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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소영 Aug 04. 2019

더 이상 그 맛이 아닌 엄마의 콩나물 잡채

얼마 전 헬싱키에 있는 한 아시안 마켓에서 콩나물을 발견했다. 태국, 베트남 요리에 많이 들어가는 숙주는 늘 매대에 있는 반면에 콩나물이 들어온 것은 처음이어서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얼른 집어 들었다. 몇 년 전에는 누군가 콩나물 콩을 나눠줘 키워보기도 했는데 늘 물을 주고 관리하는데 들어가는 성가심에 비해 영 비실비실하게 자라서 포기한 뒤로 몇 년 만에 보는 콩나물이었다. 만만한 게 콩나물 무침이지만, 오랜만에 구한 귀한 식재료인 만큼 내가 가장 맛있게 먹었던 콩나물 무침으로 요리하고 싶었다. 바로 엄마가 해주던 그 방식 그대로 말이다. 집에 돌아와 당장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콩나물을 구했다고 호들갑을 떨며 비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엄마의 방식대로라면 콩나물을 삶아 찬 물에 헹군 뒤 물기를 너무 빼지 않아야 한다. 다진 마늘과 쫑쫑 썬 파를 넣고 고춧가루를 넣는다. 간장은 약간만 넣고 소금으로 간을 한 뒤 참기름을 두르고 깨소금을 뿌리면 끝이다. 여기서 엄마의 비법은 콩나물을 무칠 때 식용유를 약간 넣는 것이다. 엄마는 다른 나물을 무칠 때에는 넣지 않는데 콩나물을 무칠 때는 꼭 식용유를 넣어야 맛있다고 했다. 참기름만 많이 넣으면 콩나물의 자체의 고소한 맛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란다. 아삭하면서 씹을수록 고소한 엄마의 콩나물 무침은 언제 먹어도 맛있다. 고춧가루를 넣었기 때문에 살짝 매콤하면서도 자작하게 생긴 짭조름한 국물에 고추장 없이 밥만 비벼먹어도 꿀맛이다.


그렇지만 역시 내가 한 것은 아무리 비법을 안다고 해도 고춧가루 풋내만 나지 엄마의 그 맛이 나지 않았다. 엄마는 수십 년 동안 버무린 콩나물이기 때문에 양념 뚜껑을 열고 툭툭 무심하게 간을 해도 맛있는데 말이다. 내 말을 들은 엄마는 몇십 년 살림한 엄마와 초짜인 네가 같은 손맛이 나면 억울해서 되겠냐며 깔깔 웃기만 하셨다. 그러고는 지난봄 핀란드에 오시면서 한국에서부터 콩나물 한 봉지를 챙겨 오셨다. 가방 가득 빽빽하게 들어찬 다른 짐들에 눌려 콩나물 숨이 죽을까 봐 정성스럽게도 가져오셨다. 오랜만에 엄마가 해준 콩나물 잡채가 먹고 싶어 9시간 비행을 하고 온 엄마에게 염치 불구하고 주방을 맡겼다.


콩나물 잡채 역시 엄마의 무심한 눈대중 요리만큼이나 간단하지만 엄마만이 제대로 맛을 낼 수 있는 그런 음식이다. 콩나물 무침에 삶은 당면을 넣고 슬슬 버무려내면 그만이다. 찬물에 씻어낸 탱글한 당면이 매콤 짭짤한 콩나물 국물을 만나 식탁에 오르는 날이면 나는 늘 밥을 반 공기 덜어내고 콩나물 잡채로 배를 채웠다. 그런데 몇 년 만에 온갖 기대를 한 엄마의 콩나물 잡채는 더 이상 그 맛이 아니었다. "네 살림으로 하려니까 서툴러서 안 된다!" 엄마는 오랜만에 딸이 좋아하는 음식을 해주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돼 미안했는지 내 살림살이가 정돈이 안 됐다며 괜히 나무라기만 했다. 아니면 사위에게 오랜만에 장모의 솜씨를 발휘하고 싶어 너무 긴장한 것 같기도 했다.


하긴 변한 것은 엄마의 손맛만이 아니었다.  엄마는 자주 깜빡했고, 내 말을 듣고 있는 듯하면서도 엉뚱한 소리를 해댔다. 별 것 아닌데도 잘 노여워했다. 점점 노인이 돼가고 있는 것이다. 결혼하고 내가 핀란드로 온 뒤로는 1년에 한 번이나 만날까 하는 엄마이기에 그 변화가 더 크게만 느껴졌다. 자연의 순리라지만, 엄마가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잘 받아들이고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고등학생 때쯤이었나 아니면 대학생 때쯤이던가. 엄마의 귀걸이를 수리하러 엄마를 따라 부평의 귀금속 상가에 간 일이 있었다. 물건을 맡기고 건물 밖으로 나오는데 뒤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우리를 다급하게 부르며 따라오는 게 아닌가. 무엇을 흘리고 왔나 싶어 잠시 어리둥절해 있는데 그 아주머니는 다짜고짜 엄마의 팔을 붙잡고서는 "혹시 Y여고 나온 B 아니에요?"라고 말하며 코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닌데요?"


