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의 사법기관 법무대응팀, 미 국토안보부(Homeland Security Investigation) 수사관들은 계급 직책을 떠나 오직 사건 하나만을 평등한 시선에서 바라보면서 법적 근거에 따라 자료를 제공해 주었고, 그렇게 제공받은 자료를 오랜 기간 동안 조합해 피의자의 인적사항을 특정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 피의자가 어느 국가, 어느 지역에 숨어서 범죄를 저지르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더라고 사건 담당 형사가 ‘일체 불상’ 상태에서 피의자의 인적사항을 특정했다는 말은 이미 수사의 절반을 넘어왔다는 신호가 됩니다.
팀장과 수사과장에게 수십 번의 결제 라인을 거치고 그 결재로 완성된 서류를 의정부 지방검찰청 검사의 지휘를 받아야 되고 그렇게 지휘받은 최종 서류로 의정부 지방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 검증영장을 발부받고 그 서류를 다시 담당자가 가져와 영문으로 번역해 해외 기관에 집행하고 그 서류를 전달받은 해외 기관에 담당자는 설명을 하는 방식으로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피의자가 국내에서 해외로 도주하기 직전까지 저질렀던 범행수법과 범죄사실, 피해를 당한 전국의 사건 서류들을 취합하고 피해자들을 추가로 접수하였습니다.
고소 사건을 처리해야 할 데드라인은 이미 넘어선 지 1년이 넘었고 이제 수사과장을 비롯한 경찰서 전체에서 제가 취급하는 사건에 대해 소문이 돌았습니다.
혼자서만 사건을 치고 나가다 그동안 저를 믿고 따라준 전국의 피해자분들에게 사건 브리핑을 해야 할 것 같아 경찰서장이 주로 직원들 대상으로 회의를 하는 소회의실을 빌려 날자를 정해 피해자분들을 오도록 하였습니다.
전국의 피해자들을 연천경찰서로 부르는 날 수사지원팀에서 이렇게 플랫카드도 만들어 주었습니다. 출처:박중현
처음 저에게 사건을 가져다주신 두 자매분들, 해외 취업을 시켜 준다는 피의자의 거짓 광고에 속아 해외까지 건너갔다가 결국 피해를 당해 국내로 돌아온 뒤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피해자분들까지 모두들 깊은 상처를 가지고 계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저에게 주신 단서를 정리해 영장을 받고 그렇게 받은 영장을 번역한 뒤 해외로 보내서 수사를 진행했습니다. 무엇보다 1년 넘도록 저를 믿어준 여려 분들이 응원을 해 주셔서 사건을 끌고 올 수 있었고 이제 최종적으로 해외에서 피의자를 데리고 오는 일만 남았습니다!”
사건 브리핑을 듣고 있는 피해자분들은 어느 때보다 더 진지했고 한분씩 한분씩 질문을 주셨습니다.
“그럼 해외에서 한국으로 직접 가셔서 데리고 오는가요?”
보통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는 수사 방법으로 진행하는지 궁금해하셔서 한 분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영화에서는 그렇게 많이 하는데, 범죄인 인도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저는 한국에서 경찰이지만 해외에서는 경찰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해외 수사기관에게 공조를 요청하고 그 해외 경찰이 해외에 은신 중인 범죄자를 체포해 저희 한국으로 인도를 해 주어야 하는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2시간 넘는 사건 브리핑을 마치고 피해자분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면서 다음에 만나기로 하고 작별 인사를 하였습니다.
“형사님, 이번 봄에 저희 딸이 결혼합니다!”
피해자 중 한 분이 딸과 함께 저에게 인사를 하셨습니다.
“아 그래요? 정말 축하합니다. 이제 이 사건은 저에게 남겨 두시고 앞만 보고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처음 피해자 조사를 할 때만 하더라도 사건의 충격으로 힘들어했지만 저하고 오랫동안 면담하면서 사건의 고통은 잊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피해자분들이 모두 돌아가고 두 자매분이 할 얘기가 있다고 해 저의 사무실로 안내하였습니다.
