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 없음

충분히 사랑했기 때문에

by 소소

SSL 만료 알림이 떠서 오랜만에 개인 포트폴리오 웹사이트에 들어갔다. 작년에 이 웹페이지를 만들 때만 해도 '그래도 좀 더 해봐야 후회 없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전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아 할 만큼 했다!'

중학생 때 미술을 시작했고, 고등학생 때는 서양화와 디자인을 했다. 대학에 가서는 UXUI와 3D 영상, 그리고 쭉 디자인 업을 하는 중인데 내가 속해 있던 3D 업계에서 하고 싶었던 일들은 많이 해본 것 같다. 매번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나름 여러 도전을 해본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나 자신을 하나의 사업 아이템이라고 생각해 보면, 이제는 이 업계에서 굳이 필요로 하지 않은 아이템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체할 수 있는 서비스(사람)가 많고, 앞으로의 변화와 속도를 고려했을 때도 큰 메리트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잘나가던 대기업이 한순간에 무너지기도 하고, 처음 보는 신생 기업이 알고 보면 오랜 시간 여러 시도를 반복해온 곳이기도 하다. 결국 기업도 서비스도 끊임없이 방향을 조정하며 살아남는다.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비스가 때에 따라 과감하게 피봇하듯, 사람에게도 그런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 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이 업을 마무리 짓고 다른 걸 도전한다고 생각하면 두려움이 컸다. 새로운 걸 시도했다가 실패하면 후회하지 않을까? 조금만 더 해볼 걸 하고 아쉬워하지 않을까? 혹시 도망치는 건 아닐까? 돌아왔을 때 내 자리가 없다면?

이제는 새로운 걸 도전하다 실패하더라도, 적어도 '끝내지 말 걸'이라는 후회는 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든다. 설령 후회하게 되더라도, 한 번 다른 길을 걸어본 경험은 지금까지 해온 일의 소중함을 더 또렷이 느끼게 해줄 것이다.

그동안은 안정적인 직업을 유지한 채 새로운 것들을 조금씩 시도해왔다면, 이제는 하나를 정해서 밀도 있게 집중해 보는 시기를 갖고 싶다.

나는 안정을 좋아하지만 안정만으로는 살아나지 않는 사람이다. 변화와 자극이 있어야 살아난다. 관성대로 살면 금방 시들어버린다. 계속 거스르는 과정이 있어야 그 안에서 잔잔한 스트레스와 자극, 그리고 해냈다는 성취를 반복하며 생기를 찾는다.

누군가의 것을 수행하는 방식보다, 내 것을 중심에 두고 필요할 때 협업하는 형태로 나아가고 싶다. 한 번뿐인 인생 이왕이면 안 하고 후회하기보다는 해보지 않은 길을 경험하고 싶고, 무거운 데스크톱과 모니터 대신에 조금 더 가볍고 유동적인 구조 안에서 가벼운 삶을 살아보고 싶다.

이 분야를 충분히 사랑하고 충분히 해봤다고 느끼기에 다른 땅을 밟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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