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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소영 Jul 18. 2019

평양냉면처럼 슴슴한 관계

핀란드에 오기 전 만 3년 동안 기자로 일하면서 꽤 많은 사람들과 옷깃을 스쳤다. 주로 '사건'과 '재판'이라는 절차를 중심으로 엮인 사람들이었다. 사건을 수사하는 검사, 사건을 재판하는 판사, 의뢰인을 대변하는 변호사들 말이다. 그리고 그 사건이라는 것의 주인공들도 다양했다. 그중에는 회삿돈을 빼돌린 재벌 총수가 가장 많았고 그들이 가는 곳마다 호위하는 대기업 직원들은 더 많았다. 오원춘 같은 살인마도 있었고, 아내와 지저분하게 이혼 소송 중인 연예인, 억울함을 호소하는 철거민과 노동자 등 인간 군상도 다양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며 취재하고 기사 쓰는 법을 가르쳐 준 여러 사람들 중 J 선배가 있었다. 나를 직접 가르치고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맞기수 사수보다 J 선배가 먼저 떠오르는 것을 보면 희한한 일이지 싶다. 대게는 나를 따뜻하게 보듬어 준 사람을 늘 마음속에 간직하기 마련인데 말이다. J 선배는 따뜻함이나 친절함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 선배로부터 혹독하게 일을 배웠는데, 그래도 무언가 되게끔 일을 가르친 사람이다 보니 다시 겪고 싶지 않으면서도 고마움을 느끼는 묘한 감정이 남아 있다.


J 선배는 타사에도 소문이 자자한 소위 '벙커'였다. 벙커는 아랫사람에게 지독하게 일을 시키며 쪼아대는 상사를 부르는 판사들의 은어였는데 법조 출입 기자들에게도 통용되는 말이었다. 본인이 그만큼 실력과 일처리 능력을 갖춰야 붙는 타이틀이었기 때문에 나름 자부심을 가져도 되는 칭호이기도 했다. 타사 기자들이 "J 기자 정말 그래?"라며 내게 대놓고 물어보기도 했는데, 그렇긴 그랬다.


상사 중에 자고로 가장 어려운 상사는 후배보다 열심히 일하고 발로 뛰는 사람이다. J 선배가 딱 그랬다. 아직 수습도 떼지 못한 신입 기자 시절, 나와 동기들은 회사 문을 가장 먼저 열고 출근해 회의 준비를 하고 조간신문을 훑고 있어야 했다. J 선배는 내가 헐레벌떡 출근해 숨을 고르기도 전에 구둣발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회사로 들어섰다. 심지어 그 이른 시간에 집에서 회사로 바로 출근하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나와 출입처 기자실에 들러 간단히 업무를 보고 회의 준비를 한 뒤 회사로 나오는 것이었다. 그만큼 잠을 안 자고 일한다는 소리다. 어떤 석간신문 기자는 "J 기자는 새벽에 출근하는 석간 기자보다 더 일찍 출근해,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라고 내게 말하기도 했다.


J 선배가 어려웠던 이유는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 새끼, 이거밖에 못해?" 라며 욕하고 면박을 주는 선배는 뒤돌아서서 욕하고 잊어버리거나 술 마시며 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J 선배의 차가운 지적은 가슴에 날카롭게 날아와 박혔기 때문에 웬만하면 싫은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매사에 부단히 애를 썼다. 그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게 피곤했다. 나에 대한 지적도 진지하고 심각하게 해서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높은 벽 같은 게 느껴졌기 때문에 가벼운 장난으로 친해질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 J 선배가 "소영 씨, 이리 와 봐"라며 검지 손가락을 까딱이며 나를 옆에 불러놓고는 "오늘 조간에 뭐 나왔어?"라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어보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J선배가 조간을 보지 않아서 물어보는 게 아니었다. 내가 조간을 봤는지, 조간에 나온 법조계 소식 중 내가 무엇을 눈여겨봤는지 나의 생각을 보는 것이었다. 아는 것도 답을 못하기 일쑤였다. 동이 트기 전 출근 버스를 타고 강남으로 향하는 와중에 졸린 눈을 억지로 뜨면서 핸드폰으로 신문을 읽어봤자 머릿속에 남는 것이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이 머릿속에 꽉 들어있는 사람에게 내가 아는 것을 말해봤자 내 허점을 파악하고 더 집요하게 물어볼 것이 뻔했다. 대답도 아는 듯 모르는 듯 요령껏 잘해야 했다.