엄마의 여고 동창생이 분명했다. 그런데 엄마는 아주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능구렁이처럼 본심을 감추거나 남을 속이는데 능숙하지 못한 엄마가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거짓말을 하는 것을 처음 봤기에 오히려 내가 놀랐다. 물론 그 아주머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밀며 "맞는데... 정말 아니에요?"라며 재차 확인을 했지만 이미 정색을 하며 거짓말을 한 터라 뒤늦게 맞다고 인정하지도 못할 노릇이었다.


엄마는 그 아주머니가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엄마는 여고시절 공부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는데 게다가 예쁘기까지 한 모범생이었다고 했다. 그 시절 엄마의 사진을 보면 굳이 그런 자랑을 본인 입으로 늘어놓지 않아도 엄마가 어떤 학생이었는지는 알 수 있다. 양갈래로 땋은 머리에 옆머리를 깔끔하게 핀으로 고정시킨 단정한 모습이 똑 부러지는 모범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사진 속 엄마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촌구석에 전학 온 도도한 서울 소녀 같은 느낌도 있었다. 모범생에 인기인이었으니 아마 같이 학교를 다니던 사람들은 엄마를 기억하고 있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때의 모습대로라면 엄마는 배우 김희애처럼 나이가 들었어야 했다. 여전히 하얗고 맑은 피부에 고상한 분위기를 풍기며 말이다. 아마 엄마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래, B는 잘 살고 있을 거야"라며 기대를 할지도 모른다. 좋은 대학을 가서 멋진 남편을 만나 곱게 나이 든 얼굴에 고상한 옷을 입은 사모님처럼 말이다. 엄마도 그것을 알기에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뱃살이 인심 좋게 나와 작은 키가 더 땅딸만 하게 보이는 아줌마로 사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내놓기 창피했을지도 모른다. "B가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많더니 그렇게 산대?" 하는 말이 돌아다니는 것을 원치는 않았을 것이다. 동네 자그마한 분식집을 하는 것이 부끄러울 일은 아니지만 무언가 내세울 것도 없기 때문이다.


80년대 서울에서 공무원을 하던 엄마는 아빠를 만나 결혼했다. 아빠는 시골에서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모든 면에서 달랐다. 서로 어느 것 하나 맞는 것이 없다는 것을 빼면 말이다. 그런 두 사람을 만나게 한 인연이 신기할 따름이다. 엄마는 배움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학창 시절 재주 많다고 주변의 관심을 받던 사람이 그 어떤 재주 하나 발휘하지 못하고 시골 농장에서 지내는 게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 시골에서도 서예나 그림, 악기를 배우러 다니려고 안간힘을 썼다. 당연히 아빠는 그런 엄마를 못마땅해했다. 아빠는 엄마를 집에 잡아두려고 어지간히 괴팍하게도 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는 자신이 시골에서 보며 자랐던 순종적이고 희생적인 여성상과는 너무나도 달랐던 엄마를 본인의 방식대로 휘두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 회오리 속에는 나와 동생이 있었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끌어안고 그 회오리를 온몸으로 맞았다. 그리고 세월이 갈수록 거칠어졌다. 농장을 접은 뒤 여러 번 식당을 열었다가 닫기도 했고 남의 가게 주방에서 일도 했다. 작은 속옷 가게를 하기도 했고 나중에는 마트에서 판매 직원으로 일하며 살아나가기 위해 갖은 애를 섰다. 거쳐간 일이 하나씩 늘어날수록 엄마는 황순원의 소설 속에서 나올 법 한 여린 소녀가 아니라 미간에는 화가 가득하고 불만이 쌓여 입이 삐죽 나온 억척 아줌마가 됐다. 그리고 이제는 뒤돌아서면 깜빡깜빡하는 할머니가 돼 가고 있다.


세월이 가고 손맛은 변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엄마의 모습이 있다. 엄마는 아직도 무언가를 배우느라 바쁘다. 요즘은 펜화를 배우기 시작해 연습한 그림들을 매일같이 사진으로 찍어 보내기 바쁘다. 딸을 만나러 오는 핀란드 공항에서 영어 한 마디라도 더 써보고 싶어 영어 수업도 듣고 있다. 뒤늦게 하는 공부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지 매번 좌절을 하면서도 그만두지 않는다. 음악에 재능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포기할 수 없는지 이번에는 하모니카를 시작했다고 들떠있다. 나의 행복을 찾아 떠나느라 엄마를 옆에서 가까이 지켜보지 못한다는 것이 늘 마음 한 편의 죄스러움으로 자리 잡고 있다. 다행히 엄마는 잊힌 여고시절의 모습을 찾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그런 엄마에게 예전의 손맛을 기대하며 내 엄마와 내 아이들의 할머니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것은 그만둬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더 이상 엄마의 걱정거리가 되지 않도록 화목하게 사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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