“어디 멀리 가세요?"
뭔가 큰 결정을 한 것처럼 보여 제가 먼저 물어보았습니다.
“저도 그동안 일도 못했는데 이제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일 하실 곳은 알아보셨어요?”
“예 중국에 큰 대형 음식점에 메인 셰프로 일할 것 같습니다. 예전에 일을 했던 경험이 있어서 바로 일을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이 사건 진행 상황은 제가 동생분에게 수시로 알려 드릴 테니깐 앞으로 앞만 보고 이제 본인 생활에 집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던 언니분은 며칠 뒤에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그 뒤로 다시 한 달 동안 해외로 도주한 피의자를 국내로 송환하기 위한 서류 작업에 매달렸습니다.
1년 넘도록 서류를 묶었다가 풀었다가 묶기를 반복하다 보니 서류 연결 부분이 찢어져 테이프로 붙이고 다시 출력해 새 서류로 교체하는 등 말 그대로 서류가 난장판이었습니다.
사건기록을 얼마나 묶었다가 풀었는지 중간중간 서류들이 찢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출처:박중현
“서울지방경찰청 여성청소년계입니다. 박형사 님 사이버범죄 예방 강의를 잘하신다고 경찰청 담당자분한테 들었는데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학교 전담 경찰관 워크숍 때 강의를 해 주실 수 있는가요?”
해외 도주 중인 피의자에 대한 송환 작업이 마무리돼 갈 무렵 서울지방경찰청으로부터 강의 섭외 전화를 받았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장소는 어디인가요?”
“예 서울지방경찰청 대강당에서 할 건데 시간 맞춰서 오시면 됩니다.”
강의 1주일 전 전화를 받고 일정을 확인해 보니 마침 강의 전날 야간 당직이었습니다. 야간 당직은 밤을 세야 하기 때문에 다음날 피로도가 심해 웬만하면 강의 약속을 잡지 않지만 학교전담 경찰관 워크숍은 정해진 날짜에 진행하는 행사라 변경이 어려웠습니다.
학교전담경찰관이 알아야 될 사이버범죄 사례들을 슬라이드로 만들어 비록 야간 당직 다음날이라 피곤하긴 했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사이버범죄 예방교육을 진행하였습니다.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한교전담경찰관들 대상으로 제가 현장에서 경험한 사례들을 알려 주었습니다. 출처:박중현
2시간이 넘는 강의를 마치고 짐을 챙겨 집으로 퇴근하려고 휴대전화를 확인해 보니 사무실에서 부재중 전화가 10통이 넘게 와 있었습니다.
팀장님은 제가 전날 당직하고 비번이란 걸 알고 있는데 무슨 급한 일인 줄 알고 바로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예 팀장님 전화하셨어요?”
“박형사 지금 어디야?”
“오늘 비번인데 서울지방경찰청에 강의 있어서 왔습니다!”
“박형사! 좀 전에 전화를 받았는데 그 사람 지금 한국으로 온데!!!!!”
“예?”
언제든지 피의자가 해외에서 한국으로 입국 시 연락이 오도록 모든 조치를 해둔 상황이라 항상 인천공항으로 튀어갈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너무 예상치 못한 시점에 전화를 받아 순간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일단 박형사는 사무실로 와서 조사 준비를 하고, 우리가 인천 공항으로 가서 데리고 올 테니깐 사무실에서 만나자고!”
전화를 마치고 곧바로 사무실로 차를 내리밟았습니다.
제가 수갑을 채워야 했지만 그동안 저를 믿고 응원해준 팀장님이 수갑을 채운다는 생각에 제가 채우는 것만큼 흥분되었습니다.
5시경 사무실에 먼저 도착해 조사 준비를 마치고 서류를 검토했습니다. 전날 당직에 잠도 못 자고 거기다 강의까지 하느라 에너지를 다 쏟아버렸지만 팀장님의 전화를 받는 순간 제 몸은 다시 리셋되었습니다.