J 선배는 본인이 대충 일하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후배 기자들이 적당히 지면만 채우면서 설렁설렁 일하는 것을 봐주지 않았다. 엉덩이가 무거운 기자를 가장 경멸했다. 항상 바쁘게 돌아다니며 기사 거리를 찾으려고 애썼고 팩트 체크도 그만큼 부지런히 했다.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 성격은 차림새에서도 드러났다. 늘 몸에 꼭 맞는 정장을 입었고 넥타이는 목을 조를 듯이 타이트하게 맸다. 아무리 더운 여름날이어도 반팔 셔츠를 입지 않았고 인터뷰하는 상대방이 재킷을 벗으라고 권해도 절대 그러는 법이 없었다. 각진 서류가방을 들고 반짝이는 구두를 신었고 위로 한 올 한 올 올린 헤어스타일은 한 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그런 J 선배 앞에서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웠다. 수습기자 시절 취재원과의 점심 식사 자리에서 "처음이라 모르는 게 많으니 많이 가르쳐 주세요"라고 말했다가 돌아오는 길 내내 잔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나이가 많든 적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기자와 취재원은 동등한 관계인데 거기다 대고 뭘 가르쳐달라고 굽신거리고 있냐며 혼쭐이 났다. 그냥 예의상 빈 껍데기같이 한 말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혼이 날 일인가 싶어 아직도 약간은 억울하지만 그만큼 일하는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이었다.


J 선배가 후배들을 차갑고 혹독하게 대한 것은 일을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서 하는 것이 습관이 들게끔 하려는 것이었다. 그만큼 일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기회도 많이 만들어 줬다. 내가 입사 2개월밖에 안 된 수습기자일 때 퇴임하는 대법관의 인터뷰에 참관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당시 그 대법관은 나에게 명함을 건네며 그 밑에 직접 개인 핸드폰 번호를 적어 주기도 했다. 그때 받은 명함은 기자 생활 내내 부적처럼 가지고 다녔다. 그 인터뷰 자리에서 나는 단 한마디도 말할 수 없는 햇병아리 수습이었지만 내가 들은 이야기가 어떻게 활자가 되는지, 인터뷰를 어떻게 이끌어 나가야 하는지를 볼 수 있는 살아있는 시간 속에서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기자로서 앞으로 어떤 사람들을 만나 취재하고 기사를 쓰는지에 대한 현실 감각을 깨우치기도 했다.


J 선배가 가르친 기자의 태도는 지금 돌이켜보면 삶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수습기자 시절 함께 출입처로 향하는 길에 J 선배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만나는 사람들이 판사, 검사, 변호사인 것이지 그 사람들 만난다고 네가 판검사가 된 것 마냥 행동하지 말아라, 그것만큼 꼴불견인 기자 없다."


그 말이 맞았다. 3년 차, 5년 차 기자가 될수록 기자님 소리에 어깨에 힘이 들어가 건방지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때가 온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렇게 강조하던 이유를 펜대를 놓아보니 이제는 이해하겠다.


