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갑자기 글이 쓰고 싶었다. 평소라면 책 10페이지는 거뜬히 읽을 시간이었는데 이상하게 집중이 안되어 한 페이지를 간신히 읽어 내려갔다. 눈은 활자를 쫓아가긴 했는데 머리는 계속 '아냐, 오늘은 글을 쓰고 싶어'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브런치를 열어봤더니 세상 귀여운 알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글을 쓰지 않은지 벌써 330일이 넘었다니. 330일이면 거의 1년 아닌가? 알람을 보자마자 같이 책 읽고 있던 남편에게 '나 갑자기 글을 써야겠어.'라고 선포한 뒤 맥북을 꺼내 열었다.
근데 딱히 무슨 주제로 써야겠다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아, 제목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나도 참 나다. 제목을 먼저 안 쓰고 글을 먼저 채우면 되지 않나. 알면서도 난 그게 어렵다. 제목을 먼저 써야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제목 칸에 '무제'라고 적었다. 무제라니. 나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글을 쓰지 않고 지냈던 지난 1년이 갑자기 머릿속에 스쳐간다. 분명 좋았던 것도 많았는데, 요즘 같아선 내가 보낸 시간들이 다 거짓이었나 싶어 슬프기도 하다. 문장을 써 내려가는 것도 조심스럽다. 그래도 나 정말 괜찮다거나 아니면 너무 우울해서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식의 과장된 허위 내용은 아니니 솔직하게 써 내려가기로 방금 마음에서 결정했다.
힘든 일을 겪었다. 겪고 있다는 진행형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힘든 일이니 최대한 모르며 살아가고 싶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오히려 잘된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이 일을 겪은 이후로 갑자기 읽는 책들이 경제/경영/디자인 서적에서 심리/철학/(마음단련을 위한) 실용서 같은 분류들로 변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이 단단해지는 건지, 타인이 아닌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건지 매일같이 읽고 또 읽는다. 읽는 걸로도 부족한 것 같아 유튜브까지 열어서 관련 영상을 찾아보기까지 시작했다.
어떻게 서든 난 충격적인 그 사건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고 있지만, 정작 날 그 상황에서 꺼내주는 건 내 곁에 있는 나를 사랑으로 받아주는 사람들이다. 나도 나를 믿지 못해 의심하고 자책하던 그 날들 사이에서도 나를 믿고 사랑해 주는 사람들. 그 사람들 덕분에 나도 이제 조금씩 구렁텅이 늪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중이다. 다 빠져나왔다 생각하다가도 또 그 기억들 때문에 다시 가라앉게 되는데, 그때도 역시 나의 사람들은 나를 뭍으로 꺼내준다. 와, 진짜 이 사람들 없었으면 나는 어땠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분명한 건 나는 성장하고 있다. 온실 속에 화초도 아니면서, 스스로를 가두던 지난날들과 완벽하게 작별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나는 나에게 다정한 사람이고 싶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나는 고마움을 알고 고마움을 말하고 고마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니까.
글을 조금 더 꾸준히 써봐야겠다. 생각도 못했는데 내가 나에게 이야기하는 느낌이라 좋다. 문장을 쓰고 읽고 수정하는 글쓰기와 관련된 일련의 작업들을 하고 있자니 내 중심이 곧게 서게 되는 기분이다.
글의 마무리는 언제나 어렵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거다. 마지막 문장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오늘도 역시나 잘 자야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