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선 독서의 계절로 가을을 꼽지만 스페인은 조금 다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짧게는 2주, 길게는 4주 휴가를 떠나는 이 여름이 바로 책 읽기 가장 좋은 계절이다.
스페인 근로자 기본법 (Estatuto de los Trabajadores) 제38항 ‘연간 휴가’에 관한 가장 첫 번째 조항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휴가는 개별 계약서나 소속 노조의 노동협약에 따라 정해지며 어떠한 경우에도 자연일 기준 30일 미만의 기간이 될 수 없다.
즉, 근로자라면 누구나 계약 조건이나 근속 연수와 상관없이 기본 공휴일 외 최소 연간 30일의 휴가를 누릴 수 있다. 자연일 기준 30일이기 때문에 근무일 기준으로는 연간 22일에 해당되는데 많은 노조의 노동협약에서 이 중 최소 50%를 여름에 사용할 것을 권하고 있다. 여름휴가 사용하지 않고 돈으로 청구할 수 있을까? 앞서 말한 근로자 기본법의 같은 항에 따르면 휴가를 ‘경제적으로 보전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상식적인 회사라면 여름휴가를 가지 않고 근무한다 해도 이를 반기지 않는다. 남들 다 쉴 때 같이 쉬는, 다시 말해 절대적인 업무량이 주는 여름에 직원들이 휴가를 소진하는 게 회사에게도 이득이다.
가장 절정인 휴가철은 8월이지만 6월 말부터 순차적으로 휴가를 떠나기 때문에 벌써 마드리드 시내나 도로에는 사람과 차들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이 체감된다. 이렇듯 여름이면 긴 휴가 덕에 여가시간도 늘어나고, 그만큼 책을 읽을 여유도 생긴다. 이맘때면 스페인의 많은 언론사들이 일제히 ‘휴가지에서 읽기 좋은 책 베스트 00!’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는 이유다.
바르셀로나의 여름, 야경 명소 '벙커'에 모인 사람들 ⓒ 이루나
이런 경향은 항공권 검색 포털 사이트인 스카이스캐너(Skyscanner)가 지난 4월 세계 책의 날 기념으로 스페인 여행자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드러난다. 설문 응답자의 절반 이상인 53%가 휴가 기간을 이용해 독서를 한다고 대답해, 출퇴근길에 독서를 한다고 대답한 25%를 훨씬 웃돌았다. 사실 휴가 때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여행지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독서는 어찌 보면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이를 증명하듯 70%의 스페인 사람들이 휴가지 정보를 얻는 방법으로 종이책 형식의 가이드북을 선호한다고 답했고, 35%는 휴가지에 관한 역사책을, 또 27%는 휴가지와 연관된 소설을 읽음으로써 휴가를 준비한다고 복수 응답했다.
휴가 기간에 증가하는 것은 종이책 독서량만이 아니다. 오디오북 플랫폼 스토리텔(Storytel)에서 스페인 이용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여름휴가 기간 동안 오디오북 이용이 약 45% 증가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여름휴가 기간 중 가장 인기 있는 책으로는 단연 소설을 꼽는 설문조사 결과가 많다. 그중에서도 오락의 성격이 강한 스릴러나 로맨스 소설이 강세다. 원래도 스페인 출판 시장에서는 이 두 장르 소설이 인기가 높은 편이나 특히 여름의 경우 여가를 즐기는 독서이니만큼 쾌락과 즐거움을 선사하는 소설이 더욱 인기가 높은 것으로 해석된다. 앞서 언급한 오디오북 플랫폼 스토리텔 역시 또한 여름에 가장 많이 듣는 오디오북으로 소설(45%)을 꼽았고, 뒤를 이어 각각 자기계발서(12.9%), 역사 도서(10.4%), 경제, 비즈니스 관련 도서(3.2%) 등이 순위를 차지했다. 스페인 서점조합연합회에서 운영하는 도서 포털(www.todostuslibros.com)의 올해 7월 셋째 주 도서 판매량 순위를 봐도 10위권 내 책 중 거의 절반인 4권이 로맨스 소설 또는 스릴러 소설임을 확인할 수 있어 여름시즌 더욱 수요가 많아지는 장르 소설의 인기를 확인할 수 있다.
16세기 식민지 원주민 인권을 논의한 '바야돌리드 논쟁'이 있었던 바야돌리드의 여름 ⓒ 이루나
한편, 이런 스페인 독서의 계절에 한국 책들이 크게 눈에 띄지 않는 건 한국 도서의 글로벌을 꾀하는 입장에서는 약간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아주 활약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큰 인기를 끌었던 <풀>에 이어 올해 출판된 김금숙 작가의 <기다림>은 주요 도서 포털이나 언론에서 올여름 꼭 읽어야 할 그래픽 노블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실제로 김금숙 작가는 현재 스페인에서 국내외를 통틀어 가장 인기 있는 그래픽 노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조금씩 스페인에서 한국 도서의 저변이 확대되어 가는 중이라는 반증일 것이다.
책 읽기 좋은 계절 스페인의 여름이 어김없이 도래했다. 올해도 많은 스페인 독자들이 지중해변에 누워, 산그늘에 기대어, 또는 새로운 모험지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다양한 독서를 즐길 것이다. 앞으로 다가오는 여름에는 더 많은 스페인 독자가 한국 도서를 휴가지 독서로 선택하기를, 또 더 많은 언론에서 한국 도서를 올여름 추천도서로 선정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