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하게 인정하고 다시 시작할 나의 피아노를 응원하며
열아홉 인생동안 내가 피아노를 못 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여기서 포인트는 '못'. 웃기게도 난 내가 피아노를 잘 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못 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 난 피아노를 잘 치고 싶지 않았던 듯하다. 아빠의 열정으로 어릴 때부터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는데도, 난 늘 큰 노력을 하지 않아 그대로였다. 현상유지는 되었는데 그렇다고 엄청나게 특출 나지도 않은 그저 그런 상태. 그냥 못하지는 않는다는 것에 위안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서울대에 덜컥 붙어 버렸다. 당사자인 나도 많이 놀랐다. 어이없게도 내 타겟 대학은 서울대 작곡과가 아니었는데, 난데없이 합격 문자를 받았다. 내 주변 모두가 나의 뜬금포 합격 소식에 놀랐다. 엄마아빠는 서울대 실기 시험 날, 면접 날, 논술 날, 전부 날 대전역까지만 데려다주고 첫 기차 타고 알아서 서울대로 가게 했다.
강렬한 기억 하나가 있는데, 면접 보고 돌아온 대전역에서 아빠가 내 면접 복장을 보고 화를 냈다. 교복 금지 면접이라 하더라도 구두는 신길 바랬었나, 면접 보고 왔다는 내가 청바지에 컨버스 신고 나타나니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맞다. 한 껏 차려입고 예쁘게 꾸민 수험생들 사이에서 난 그냥 털레털레 집에서 나온 고3 여자 아이 모습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내 합격 소식은 정말 난데없는 이벤트였다.
그렇게 입학하고 나서부터, 아니 합격문자를 받은 그날부터 나는 줄곧 '내가 여기 어떻게 붙었지?'라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다. 친구들, 선배들은 너무나도 대단했다. 피아노는 다들 정말 잘 치고, 시창청음은 말할 것도 없었으며, 웬만한 교향곡 정도는 몇 마디만 들어도 무슨 곡인지 딱 알아맞힐 정도로 음악적 지식도 많았다. 8명 중에 한 명인 난 모든 게 부족한 사람이었다. 내가 여기에 있어도 되는 건지 매일 나를 의심했고, 너무나도 멋진 친구들 사이에서 주눅 들어 있었다.
그리고 문제의 화성학 수업. 그 수업은 한 명씩 나와 풀어온 문제를 피아노로 연주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피아노를 못 친다는 걸 자각했다. 잘하진 못해도 못하진 않는다 생각하며 살았는데, 결국 밑바닥이 드러난 거였다. 피아노뿐만은 아니었겠지. 1학년 1학기 성적표를 받아 대전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그리고 대전 집 내 방에서 난 엉엉 울고 말았다. 이십 평생 처음 느끼는 좌절이라는 감정이었다.
그날 이후, 난 음악에 정이 떨어졌고 피아노에서 아예 손을 뗐다. 그리고 내가 진짜 좋아하고 잘하는 걸 찾겠다며 다른 과 수업들에 기웃거렸고, 결과적으로 내가 진짜 좋아하고 잘하고 싶은 분야를 찾게 되었다. 결국 공부도 더 하고 일도 하게 되면서 음악은 그저 먼 과거의 일로 잊혔다.
중간중간 피아노가 치고 싶어 졌을 때도 분명 있었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남들 앞에서 피아노 치는 건 극도로 싫었으며 그마저도 연습실에 가서 혼자 두드리는 것 정도였다. 날 17년 만난 내 남편조차 내가 정식으로 피아노 치는 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얼마 전, 읽던 책의 이 문단이 마음에 닿았다.
내가 못하는 것들의 리스트를 적어 보라. 뭘 못하는지 알아야 극복할 수도 있다.
(중략)
리스트를 작성하면 '이 중에서 이건 정말 잘하고 싶다'라는 욕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 자유의 영토를 어느 쪽으로 넓힐지 방향을 가늠해 보는 것이 리스트 작성의 목적이다. 당신 앞에 놓인 수많은 벽 중에서 어떤 벽을 가장 먼저 뛰어넘을지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거인의 노트, 김익한, p.91
읽자마자 피아노가 생각났다.
아빠에게 너무 혼나듯 배워서 이제 피아노 못 치겠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아빠는 핑계였다. 그냥 내가 잘하고 싶었는데 잘하지 못하니까 치워버린 전형적인 회피형 행동이었다.
죽을 때까지 피아노는 쳐다보고 싶지도 않다 말하고, 아들이 음악에 관심도 못 두게 그 흔한 피아노 장난감이나 음악 관련 책은 전혀 사지 않았다. 그래도 나랑 오랜 시간 함께 한 그랜드피아노였는데 엄마한테 그냥 버려버리라고 막말을 했고, 내가 이렇게 피아노를 안치는 건 다 아빠 때문이라고 남 탓까지 시전 했다.
내가 가장 인정해야 할 건, 피아노였다.
나는 아마도 피아노를 잘 치고 싶었던 것 같다. 못 하는 내가 너무 미워서 그냥 안 하는 걸로 결정하고 모른척 살았던 거였다.
얼마 전, 남편에게 피아노를 사겠다고 선포하고 주문했다. 예전처럼 손가락이 돌아가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요즘의 나는 훨씬 성숙해졌으니 내가 어떻게 피아노를 칠지 기대가 된다.
역시 인정하는 게 제일 어렵다더니, 그 시절 내가 피아노를 못 쳐서 회피했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하다. 이제 입시곡을 죽어라 연습할 일도 없고, 왜 듣고 한 번에 못 치냐고 종용하는 아빠도 없고, 서울대 작곡과인데 이것밖에 못 치냐고 손가락질할 그 어떤 누구도 없으니,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걸 다시 찾아보고 싶다.
마음이 더 열려서 인스타든 유튜브든 어디든 편안하게 내 피아노 연주를 올릴 그날이 올지도 모른다!
몸과 마음이 편안하니 이제야 받아들여지네.
못난 과거의 나, 이제 정말 안녕 :)
오랜만에 피아노,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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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