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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작가 Oct 07. 2022

10월 7일 이세진의 하루

폐업

“안녕하세요. 사장님. 방금 잔금 다 보내드렸습니다. 확인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이고, 이대표. 고마워요. 적지 않은 돈인데 이대표 역시 마지막까지 능력 있네.”


“하하.. 아닙니다. 다 사장님이 잘 돌봐주신 덕분이죠.”


“…. 그래, 이제 다 정리했고?”


“아뇨. 아직 정리할게 많습니다. 벌린 일이 많네요 하하….”


“거래 업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이대표 내가 많이 아꼈어요. 언제 마포 근처로 오면 연락해줘요. 술 한잔하죠.”


“네! 연락드리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세진은 전화를 끊고 모니터를 바라봤다. 그는 엑셀로 정리한 표를 바라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직도 세진이 돈을 갚아야 할 곳은 많았다. 다행인 것은 모두 세진이 현재 갚을 수 있는 돈이라는 것이었다. 정부에서 받은 대출금이 있지만 이 역시 갚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

.

.


모든 잔금을 치른 세진은 통장에 남은 금액과 텅 빈 사무실을 번갈아가며 봤다. 수십 명이 있던 사무실에는 이제 세진만 남아있었다. 세진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빚도 안 지고 끝낼 수 있었네…. 아닌가 빚이 없는 건 아니지….”


세진은 의자에 기대어 천장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8년 전, 처음 회사를 차리던 그 시절로 세진은 돌아갔다. 


5년 전, 세진은 친구들과 회사를 차렸다. 모든 스타트업은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한 돈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다행히 세진은 돈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친구들에게 금수저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지만 세진이 그만큼의 돈까지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적당히 회사를 1~2년 굴릴 수 있을 정도의 자금은 가지고 있었다. 은수저, 혹은 동수저 정도 되었다. 

세진의 시작은 매우 좋았다. 다른 스타트업에 비해 여유로운 자금으로 시작했기에 고급 인력을 모을 수 있었다. 세진의 친구들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세진의 아이디어를 실현시킬 수 있으면서도 연봉도 적당하고 세진이 믿을 수 있는 사람. 세진은 친구들과의 우정을 믿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친구들과의 협업은 시너지 효과를 내기 시작했다. 

회사는 1년 만에 업계에서 알려졌다. 수많은 투자 문의가 들어왔지만 세진은 투자를 받지 않으려고 했다. 세진은 회사의 가치를 투자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높게 책정하고 있었다. 친구들은 세진에게 그래도 엔젤 투자라도 받는 것을 추천했지만 세진은 남의 돈을 빌리는 것을 싫어했다. 보통 직원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세진이었지만 돈에 있어서만큼은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창업한 지 2년 만에 회사는 많은 돈을 벌기 시작했다. 초기 투자로 이야기되던 비용의 몇 배를 벌었다. 세진은 자신감이 생겼고 번 돈을 더 공격적으로 인재에 투자했다. 회사는 순식간에 커졌고 더 많은 인재들이 몰렸다. 

세진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남의 의견을 듣던 세진은 점차 자신의 판단을 더 믿었다. 같이 일하는 친구들과의 의견도 묵살하기 시작했고 친구들은 점차 세진을 떠났다. 창업한 지 3년 정도 지났을 때 세진의 곁에는 처음 회사를 창업했던 멤버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세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비즈니스 모델은 견고해 보였고 세진에게 초기 멤버들 없이도 회사를 확장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회사는 성장 동력을 상실했다. 경쟁 회사가 많아지면서 세진의 사업 모델은 이제 더 이상 특별하지 않게 되었다. 세진은 차별화를 꾀하려고 했지만 새로운 아이디어들은 번번이 실패했다. 자금 운영에 있어서만큼은 대단한 능력을 보이는 세진이었기에 회사의 경영이 어려워지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바심이 난 세진은 직원들을 압박했다. 사무실에서 세진이 소리를 지르는 경우가 많아졌고 그런 대표의 성질에 못 이긴 직원들을 회사를 떠났다. 세진은 사람들이 떠나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언제든지 새로운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장 동력을 잃은 회사에는 더 이상 예전처럼 좋은 인재가 지원하지 않았다. 세진은 처음에는 높은 기준을 가지고 직원을 채용하려고 했지만 언젠가부터는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게 되었다. 결국 세진은 평범한 수준에 적당한 연봉을 부르는 사람들을 뽑기 시작했고 회사는 전문성을 잃어갔다. 그리고 힘들게 뽑은 직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퇴사를 했다. 세진은 계속해서 채용 공고를 올려야 했다.


“퇴사자가 너무 많음. 이 회사 곧 망할 수 있으니 지원하지 마세요.”


어느 날 세진은 회사 평가 사이트에서 회사에 안 좋은 리뷰들이 올라오는 것을 봤다. 세진은 회사에 좋은 인재가 오지 않는 이유를 회사 평가 사이트의 부정적인 평가에서 찾으려고 했다. 그는 평점 관리까지 해가며 회사의 부정적인 이슈를 제거했다. 하지만 회사의 진짜 부정적인 요인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생기고 있다는 것을 세진은 외면하고 있었다. 

