 지난 듯한 아이가 아장아장 걷고 있었다.

아직 혼자 걷는 것이 서툰지, 아이는 몇 걸음마다 중심을 잃어 휘청였고,

그 앞에는 아빠로 보이는 남자가 두 팔을 벌린 채 서 있었다.

아이의 눈은 세상 모든 것이 신기한 듯 반짝였고,

아빠는 그런 아이를 바라보며 세상 다 가진 듯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두 사람 사이에만 존재하는 세상이 펼쳐진 듯했다.


아이의 작은 발걸음 하나하나가 세상을 밝히는 빛처럼 느껴졌다.

넘어질 듯 말 듯 위태롭지만, 그 모든 순간이 환하고 반짝였다.
나는 어느새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 아빠는 알고 있을까.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찬란하고 소중한지를.
아이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자라고,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게 바라보던 장면이, 오래전 내 기억 속 한 페이지를 끌어올렸다.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아이가 처음 두 발로 일어섰던 날.
온종일 화장대를 붙잡고 서 있던 아이가, 갑자기 손을 놓더니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그 작은 발이 바닥을 톡톡 두드릴 때마다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고,

그저 걷는다는 이유만으로 "잘한다, 잘한다"며 박수를 쳤다.
엉덩방아를 찧고 울다가도 다시 일어나 걷던 아이.
그저 존재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던 날들이었다.


그 아이가 자라 지금은 스물두 살이 되었다.
내 품 안에서 함께 한 시간보다, 나 없이 보내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이제는 내가 없어도 척척 해내는 모습을 보면 대견하면서도, 문득문득 마음 한켠이 허전해진다.


어느새 아이는 내 손을 완전히 놓을 준비를 마쳤고, 나는 그 손을 놓을 준비가 아직 되지 않은 듯하다.

아이들은 성장해야 하지만, 아기 때의 귀여운 모습이 아까워 천천히 자라주길 바라게 된다.

다 큰 아이들을 보면 어릴 때 모습이 너무 아쉬워진다.


어제까지만 해도 조그만 손으로 내 옷자락을 붙잡고 걷던 아이가, 이제는 나만큼 큰 키로 나를 바라본다.
그 모습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어쩐지 서운하고 쓸쓸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아이는 여전히 나의 어린 아기였다.

지금도 세상을 배우는 중이고, 자기만의 속도로 걷고 있는 중이다.
내가 그 속도를 잊어버린 건 아닐까.


‘엄마’라는 이름은 때로 가장 무거운 잣대가 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기대라는 말로 무거운 짐을 지게 한다.
아이를 향한 말들 속에, 사랑보다는 불안이 먼저 앞설 때가 많았다.

"그 나이면 이 정도는 해야지."
"언제까지 이럴 거야?"
그 말들 속엔 혹시 내가 부족한 엄마는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뒤늦게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모든 아이는 제 속도대로 피어난다는 것을

작은 걸음 하나에 온몸을 집중하며,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용기를 배우는 존재라는 것을.

골목에서 난 아기의 걸음마에서 나는 오래된 내 마음을 꺼내 보았다.
모든 것이 서툴고 낯설던 그때, 아이의 존재만으로 내 하루는 눈부셨고, 아장거리는 발소리 하나에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던 시간.
그 마음을, 나는 왜 잊고 있었을까.

이제 그 아이는 더 먼 곳으로 걸어갈 것이다.

내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하지만 괜찮다.
그 아이가 자신의 어둠을 마주하고, 자신의 빛을 찾을 수 있도록,
나는 한 발 뒤에서 조용히 걸어가면 된다.


생각해 보면 어떤 조언보다 더 깊은 위로는 말 없는 기다림 일지 모른다.

그 아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다시 내 품 안으로 한 걸음 다가올 때까지,
나는 늘 같은 자리에 서 있을 것이다.


겨울 골목 어귀에서 들리던 아기의 아장거리는 발소리.
그 따뜻했던 장면이 지금도 내 안에서 문장을 만든다.
아이의 걸음마는,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문장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나는 또다시 그 작은 발걸음 앞에 서 있다.

이번에는 앞서 이끄는 대신, 아이와 나란히 걸어가기로 했다.
같은 속도로, 같은 눈높이로, 서로를 기다려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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