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리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끼리끼리 앞뒤로 책상을 붙이고 앉아 도시락을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뒤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아 있었던 나는 짝꿍과 함께 뒤에 앉은 친구들과 점심을 먹기 위해 책상을 붙이고 다정하게 마주 보고 앉았다.
회색 도시락 가방 지퍼를 열었다. 갑자기 툭 하며 흰색 봉투가 하나가 떨어졌다. 봉투를 열어보니 주민등록증과 함께 편지 한 장과 만 원 한 장이 들어있었다.
“이건 내 주민등록증이잖아!”
그때 알았다. 어제가 바로 나의 주민등록증이 나온 날이었다.
안양에서 대전으로 이사를 온 지 6개월이 지났다. 전학 절차가 늦었기 때문에 나는 식구들과 함께 떠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친구 집에 일주일을 머물렀다. 일주일 후 전학 절차가 끝났다는 전화를 받고 혼자서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갔다.
열차를 타고 가며 멀어지는 고향을 바라봤다. 이 순간이 오면 슬플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무덤덤했다. 어쩌면 슬픈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 집은 잘못된 보증으로 망했다. 엉망이 된 집안, 깨져버린 화목, 이 모든 것을 경험하면서 나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끝없는 무기력함을 느꼈다. 그저 버텨야만 했다. 그런 곳을 떠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한편 시원하기까지 했다.
매일 아빠, 엄마가 싸우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내가 사랑했던 우리 집 강아지 ‘해피’도 매일 구슬프게 울어댔다. 해피도 우리 집이 망했고, 이제는 화목한 가족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새로 살게 된 집은 공단이 근처에 있는 사택이었다.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 공장 일부가 지방으로 이전했는데 아무도 지원자가 없었다. 아버지도 처음에는 지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집이 망하면서 집도, 통장의 돈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아버지는 사택 지원 때문에 지방발령을 신청했고, 지원자가 없어 고민하던 회사는 그렇게 우리에게 집을 제공했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살 집이 생겼다. 불가피한 선택이자 새로움을 향한 작은 날갯짓이었다.
이사 간 집에는 방이 두 개였다. 이사 온 첫날은 정말 좋았다. 제대로 된 가구 하나도 없이 방 한 칸에서 다섯 식구가 부대끼며 살았다. 그래도 깨끗한 아파트에 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고등학생인 나는 그냥 좋았다. 어쩌면 힘든 현실에 더 빨리 적응하려고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결혼하고 처음 내 집 마련했을 때보다 그때가 더 좋았던 것 같다.
집은 망했지만, 엄마는 아이들의 자존심만은 지켜주고 싶었다고 했다. 엄마는 버스정류장에서 지나가던 고등학생을 붙들고 물었다.
“학생들~ 대전에서 제일 좋은 고등학교가 어디예요?”
학생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대전에서 제일 좋은 고등학교는 OO고등학교예요.”
엄마에게 갑자기 꿈이 생겼다. 그리고 밤마다 큰딸을 그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그리고 교육청에 가서 담당 공무원에게 꼭 그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엄마는 입학이 추첨으로 결정되는 학교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공무원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엄마는 그렇게라도 해야만 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엄마의 간절함이 통해서였을까? 나는 그 OO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안양에서는 걸어서 15분만 가면 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1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그것도 1시간에 1대밖에 없는 버스였다. 그만큼 우리 집은 변두리였다.
아직도 학교에 가던 길이 기억난다. 추운 겨울 아침 이른 새벽 혼자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갈 때면 공단지역 특유의 냄새가 났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일어났던 일만큼이나 불쾌하고 기분 나쁜 냄새였다. 아침마다 이상한 냄새는 코를 자극했다. 게다가 안개가 심해서 멀리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새벽길을 혼자 10분 정도 걸어가면 버스정류장이 나왔다.
버스를 타고 학교로 가다 보면 어느새 어둠이 사라지고 버스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왔다. 나는 매일 아침을 그렇게 버스 안에서 맞이했다. 주민등록증과 편지를 발견한 그날도 그렇게 학교에 갔다.
흰색 편지 봉투를 열었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가 없었던 나는 편지를 읽고서 북받치는 마음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소리를 내 울기 시작했다. 도시락을 먹던 친구들이 울고 있는 나를 껴안았다. 곧 친구들도 영문도 모른 채 같이 울기 시작했다.
힘든 일을 마치고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혹시 깰까 봐 불도 켜지 못하고 달빛에 비추어 너희들의 잠든 얼굴을 제일 먼저 찾는단다.
곤히 잠든 너희 하나하나 이 마를 쓸어내리다 보면 오늘 일하면서 느낀, 좋지 않은 감정은 다 사라지고 너무 미안한 마음에 눈물만 흐른단다.
엄마가 얼마나 그리웠을까... 너희 눈에 엄마를 담은 때가 언제였을까.
매일 새벽 도시락을 만들고 집을 나설 때 잠든 너희들 하나하나를 가슴에 새긴단다. 다시 힘든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너무 늦은 시간이지만 혹시 잠들지 않은 너희 얼굴, 목소리... 혹시 만날 수 있으려나 기대한단다.
물론 오늘도 어제처럼 너희는 꿈속에서 엄마를 만나겠지?
우리 딸, 오늘 하루는 어땠을까? 혹시 마음 아픈 일은 없었을까? 혹시 엄마가 곁에 있어야만 하는 상황은 없었을까? 늘 미안하고 또 미안한 마음뿐이란다.
엄마가 싸준 도시락은 맛있었을까? 혹시 반찬이 친구들에 비해 촌스럽지는 않았을지 한창 먹을 나이에 용돈은 부족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미안하고 또 미안한 마음뿐이란다.
사랑하는 내 딸아...
처음 우리가 만났던 날, 아직 눈도 뜨지 못한 너를 바라보며 최고로 키우고 싶었는 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단다.
기특한 내 딸아.
이런 상황에서도 힘들다는 내색도 한 번 하지 않고, 짜증 한 번 부리지 않고 큰딸로서 동생들까지 챙겨주는 네가 엄마는 너무 자랑스럽고 사랑스럽단다.
그렇게 어른스러운 내 딸이 이제 진짜 어른이 된 증표인 주민등록증을 받았구나.
어젯밤 엄마는 식탁에 네가 놓아둔 주민등록증을 보고 한참을 소리 죽여 울었단다. 미안한 마음과 대견한 마음 그리고 이제 우리 아기가 어른이 되었다는 아쉬운 마음이 뒤섞이면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르더구나.
사랑하고 사랑하는 내 딸아...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렴. 지금은 주지 못하는 사랑을 엄마가 잘 모아두었다가 남은 평생 꼭 너에게 돌려줄게.
사랑한다.
엄마가 쓴 편지에는 군데군데 마른 눈물 자국이 있었다. 엄마의 눈물이었다. 힘들게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편지를 쓰면서 엄마는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그 편지는 내 고등학교 시절을 버티게 한 힘이었다.
몇 년 전 남편과 아들과 함께 예전에 살던 대전 그 집을 찾았다. 25년 전 기억 속 그곳은 텅 빈 공간 가운데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2동짜리 사택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곳은 크고 작은 건물들이 채우고 있었다.
‘너도 그동안 허전했던 공간을 채워갔구나’
갑자기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 시절 모든 것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던 우리 가족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곳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우리 가족이 힘겹게 어둠의 터널을 건너던 그 시절, 그 어둠의 종착역이자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바로 여기. 한 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우리 가족은 이 새로운 땅으로 이사를 왔고, 다시 작은 날갯짓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전은 내 사춘기 시절 특별함을 간직한 남다른 기억을 주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