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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는여자 Nov 28. 2023

김치찌개

엄마 잘 지내지요.

 어디서 온 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내 코를 자극하며, 어린 시절 향수를 자극하는 찌개 향기기가 느껴졌다. 오래전 그때는 중학생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갑자기 집안 상황이 바뀌었다. 우리 오누이는 엄마가 일을 나가시면서 냄비 한가득 끓여놓은 김치찌개를 끼니마다 먹었다.      


금방 끓인 김치찌개에는 돼지고기가 잔뜩 들어있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면 아무도 손대지 않은 김치찌개가 있었다.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입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비록 엄마는 집에 없었지만, 그릇에 김치찌개에 있는 고기를 가득 떠서 밥과 함께 먹을 때면 엄마가 생각나지 않았다. 아마도 아무리 그리워도 엄마는 금방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때 엄마가 끓여놓은 김치찌개는 엄마도 아빠도 없는 우리 남매에게 공허한 마음을 달려주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물론 찌개를 먹으면서도 엄마는 그리웠다. 엄마는 자동차 정비공장을 하시던 큰이모네 가게에서 일을 도와주셨었다. 그러다가 엄마는 사업 확장을 준비하던 큰이모 요청으로 보증을 섰고, 큰이모가 부도 위기에 처하자 보증을 서준 엄마는 금방 해결할 수 있다는 큰이모의 말을 믿고 여러 번 가진 돈을 이모에게 가져다주었다. 그 덕분에 이모네 가족은 부도를 최대한 늦출 수 있었지만, 그때부터 우리 가족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었다.     


지금도 동생들과 이야기하는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우리를 따듯하게 맞아주던 엄마가 있었고 그 곁에는 엄마가 금방 만든 간식이 있었다. 곧 아빠가 회사에서 돌아오면 우리 가족은 모두 거실에 둘러앉아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이야기하며 웃고 떠들었다.      


  환상이었을까?      


흐린 기억 속에 아빠는 끊었던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소중했던 우리 남매의 공간에는 빨간색 종이가 붙어있었다. 가압류, 근저당...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그 말을 알게 된 때도 그때부터였다.     


난방이 안 되는 마루와 방 하나, 그리고 부엌 하나가 딸린 집이 그다음 기억이었다. 화장실은 여러 가구가 함께 사용하는 공동화장실이었다. 내가 그토록 싫었던 공부방이 사라지고 그만한 크기에 공간에서 다섯 식구가 살아야만 했다. 그때부터 우리 남매의 고민은 공부도, 친구도 아니었다. 그저 엄마와 아빠가 싸우지 않길 매일 기도했다. 밥상이 엎어지고, 이혼이라는 말이 오가는 환경에서 우리 남매가 할 수 있는 것은 행복한 모습이 아니라 그냥 아무 일 없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날 나는 엎어진 밥상과 이혼을 이야기하는 부모님을 피해 만신창이가 된 마음으로 무작정 집을 나왔다. 또래 친구들은 사춘기지만 나는 사춘기를 느낄 여유 없이 그날도 맞은편 빌라 4층 옥상에서 밤하늘을 올려 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 반짝이던 별이 눈물과 만나서 뿌옇게 더 크게 반짝였다. 저 아래에서는 엄마와 남동생이 걱정스럽게 나를 찾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엄마는 술을 한 적이 없었다. 어느 날 엄마가 술에 취해 들어왔다. 술에 취해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엄마를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무기력한 사춘기의 나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며칠 후 엄마는 시장 구석에 있는 작은 식당을 인수했다고 했다.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엄마는 권리금이 없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손님이 없어 망해가는 식당을 인수한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때 엄마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권리금이 없는 가게만 찾아다녔다고 했다. 그리고 그 가게를 인수하고는 죽을힘을 다해 장사했다. 엄마가 가진 간절함이 통해서였을까? 그 식당은 조금씩 손님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때 아빠의 월급은 압류된 상태였다. 다행히 엄마 가게가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엄마는 하루하루 번 돈으로 생활비와 부도를 막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빌린 돈을 조금씩이라도 갚을 수 있었다.      

그날은 나 혼자 집에 있었던 날이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긴장이 됐다. 조심히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처음 본 아주머니 두 분이 서 있었다. 인구 총조사를 하러 나왔다고 했다.      


‘방은 몇 개인가?’, ‘몇 명이 함께 살고 있나?’, ‘누구누구와 살고 있나?’      


그분께는 당연한 일이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주인집 큰 딸이었는데…. 우리 집 벽에 누가 낙서만 해도 화가 나서 밀쳤던 나였다. 화가 나는데도 애써 표현하지 않으려고 했다. 가난해졌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나는 엄마의 김치찌개를 좋아한다. 혀는 맛있는 음식 덕분에 기분이 좋은가보다.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는데도 가슴은 여전히 가난 해지 것 같은 그때 느낌이 남아있다. 엄마가 끓여놓고 나간 김치찌개를 혼자 울면서 먹었던 그때 그 느낌이 남아있다. 혼자 집에 있을 때 그토록 먹고 싶은 김치찌개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가끔 그때 생각이 나서 울기도 한다. 전화기를 들고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사춘기 소녀로 돌아가서, 엄마가 너무 보고 싶은 사춘기 소녀가 되어 그냥 엄마에게 전화한다.     


“엄마, 건강히 잘 지내지요?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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