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친정에 들렀다. 친정엄마와 저녁 반찬거리를 사기 위해 인근 대형 할인점을 방문했다. 카트 한가득 장을 보고 계산대로 가던 중 바닥에 누군가 떨어뜨린 핸드폰을 발견했다. 빨간 지갑형 케이스는 뭔가를 구겨 넣은 탓인지 볼록하게 솟아 있었다. 핸드폰 케이스 안에는 5만 원짜리 지폐가 가득 들어있었다. 얼핏 봐도 최소한 100만 원은 넘어 보였다.
( 나 ) “누가 핸드폰을 잃어버렸나 봐. 고객센터에 가져다주자.”
(엄마) “아니야 그러면 잃어버린 사람이 더 혼란할 거야. 돈이 많이 들어있으니 지금쯤 정신없이 찾고 있을 거야. 금방 여기로 찾으러 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자”
엄마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중년의 여성 한 분이 정신없이 바닥을 뒤지며 우리가 서 있는 근처로 다가왔다. 엄마가 그 여자분께 무엇을 잃어버리셨냐고 물었고, 그 여자분은 핸드폰 기종, 케이스 색상, 들어있는 지폐까지 설명하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카트를 그쪽으로 밀고 가서 그 여자분께 핸드폰을 내밀었다.
( 나 ) “혹시 이거 맞나요?”
(여자)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 여자분은 허둥지둥한 표정으로 코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했다. 여자분은 사례를 하겠다고 했지만, 엄마는 그럴 필요 없다고 하며 기분 좋게 돌아섰다.
(나) “엄마는 돈이 많이 들어있는 물건 주인 찾아주는 마법사인가 봐. 우리 대전에서 장사할 때 월급이 통째로 들어있는 어떤 아저씨 지갑을 찾아 준 적 있잖아.”
(엄마) “넌 기억력도 좋다. 그걸 아직도 기억해? 그러고 보니 그런 적이 있었네.”
1996년 우리 가족은 모든 재산을 잃고 안양에서 대전으로 이사를 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지만 엄마는 엄마이었기에 살기 위해 망해가는 가게 하나를 권리금 인수해서 장사를 시작했다.
사실 가게는 위치도 별로였고, 이미 여러 번 망했던 자리였다. 개업 첫날 손님이 많을 거라는 기대도 안 했지만, 생각보다 손님이 너무 없었다. 엄마는 장사를 마치고 청소를 하다가 구석에 있는 테이블과 의자 사이에 떨어진 갈색 지갑을 주웠다. 지갑은 두툼했다. 열어보니 지폐와 수표가 가득 들어있었다. 그날이 월급날이었으니 아마도 누군가 월급을 통째로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지갑을 잃어버린 사람이 애타게 돈을 찾고 있을 생각을 하니 얼른 주인을 찾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갑에는 주인을 찾을 신분증 하나도 들어있지 않았다. 엄마는 지갑 주인이 다시 가게를 찾아올까 싶어 가게 문도 닫지 못하고 한참을 기다리셨다.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지갑 주인은 소식이 없었다. 열흘이 지났을 즘 저녁 무렵 어떤 남자분이 가게에 들어왔다.
(남자) “제가 열흘 전에 여기서 회사 동료들과 저녁을 먹었어요. 그날 여기서 지갑을 잃어버린 것 같은데, 혹시 청소하다가 발견되지 않았나요?”
(엄마) “혹시 지갑이 무슨 색깔인가요?”
(남자) “갈색이요.”
(엄마) “지갑에 돈이 얼마나 들어있어요?”
(남자) “000만 원요. 그거 한 달 월급이거든요.”
(엄마) “그럼 맞네요. 주인이 찾으러 올 때까지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엄마는 계산대로 가서 서랍 안쪽에 보관해 둔 지갑을 꺼내 그 남자분께 건네주었다.
(남자) “제 지갑이 맞아요. 돈도 그대로 있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죠? 며칠 동안 정신없이 가슴을 치며 애타게 찾았어요.”
아저씨는 코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하신 후, 가게에서 저녁을 드시고 댁으로 가셨다. 열흘 동안 주인 없는 지갑을 가지고 있었던 엄마 역시 주인을 찾아주고,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며칠 후 그 지갑 아저씨가 동료들을 데리고 가게를 찾았다. 그날부터 지갑 아저씨는 거의 매일 엄마 가게에서 식사하셨다. 얼마 후에는 회사 동료들을 데리고 엄마 가게에 찾아와서 회식을 하고 갔다. 워낙 상냥한 엄마였고 요리 솜씨도 좋았기 때문에 소문을 타고 손님은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술 한잔하고 나면 엄마에게는 내가 이 식당 영업사원이라고, 같이 온 사람들에게는 착한 식당이 잘되어야 한다고 말씀하며 크게 웃곤 하셨다.
가게 문을 열었던 첫날 아침, 엄마는 새벽에 집 근처 절을 찾았다. 그때 우리 가족은 다 흩어져서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엄마에게 그 가게는 마지막 희망 자체였다. 절을 찾은 엄마는 부처님 앞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울면서 무릎이 닳도록 기도했다고 했다. 그 간절함이 통해서였을까? 그 갈색 지갑은 혹시 엄마의 간절한 기도를 들은 부처님이 보내주신 것은 아니었을까? 그 갈색 지갑으로 맺어진 인연으로 손님들이 계속 찾아왔고 엄마는 찾아오신 한분 한분 모두 감사해하며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엄마는 가게에서 번 돈으로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빚쟁이들이 가게를 찾아오기도 했지만, 어느 날부터 빚쟁이들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장사가 잘되면서 권리금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가게를 넘겼다. 마지막 날 엄마는 가게를 정리하고 허전한 마음에 의자에 앉아 정든 가게를 찬찬히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문이 열렸다. 지갑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섭섭함에 울고 있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때 월급이 통째로 들어있는 지갑을 찾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집에 돌아가서 지갑을 잃어버린 것을 알고 난 후 아내와 아이들 볼 면목이 없더라고요.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몰라서 며칠 동안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찾아다녔어요.
그 돈이 남들에게는 적은 돈일지 몰라도 우리 가족에게는 없으면 굶어야 하는 돈이거든요.
그렇게 찾아 헤매다가 포기하고 이 가게 앞을 지나가고 있었어요. 혹시나 해서 들어왔는데 여기서 찾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감사한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장사라도 도와드려야겠는 생각에 조금이라도 도와드리고 싶어 사람들을 데리고 왔었어요.
그런데 손님 각자에게 정성을 다하는 사장님을 보면 더 고마웠답니다. 그 사람들도 사장님의 정성에 감동해서 자주 찾았다고 하더군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연이었네요. 이 식당 저에게는 정말 편하고 기분 좋은 곳이었어요. 고향 같았어요. 사장님,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어디를 가시든 잘 되시리라 믿어요. 정말 정말 그리울 거예요.”
그날 엄마는 말을 잊지 못하고서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지금도 착한 사장님의 이쁜 딸이라고 나를 불렀던 그 아저씨 얼굴이 기억난다. 착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 이야기는 그렇게 기억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