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산
빨강머리 앤배 사랑스러움 대회가 열렸데
천국에서는 ‘사랑스러움’으로 경쟁을 해서 상을 준데
주근깨 빼빼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운
외롭고 슬프지만 먹어본 적 없는 아이스크림 맛을 상상하는
소풍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못 가게 되면 한바탕 울고 일어서는
앤 같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천국에서
대체 네가 해 놓은 게 뭐야?
이 남자도 저 남자도 별로라는 딸에게 어느 날, 아버지가 물었어
예쁜 물건 왜 안 사냐는 것처럼
안정된 직장, 학위, 세련된 사회성, 혹은 그런 걸 갖춘 배우자
예쁜 것을 갖기 전에 사랑하고 꿈꾸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콘크리트 벽 사이 갈라진 작은 틈 사이로 보이는 풀뿌리
달빛보다 환한 밤의 불빛들 사이로 휘청거리는 눈빛들
해가 화려한 옷자락을 펼치면 숲의 그늘은 더 검게 흔들리곤 해
애써 지나치고 싶지 않은 모든 존재와 마음에 눈을 맞추며
천천히 힘 있는 걸음으로
오늘도 사랑스럽게
흩날리는 벚꽃을 보며 꽃잎마다 띄워 보낸 꿈이
시간의 터에 뿌리내려 아름드리 나무가 되기까지
언덕을 달리던 앤
어느 날 교사가 되고 길버트와 결혼하고
엄마도 되었지
작은 손을 잡고 함께 뛰는 마음으로
나도 걸어볼까 해
그런데 말이야,
천국에 간 사랑했던 사람이 1등을 해서 꿈에 나타나면
로봇이 흉내 내지 못할 사랑스러움 나무를
마음 가득 심어주고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