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사업가(사회복지사) 이름으로 산 게 벌써 십 년이다.
그 십 년 중 한 번의 이직이 있었으나 금요일 퇴사, 월요일 입사라는
(그 방식이 매우 상식 밖의 일이었던 탓에)
정말 지난 십 년간 나는 ‘내리’ ‘쉼 없이’ 또 '빈틈 없이' 이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괜히 또 이런 글을 써보자, 하니 첫 출근 날이 생각난다.
나중에 다시 쓸 테지만 그날 아주 정말 난리였다.
버스 타는 데서부터 우당탕탕이었고 인수인계받는 내내 주변 분위기가 매우 살벌했으므로,
나는 어깨를 절반쯤 접고 잔뜩 쪼그라든 상태에서 온갖 서류와 파일, 폴더를, 사람 이름과 직함을
뇌 저장공간 어디 즈음에 욱여넣어야 했다.
출근 이틀 째, 첫 명함을 받게 됐다.
이름 세 자 앞에 붙은 '사회복지사'라는 수식어.
나는 감개가 무량하여 그 글자 주변을 몇 번이나 손가락으로 쓸어냈다.
작은 눈을 그윽이 뜨고 서는 또 한참을 살펴봤다.
좋다.
이 이름, 오래도록 지켜가고 싶다.
스물네 살, 초보 사회복지사 나는 빨리 나이 들고 싶어 했다.
전화하는 법, 받는 법은 물론
복합기에 이면지를 넣을 때 흰 종이 면을 위로 보이게 넣어야 하냐, 뒤집어 넣어야 하냐,
팩스 번호를 넣을 때는 모든 번호를 다 눌러 입력하고 한 번에 발송해도 된다, 같은
방법과 규칙과 팁을 매번 씩 묻고 입력하고 익숙하게 만드는 게 나에게는 매우 고단한 일이었다.
동료선배 직원과의 관계 맺고 끊고 이어가는 법도, 전체 회식 때 2차에 끌려가지 않는 법도,
끌려갔다가도 은근슬쩍,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법도, 다 이때 배운 지혜이다.
무엇 하나 아는 게 없는 탓에, 헤매도 너무 헤매는 탓에,
하나하나 다 물어가며 배우고 익혀야 하며 눈치코치 살펴, 알잘딱깔센 해야 하는 탓에,
차라리 나이 드는 편이 낫다, 생각했다.
퇴근 버스 안 자리에 앉아 가만히 차창밖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괜한 설움이 북받쳤다.
그래서 늘 서른 살을 꿈꿔왔다.
그즈음이면 꽤나 괜찮은 사람이 되어있을 줄로만 안 것이다.
그게 얼마나 큰 착각이고 망상이며 얼토당토않는 헛소리였음은 십 년이 되어서야 알게 됐다.
그래서 그 착각, 망상, 헛소리가 무엇인고, 하면 아래와 같다.
보자, 보자. 그때 즈음이면 경력이 십 년이네.
많은 일을 빠른 시간 안에 척척 ‘해결’하는 중견 사회복지사가 되어있을 거야.
결혼을 했을까? 뭐, 아니라면 나름대로 ‘싱글 라이프’를 즐기면 되지.
집 한 칸, 차도 한 대 있으면 좋겠어. 나는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어.
이 분야에서 꽤 큰 사람으로 말이야. ‘커리어 우먼’, 그래. 그게 좋겠다.
십 년 후 나는 서른 살과 마흔 살 사이 즈음에 어중간하게 걸터앉아 있다.
퇴근하는 만원 지하철 안 작은 차창을 바라보며 다시 생각했다. 그놈에 '커리어 우먼'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냥 ‘와장창’이다. 한두 가지 말곤 이룬 게 없다.
다만 지금 나는 사회사업 하는 사람의 ‘책임’과 ‘의무’로서 옳고 바름에 대해 고민하고 고찰한다.
더 많은 글을 읽고 쓰고 나눠가며 자기 삶과 자기 실천에 떳떳한 사람이고 싶다.
나이 들고 몸이 아픈 사람, 가진 돈이 적고 마음이 힘든 사람,
‘소수’이기 때문에 소외, 배제되며 차별, 혐오를 겪는 사람,
그런 사람 옆을 든든히 지키고 서서
그럼에도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닌 귀한 면면을 알아보는 사회복지사로 기억되고 싶다.
글을 맺기 전에, 몇 마디만 더 써야겠다.
그간 써온 글이 적지 않음에도, 이번에는 유독 겁이 났다.
이런 글을 써도 될까? 하는 염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괜히 부담.
그럼에도 이렇게 새로운 도전을 하는 이유는 ‘알아봐 주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사회사업 하는 우리가 '사람'과 '사회'를 살펴보는 눈을,
아낌없이 모두 내어주던 마음을,
이 순간에도 ‘자기복지’와 ‘주변복지’를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 애씀을,
이제는 좀, 제발 좀 알아봐 주었으면 한다.
지난 십일 년 간, 사회복지 현장에서 누린 웃음과 눈물, 기쁨과 슬픔, 삶과 죽음의 면면을
짧은 글로나마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