매출이 너무 떨어지자 세진은 인원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세진은 일부러 직원들이 나가는 것을 맞지 않았다. 그렇게 인원은 자연스럽게 줄기 시작했다. 또한 세진은 매출에 비해 좋은 사무실까지 얻은 적도 있었지만 점차 하자가 있는 사무실로 계속해서 이사를 해야 했다. 모든 것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을 때 세진의 회사에는 20명 정도의 직원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비즈니스를 운영할 수 있는 거의 최소한의 인력이었다. 

기존 비즈니스로는 사업을 지속하기 어려워지자 세진은 정부지원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적은 금액에 비해 과업의 범위가 많은 것들이었지만 세진은 마다하지 않았다. 원래 세진이 하던 일을 보고 들어왔던 직원들은 전혀 다른 일을 해야만 했다. 결국 이들은 회사를 또 떠났고 세진은 이를 막을 수 없었다. 

정부지원사업으로 세진은 2년 남짓 버틸 수 있었다. 처음 창업했던 비즈니스는 완전히 사라졌고 세진은 10명 남짓한 직원을 데리고 지원사업만 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사업체 하나를 굴리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세진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몇 달 동안 세진은 사업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지난날의 자신을 반성하기도 했으며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를 정리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내린 결론은 폐업이었다. 갑자기 직장을 잃게 되는 직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세진은 이렇게 사업을 유지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했다. 세진은 자금 사정을 확인했다. 남은 정부지원사업의 과업이 끝나는 일정까지 확인한 세진은 사업을 접을 날짜를 마음속에 정했다. 하지만 세진은 직원들에게 바로 말하지는 않았다.

자신들이 할 일이 끝났음에도 새로운 일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직원들은 점차 회사에서 탈출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세진은 그들을 막지 않았다. 마지막 정부지원사업이 끝나갈 무렵, 세진은 남은 직원들을 모아 사업을 완전히 끝내기로 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누구도 세진의 말에 놀라지 않았다. 세진은 차분한 목소리로 남은 직원들에게 퇴직금을 지불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며칠 후, 회사에는 세진만 남게 되었다. 


“이대표. 계세요?”


세진의 사무실에 어떤 남자가 들어오며 말했다.


“아, 사장님. 안녕하세요.”


세진은 남자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그는 건물주였다. 세진은 그를 사장이라고 불렀다.


“오늘 짐 다 뺀다고 했죠? 아이고, 벌써 거의 다 정리했네. 다른 직원들은 벌써 갔어요? 왜 혼자 있어?”


건물주는 사무실을 둘러보면서 세진에게 말했다.


“아, 네 직원들은 먼저 보냈어요. 물건들은 거의 다 팔았고 남은 건 제 개인 짐이라서 저 혼자 챙길 수 있어요.”


세진은 씁쓸한 표정으로 건물주에게 대답했다.


“아무튼 고생했어요. 여기 보일러도 맨날 고장 나서, 내가 너무 미안하네. 여기 건물이 좀 낡아서 하하..”


“아닙니다. 저희 어차피 봄에 들어왔었는데요 뭘….”


“아! 그렇지 하하…. 그래, 이대표. 고생 많았어요. 사업 접는다고 했던가? 아직 젊은데 뭐하려고?”


“글쎄요. 남은 돈이 거의 없어서 어디 취업하기는 해야 할 거 같은데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일단 남은 돈으로 머리 좀 식힐 겸 여행 가려고요.”


“내가 이대표 얼마 안 봤지만 성실한 청년이라고는 자부하지. 이대표는 어딜 가든 잘할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 어디 밥 안 먹었으면 밥 어때? 내가 사줄게요.”


“아닙니다. 저 속이 안 좋아서요. 제가 나중에 근처 오면 제가 사드릴게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래요. 아이고 아깝네. 그래, 수고해요. 나 먼저 가요.”


“네. 감사했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세진은 계단으로 내려가는 건물주에게 인사했다. 세진이 현재 있는 건물에는 세진네 회사 외에는 아무도 들어와 있지 않았다. 건물은 낡고 하자가 많았지만 위치 때문에 월세는 꽤 나가는 곳이라 찾는 회사가 거의 없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세진은 자리를 정리했다. 그는 짐을 챙겼다. 이미 대부분의 물건은 집에 옮겨놨기 때문에 오늘 세진이 챙길 것은 노트북과 잡다한 사무 도구뿐이었다. 세진은 짐을 가지고 계단으로 내려갔다. 세진의 사무실은 5층에 있었지만 엘리베이터가 또 고장 났기 때문에 세진은 계단을 이용해야 했다. 


1층으로 내려간 세진은 짐을 들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가지고 있던 차도 처분했기 때문에 세진은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다. 세진은 택시에 돈을 쓰는 것도 아껴야 했기에 버스를 타야 했다. 정류장으로 향하던 세진은 뒤를 돌아 사무실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많은 생각이 드는 세진이었지만 짐을 계속 들고 있으려니 무거웠기에 그는 다시 방향을 틀어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집으로 가는 세진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겨우 참았다. 가을바람이 기분 좋게 불고 있었지만 세진의 마음은 차가운 겨울로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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