인천공항에서 피의자 신병을 인도해 데리고 오기까지 몇 시간이 걸리는 것을 알고 있어 출발이 늦어질 것은 예상했습니다.
저녁 9시가 넘어가자 경찰서 정문 출입구에 서서 저희 팀원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서 기다린 지 10분 정도 지났을 때 저희 팀 스타렉스 차량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경찰서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차량이 멈추고 팀장님과 팀원이 먼저 내리고 이어서 뒷문을 열고 수갑을 차고 수갑 위에 수건이 둘러싸여 있는 피의자가 내렸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렸던 피의자들 중 한 명과 마주하는 순간 제 머릿속은 그동안의 일들을 잠시 생각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이메일 주소 하나만으로 1년 동안 파고들었습니다.
전국의 피해자들을 불러놓고 기약 없는 조사를 하면서 너무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처음 두 자매분들이 예고 없이 사무실로 찾아와 이것저것 확인해 달라는 요구는 정말이지 피곤해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 자신의 한계에 부딪혀 여기저기 도움을 요청하러 다닐 때는 너무 초라해 보였습니다.
잡지도 못할 사건 왜 그렇게 오래 가지고 있냐며 수사과장에게도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옳다고 믿고 가는 길에 저를 응원해 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가장 힘들 때 저를 응원해 줬던 동료들은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핵심적인 인물이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사이버범죄는 해외 서비스 기관들과의 국제 공조가 핵심이 될 것입니다.
이번 사건은 저에게 많은 숙제와 가르침을 던져 주었습니다.
그리고 두 자매분들에게는 몇 년이 지나서 예기했지만 처음 경찰서에 고소장을 들고 앉아서 울고 계시는 뒷모습을 봤을 때 저의 어머니 뒷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렇게 1년 넘도록 진행한 사건의 전체적인 범죄사실을 맞춰볼 수 있는 피의자들 중 한 명이 경기도 끝자락 연천으로 압송되어 왔습니다.
이 피의자를 체포한 뒤로 무려 5개월 동안 수사를 더 진행하였고 더 많은 범죄사실과 밝히지 못했던 피해자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2016. 01.18. 자로 이 사건은 최장기 사건으로 기록되면서 더 이상 제가 가지고 있을 수 없어 사건을 의정부 지방검찰청으로 모두 넘겼습니다.
경찰서를 방문하는 사건에는 모두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그 사연들을 사이버범죄 예방교육을 위한 스토리 텔링으로 다시 만들었지만, 이 사건만은 사이버범죄 예방교육을 위해 공개하기가 많이 망설여졌습니다.
피해자분들은 아직도 그때 사기당한 피해금액을 변제하고 있고 피의자들 중 일부는 해외에서 도피 생활을 계속해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라 공개는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지만 피해자들은 더 이상 다른 피해자들이 생기면 안 된다고 저에게 강조하셨고 그동안 수사기법을 저희 동료들이랑 함께 공유하여야 할 것 같아 458일간의 수사 노하우도 공유하였습니다.
그해 연말 경찰청에서 458일간의 사건 과정을 발표하고 국제공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출처:박중현
그렇게 2016년을 보내고 늘 변함없이 1년간 100건이 넘는 사건을 처리한 채 2017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2016년은 혼자서만 사이버범죄 수사팀에서 근무하다 연천경찰서 개설 이후 처음으로 안랩 출신의 사이버특채 수사관이 발령받아 오면서 사무실에는 저와 후임 수사관 2명이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은 사이버 수사 형사로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경기북부지방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 직원 모집 공고에 지원서를 냈는데 선발이 되면서 그동안 연천경찰서에서의 사이버 수사 업무는 새로 부임받은 후배에게 물려주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10년이 넘도록 첫 근무지였던 연천경찰서에서의 생활 그리고 4년 동안의 사이버범죄 수사 업무 경력을 가지고 경기북부지방경찰청 사이버범죄 수사대로 옮겨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