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여행을 해보는 게 로망이었다. 늘 뭔가 억압되고 눌린 기분이었으니 더 갈망했다. 어른이 되어 마음대로 갈 수 있는 날을 그렸다. 그런데 독립을 하고도 쉽사리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런저런 걱정들로 망설여졌다.
그러다 어느 날, 일요일 아침 자취방에서 눈을 떴는데 훌쩍 어디든 가고 싶었다. 정말 간절히. 어딜 갈까 하다가 정하지 않고 그냥 강남고속터미널로 향했다. 그게 벌써 20년이 다 됐다. 매표소 앞에 서서 버스 시간표를 보고 가장 빨리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아무 데나 가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된 게 10분 뒤 출발하는 속초행 버스. 내가 좋아하는 바다를 보겠구나~ 설레기 시작했다.
버스를 타고 달려 가다보니 양양 터미널에서도 멈춘다. 갑자기 거기에서 내리고 싶어 작고 조용한 양양 터미널에 내렸다. 벌써부터 해방된 기분이다.
일단 바닷가로 갔다. 언제 봐도, 얼마 동안을 봐도 좋은 바다. 몇 시간이고 바다만 보고 싶었었는데 배가 고파왔다. 해변을 따라 늘어선 식당들 앞을 지나니, 여기저기서 호객을 한다. 그런데 혼자라고 하니 다들 시큰둥. 그중 한 군데서 환영을 해준다. 회덮밥을 시켜서 정말 맛있게,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내 속도대로 음미하며 먹었다. 혼자인 것 참 좋다.
다시 바다를 보며 어디로 가볼까 하다가 언덕 위에 있는 낙산사로 발길을 옮겼다. 걸어서도 갈 수 있으니까. 낙산사로 오르는 길도 처음이 아닌데 느낌이 다르다. 공기도 다르게 느껴진다. 파도 소리, 나뭇가지 하나하나 즐기며 언덕을 올랐다. 여기저기 둘러보다 의상대에서 한참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내려오는 길에 법회를 하고 있길래 제일 뒷자리에 앉았다. 목탁 소리가 좋았다. 법회가 끝나고 불상을 보며 앉아있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말을 걸어오셨다. 혼자 온 거냐, 어디서 왔냐, 몇 살이냐……. 처음으로 혼자서 왔다 하니 반색하시며 아주머니도 처녀 적에 혼자서 여행을 많이 다니셨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도 여기저기 많이 다녀보라고. 그럴 수 있어서 부럽다고. 식사했냐고 물으시더니, 저녁에는 절에서 밥을 먹고 하룻밤 자고 가도 된다고 하신다. 절에서 하룻밤이라……. 뭔가 멋진 것 같았다. 아주머니와 저녁도 함께 먹으며 다음 일정을 고민했다. 정말 여기서 하루 묵어볼까? 그런데 그만큼의 용기는 없었던 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터미널로 가니, 서울로 가는 마지막 버스만 남아 있었다. 표를 끊고, 작은 시골 느낌이 나는 터미널이 마음에 들어 그저 앉아 버스 시간까지 구경하며, 생각하며 기다렸다. 버스 시간이 거의 다 돼서 터미널로 들어온 젊은 커플. 서울로 가냐고 묻고는 원하는 답을 얻자 마주 보며 좋아한다. 그러더니 버스를 타고 나서 버스표를 줄 수 있겠냐고, 친구들과 여행 간다고 하고 둘이서 왔는데 여자의 부모님이 증거로 버스표를 가져오라고 하셨단다. 얼마나 급했으면 사람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이곳으로 왔을까. 공감도 가고 재미도 있고……. 버스표를 기사님께 보이고 그 커플에게 주었다. 내 첫 홀로 여행이라 나도 기념으로 가지려고 했던 건데……. 아직 그 둘은 커플일까? 그랬으면 좋겠다.
혼자서 아무 데나 시간표만 보고 행선지를 정하고, 식사도 내 맘대로, 일정도 내 맘대로, 시간도 내 맘대로. 주변 신경 안 쓰고 내 뜻대로 결정을 내려본 적이 없던 것 같은데 마침내 이뤄냈다. 모든 걸 내 뜻대로……. 좋아하는 바다 실컷 보고 생각도 많이 하고, 안 좋은 생각들은 덜어내고, 야근에 치였던 지쳤던 마음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며 힐링이 되는 기분이다. 고로, 홀로 여행 참 좋은 것 같다. 언젠가 용기를 내서 또 떠나봐야겠다. 이번엔 청량리역에서 제일 빠른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