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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 Nov 22. 2023

알콜 취향이 달라도 함께 놉니다

말술 먹는 남편이랑 노는 법

 

 ‘세계맥주 4캔 1만원’ 글귀를 볼 때마다 막 아쉽다. 이 나이 되도록 알콜 맛을 도무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멋도 모르고 맥주와 소주를 마셔보았는데 어른들은 대체 왜 돈을 주고 술을 마시는지 알 수 없었다. 아직 어른이 아니어서 술맛을 아직 못 느끼는 줄 알았다. 그 후로도 술을 마실 기회는 무지막지하게 많았지만, 결코 친해질 수 없었다. 어쩌다 생기는 술자리에서는 의무적으로 술을 마셨다. 선배가 따라줘서 강압적으로 마셨고, 게임에 져서 억지로 마셔야 했다. 술을 마신다는 것 자체가 즐겁지 않았다. 그렇게 술을 마신 날은 뜨악할 정도로 나의 온몸이 벌게졌다. 술이 잘 받는 체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맥주 한 잔을 벌컥벌컥 마신 후, 캬! 를 외치는 사람들은 꽤 멋져 보였다. 나도 따라 그들처럼 마셔보긴 했지만, 매번 ‘참 맛이 없구나.’를 확인하는 일이 될 뿐이었다. 이런 내가, 말술을 먹는 남자랑 결혼을 했다.      



 남편이 사석에서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가 “술 못 마시는 여자랑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었냐”인 것 같다. 그는 어느 조직에서든 가장 술을 잘 마시는 사람에 속했다. 술자리 마지막까지 정신을 잃지 않는 사람, 1차, 2차로 술을 말아먹고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만 원어치를 먹고 오는 사람. 어묵이 아닌 날에는 햄버거를 입에 물고 집으로 오는 사람. 다음 날 숙취로 너무 괴로워하며 “다시는 술 안 마셔야겠다”라고 말하지만 일주일 뒤 마치 데자뷔처럼 그 모든 것을 되풀이하는 사람. 그렇게 술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응당 술을 좋아하는 여성과 결혼할 법도 한데, 술이라고는 입에도 안 대는 나와 결혼한 것이 다들 신기한가 보다.     

      

 결혼할 때 만해도 일명 콩깍지가 씌어서 그랬는지, 남편이 술꾼이라는 점을 크게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술은 곧 ‘에라이, 그놈의 술’이 되었다. 부부싸움의 주범이 된 건 물론. 집에서처럼 적당한 음주면 좋으련만 밖에서 거나하게 한 잔 걸치고 오면 왜 그렇게 다른 사람이 되어 오는 건지, 오늘 약속이 생겼다는 연락만 받으면 곧 머리가 지끈거렸다. 술 약속 자체를 터치하지 않았지만, 아주 가끔 네 발로 기어들어 오거나, 사람을 붙잡고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반복하는 날에는 짜증이 솟구쳤다.     

 



  ‘술’은 남편과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인 알려주는 도구쯤 되는 것 같다. 술을 마시지 않고는 못 베기는 남자와, 술 냄새만 맡아도 머리가 어질어질한 여자. 술상을 펼치기 위해 쟁반을 꺼내고 술과 안주를 담아 TV 앞에 앉는 그에게 묻는다. “술 무슨 맛이야?” “그렇게 맛있어?” “이거 왜 마시는 거야?” 이미 여러 번 던진 질문이지만 소주잔을 맛깔나게 들이켜는 모습이 하도 신기해서 또 묻는다. 그도 매번 성실히 답해준다. “맛없어. 그냥 알딸딸해지는 기분이 좋은 거야. 하루의 피로가 다 풀리거든.” 와, 진짜 나랑 달라도 너무 다르다. 왜냐면 나는 그 알딸딸해지는 그 순간이 싫기 때문이다. 제정신을 잃어서 무얼 하나. 눈빛이 흐리멍텅해지는 내 모습을 보는 게 뭐가 즐거운가. 피로는 잠으로 풀어내면 되지 굳이 술에 의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불현듯 놀랍다. 이렇게 다른 두 사람도 사랑에 빠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잘 나갈 때는(?) 술을 한 짝으로 가져다 두고 마셨다는 남자와 산 지 어언 9년. 나는 이제 제법 괜찮은 술친구가 된 것도 같다. 육회를 먹기 전엔 소주를, 치킨을 시킬 땐 맥주가 땡기지 않냐고 먼저 묻는 아내라면 술 한 잔 같이 못 먹어 주어도 멋진 반려인 아닐까? 부디 그렇게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실은, 나도 가끔 홀짝이는 술이 있긴 하다. 바로 주로 여성들이 즐긴다는 달달한 와인인 ‘모스키토’. 술이라기엔 너무 음료수 같긴 하지만 그래도 남편은 술잔을 함께 비워주는 게 좋은지, 내 몫의 와인이 줄어들 때마다 새로운 모스키토를 사는 걸 잊지 않는다. 어울리는 안주로 치즈나 비스킷 같은 것도 함께.




 저번 주의 일이다. 피자엔 소주지! 를 외치며 술 타임을 시작한 그 옆에서 나는 글을 쓰던 중이었다. 점점 얼굴이 벌게지고 혀가 꼬일 듯 말듯한 남편이 사진 한 장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다. “이 사진 기억나?” 제주도 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이다. “당연히 기억나지” 별안간 사진첩을 하나둘 열어보기 시작한다. 결혼하던 날, 신혼여행, 태교여행, 출산 직전 브이를 하고 있는 내 모습과, 두 아이가 태어난 직후의 감격스러운 순간까지, 놀랍게도 그 모든 것이 있었다. 청춘이었던 우리가 부모가 되고 체중이 붇고 새치가 나고 주름살이 늘어서 지금의 우리가 된 모습까지 마치 파노라마처럼 그곳에 담겼다. 술기운에 추억 여행을 하며 별안간 감성에 빠진 남편과, 술 한 방울 없이도 쉽사리 감성에 젖은 나. 남편은 말이 없어지고 나는 금세 눈물이 차오르고 만다. 이제야 남편이 술을 마시면 좋은 점을 하나 알아냈다. 감성 수치가 비슷해져서 말도 많아지고 더 많이 표현하고 더 웃고 때론 같이 울 수도 있다는 거. 마치 말이 잘 통하는 여자친구랑 노는 기분이 들었달까.    

  

 그와 더 오래 같이 살다 보면 나도 소주를 맛깔나게 마시고 캬~ 거리며 맥주 한 캔을 따마시고, 비만 오면 막걸리에 파전이 절로 생각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내가 술 마실 줄 아는 사람이 된다면 남편과 더 단짝이 될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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