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아빠는 20살이 되던 해 큰아빠가 계신 서울로 올라와 직장생활을 시작하셨다.
아빠는 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그리워하셨다. 가끔 <그리운 내 엄마>, <고향역> 같은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노래를 들으실 때면 조용히 눈물을 흘리곤 하셨다. 친할아버지는 아빠가 아주 어릴 적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리고 할머니는 아빠가 사우디에서 일하고 돌아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마루에서 미끄러져 뇌진탕으로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다고 하셨다.
아빠는 할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사범학교를 나왔지만, 몸이 약하셨기 때문에 농사일은 못 하시고 집에서 지내면서 마을 사람들을 가르치는 선생님 같은 분이셨다고 했다.
덕분에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좋아하셨지만 그만큼 할머니는 고생하셨다고 한다. 할머니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시골에서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친척들은 내가 할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했다. 어릴 적 아빠가 가끔 나를 가만히 보고 있을 때가 있었다. 어쩌면 나를 보면서 어머니를 그리워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빠는 일요일마다 <우정의 무대>를 즐겨 보셨다. 나는 아빠 옆에 앉아 같이 보기는 했지만 정말 재미가 없었다. 군인 아저씨들의 장기자랑 하는 모습은 정말 지루했다. 채널을 돌려 만화영화나 연예인 오빠가 노래하는 것을 보고 싶었지만, 엄마한테 혼나기 때문에 그냥 참고 앉아 있었다.
“엄마가 보고플 때 엄마 사진 꺼내놓고 엄마 얼굴 보고 나면 눈물이 납니다. 어머니, 내 어머니, 사랑하는 내 어머니. 보고도 싶고요. 울고도 싶고요. 그리운 내 어머니~”
이 노래가 나올 때가 되면 아빠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아빠는 매주 일요일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말씀은 하시지 않았지만, 아빠도 아빠의 엄마가 정말 그리웠나 보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탓인지 어릴 적 아빠는 정말 가정적이셨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우리 가족은 주말마다 캠핑, 낚시, 여행을 다녔다. 그렇게 어릴 적 아빠에 대한 기억은 따뜻함으로 남아있다.
매일 아빠의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엄마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셨다. 엄마는 식사 준비가 끝나갈 때쯤 2층 베란다 문을 열고 골목에서 놀고 있는 막내 남동생을 불렀다.
“영민아, 밥 먹어!”
가끔 동생이 대답이 없을 때면 엄마는 내게 남동생을 찾아오라고 하셨다. 나는 입을 쭉 내밀고 툴툴거리며 온 동네를 뒤져 남동생을 찾아오곤 했다. 남동생은 노느라 얼굴과 옷이 땀과 먼지에 찌들어 있어도 조금 더 놀겠다고 하며 말을 듣지 않았다. 동생과 한참 말싸움을 하고 있을 때면 저 멀리 동네 입구에서 아빠가 우리를 향해 웃으면서 걸어오셨다.
어린 남동생은 아빠를 보고 달려가 안기더니 누나가 괴롭혔다며 일러대기 시작했고 나는 동생을 향해 눈을 흘기고 있었다. 아빠는 가방을 잠시 땅바닥에 내려놓고 티격태격하는 우리 남매를 꼭 안아주시곤 손을 잡고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막내 남동생이 태어났을 때 아빠는 매일 퇴근할 때마다 웃으시며 남동생 장난감을 사 오셨다. 나는 왜 남동생 장난감만 사 오는지 아빠가 미웠다. 그래도 아빠와는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할 만큼 사이가 제법 좋은 편이었다.
그런 아빠가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아빠, 엄마가 보증을 섰던 큰이모 사업이 부도가 났다. 매일 집 앞으로 사람들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모르는 사람들이 오더네 나중에는 친척들과 동네 사람들도 찾아오기 시작했다. 언성이 높아지고 욕도 들려왔다. 하루는 학교에 다녀왔는데 집 앞에 엄마가 넘어져 있고 엄마를 가로막고 소리치는 남동생의 모습을 본 적도 있었다.
“우리 엄마한테 그러지 마세요. 제가 나중에 커서 다 갚을 때니까 우리 엄마한테 그러지 마세요.”
우리 가족은 웃지 않았다. 따뜻한 밥을 해주던 따뜻한 엄마가 사라졌다. 다정했던 아빠가 사라졌다. 엄마와 아빠의 싸움, 이혼하자고 오가는 언성, 어느 날은 밥상이 엎어지기도 했다.
아빠에 대한 미움이 쌓여갔다. 웃음보다 울음이 많았다. 웃음보다 울음이 많아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엄마는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웃음을 잃어버린 내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의 온몸에 크고 작은 빨간 점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아빠는 매일 밤 온몸에 무엇인가를 바르곤 하셨다. 나중에 알았다. 그건 화병으로 인한 열꽃이었다. 열꽃은 점점 검버섯처럼 까맣게 변해갔다. 지금도 아빠는 그때 그 까만 흔적을 몸에 가지고 계신다.
그때 나는 웃음이 사라지게 만든 아빠가 미웠다. 변해버린 아빠가 미웠다. 아빠한테 대들다가 회초리로 맞은 날도 많았다. 나는 아빠를 미워했고, 아빠는 화를 버티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힘든 나의 시간을 버티고 있을 때, 아빠도 아빠 방식대로 가장 힘든 인생의 고비를 안간힘을 다해 버티고 계셨던 것 같다. 타고난 인생의 몫을 그렇게 다른 방법으로 채워가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손주
시간이 많이 흘렀다. 아빠는 아빠의 방식으로 엄마는 엄마의 방식으로 가족을 지켜냈다. 힘들고 어두운 터널을 다 지났지만, 아빠는 지금도 그 시절 이야기를 하지 않으신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행복했던 그때처럼 아빠는 시집간 딸들이 찾아오면 아이처럼 좋아하며 함께 하는 시간을 행복해하신다.
그런데 나는 아빠의 친근함이 조금 어색하다. 어릴 적 소소한 이야기를 나눌 만큼 좋아했던 그 아빠와 다르게 느껴진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인지, 아니면 아빠가 나이가 들어서인지, 그때 그 아팠던 기억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지금은 그저 옛날처럼 소소한 일상을 때로는 함께할 수 있는 이 시간이 소중할 뿐이다.
지금 나는 그때 아빠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다. 어릴 적 다정하고 친근했던 아빠, 힘든 상황에서 매우 미웠던 아빠를 지나, 지금 아빠는 손주들을 보며 행복해하는 아빠가 되셨다.
그렇게 나에게는 세 명의 아빠가 계신다.
세월 속에 다른 아빠의 모습이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정말 밉고 무서웠던 아빠에 대한 기억은 이제 조금 내려놓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옛날 힘들었던 아빠의 인생 한 토막을 옆에서 지켜본 딸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