내가 그동안 기자 명함을 가지고 사람을 만나왔는데 이제 그 타이틀이 없으니 참 초라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J 선배의 말대로 법조계의 취재원들은 내가 기자이기 때문에 만날 수 있었던 것이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그들과 나의 접점은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일을 그만두고 나서 한동안은 함께 일했던 선배들이나 나름 인간적으로 교류했다고 생각하는 취재원들에게 안부 인사도 하고 명절을 챙겨가며 연락을 했다. 그런데 한 해, 두 해 흘러갈수록 이제는 업무로 이어진 인연을 나 혼자 미련을 가지고 끌고 가는 게 아닌가 싶어 안부 연락하는 것도 그만두게 됐다. 상대방 입장에서는 이제는 볼 일이 없는 나의 연락을 받는 것이 부담스럽고 피곤한 일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동안 내가 만들어 온 인간관계에 회의감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J 선배와의 관계가 가장 먼저 끊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업무적으로는 많은 것을 배웠지만 개인적인 친분은 그리 깊게 쌓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입사한 그날 J 선배는 내가 자신과 대학 동문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으면서도 1, 2년쯤 지나고 나서 뜬금없이 "그런데 소영 씨 어느 대학 나왔지?"하고 물어볼 정도로 일 외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같은 과를 나온 사이라고 말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느냐고 했더니 "나도 참 무심한 사람이네"라고 스스로 인정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내가 일하면서 만났던 사람 중 J 선배와의 관계가 아직까지도 가장 길게 이어져 오고 있다. 자주 보지는 못하더라도 SNS로 소식을 보면서 여전히 잘 지내고 있구나 하면서 말이다. 오히려 일이라는 요소가 사라지니 부담 없이 J 선배를 대할 수 있었다.


J 선배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2년 전 이맘때쯤이었다. J 선배는 SNS를 통해 내가 한국을 방문했다는 것을 보고는 밥이나 한 끼 하자며 먼저 연락을 해왔다. 우리는 평양냉면을 잘하는 집이 있다는 을지로의 구석진 골목에서 만났다. 내가 "그게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라고 말한 것을 어떻게 기억하고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집에서 제대로 평양냉면을 맛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바쁜 일과에 시간을 쪼개가며 만나면서도 자신의 동선을 벗어난 을지로에서 만나자고 한 것을 보면 말이다. J 선배는 물냉면을 각자 한 그릇씩 시키면서 비빔냉면도 맛보고 싶다며 그것도 추가로 주문했다. 회사 다닐 때 봤던 말쑥한 정장 차림도 그대로였고 늘 물냉면을 먹으면서 비빔냉면을 나눠먹자고 추가로 주문하는 그 모습도 그대로였다.


그날 J 선배와 먹었던 평양냉면은 역시나 맹숭맹숭했다. 그게 평양냉면 본연의 맛 이리라. 그런데 그 맛이 딱 나와 J 선배와의 관계 같다고 느껴졌다. 으쌰 으쌰 하면서 의리를 다지는 열정적인 관계는 아니더라도 멀리 있어도 잘 살아있음을 알고 응원해줄 수 있는 그런 슴슴한 관계 말이다. J 선배와 내가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을 만큼 깊은 우정을 나누지는 않았어도 적어도 과거에 서로가 서로를 대했던 그 면만큼은 진실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J 선배가 나를 대했을 때 요령을 피우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선배도 후배를 적당히 가르칠 수 있다. 후배에게 욕먹지 않는 좋은 선배가 되면서 일도 친절하게 가르쳐 주고 귀찮은 일은 적당히 후배에게 미루면서 자신이 일하는 시간을 버는 것도 선배의 요령이다. 하지만 J 선배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모두 나에게 뼈와 살이 되는 일이었고, 그만큼 선배 자신의 시간을 할애하며 나를 들여다봤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J 선배가 지나가는 말로 "오늘 그 기사 좋았어!", "잘하고 있어, 앞으로 그렇게만 해!", "소영 씨는 어디 가서도 잘할 거야"라고 할 때 그 말을 무게감 있게 들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요즘 같이 더운 날에는 선배와 함께 먹었던 그 시원한 냉면 육수의 맛이 가끔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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