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과는 어떻게 받아야 사과 같을까

AI 같은 사과 말고

by 달콤쌉쌀

내가 남편의 성매매로 속상한 얘기를 한두 마디 하게 되면, 남편은 마치 벽인 듯 가만히 있거나 스펀지인 듯 그 말을 그냥 빨아들이고 만다.

내가 사실을 알게된 지 정말 며칠 안 됐을 때, 남편이 있는 대로 기가 죽어 처져서는 입 꾹 닫고 계속 어두운 표정이길래 속이 터져서, 이런 나도 이렇게 웃으려고 하는데 제발 그러고 있지 말라고, 티 내지 말라고 말을 했었다. 남편은 용케도 그 말대로 잘해주었다. 문제는 내 마음과 달리 이제 그걸 너무 잘한다는 거다.

정말 며칠 참다 한 번, "남편은 정말 나빠." 하고 톡을 보내도 답이 없다 다른 얘기, 또 며칠 지나 못 참겠을 때 "남편은 날 사랑하지 않는 거야. 미안해할 줄도 몰라." 해도 묵묵부답.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지?" 하면 "미안해."

그러다가 가끔 한 마디 한다. "미안한 거 아니까 이제 그 얘기 그만하면 안 돼요?" 당연히 안되지. 지금도 3일에 한 번, 5일에 한 번, 아니면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저런 식으로 한두 마디 툭. 내가 200번 괴로우면 한 마디 튀어나오는 건데…….

미안하다고 천만 번쯤 나에게 사과했으면 좋겠다. 얘기 그만했으면 하는 식으로 "미안해?" 물으면 "미안해." 대답하는 AI 같은 미안함 말고. 정말 미안한가 보다 내가 느낄 수 있는 그런 사과.

그건 어떻게 하는 거고 어떻게 받는 걸까? 미안한 마음이 들 때마다 미안하다고 말하라고까지 했는데도 듣기 힘든 말이다. 옆구리 몇 번 찔러서 들어도 마음으로 느껴지지가 않는다.

<버진리버>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다. 거기에 나오는 노부부는 한 동네에서 정말 친한 절친처럼 지내는데, 몇 회를 보다 그 둘이 부부였음을 알았다. 젊은 시절, 할아버지가 실수로 할머니의 친한 친구와 하룻밤을 보냈다. 접시 하나 떨어뜨려 깨뜨리는 것도 아니고, 그런 행동에 어떻게 실수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게 된 건지 이해도 되지 않지만 아무튼 하룻밤의 실수였다. 그렇게 자유분방한 미국 할머니도 20년 전 할아버지의 단 한 번 실수에 상처받고, 더 이상 결혼 생활을 이어가기 힘들어 별거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할아버지는 수도 없이 사과를 했다, 나름대로는. 내가 겪어보니 그건 그냥 '그 사람 나름대로' 많은 사과인 거다.

할머니는 20년이나 지 일인 데다 여전히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음에도 마음에 들어오는 사과를 받아본 적도 없고 여전히 너무 아프고 괴롭다. 할아버지는 답답하다. 뭘 더 어떻게 사과해야 마음이 풀리는 건지……. 어느 날 할머니가 그동안 서랍 속에만 간직했던 이혼 서류를 내민다. 이제 벗어나고 싶다고.

동네 다른 예쁜 할머니와 친해진 할아버지는 (예쁜 할머니는 이성적인 감정으로 시작했지만) 그 할머니의 조언을 듣는다.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진심으로.

그동안의 사과와 뭐가 그렇게 달랐는지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할아버지는 다시 진심으로 사과한다. 그리고 할머니가 건넸던 이혼서류에 서명하는 대신, 반지로 프러포즈를 한다. 할머니는 사과와 프러포즈를 받고 행복해한다.

나도 어느 날 갑자기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 뒤늦게라도 남편이, 그동안 사과했던 그 마음보다 훨씬 더 큰 깨달음이 필요했던 거라는 걸 알게 될까? 내 마음이 누그러질 사과라는 게 있긴 할까? 사과라는 것. 참 다르다.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의미가.

keyword
작가의 이전글웅변 : 조리가 있고 막힘이 없이 당당하게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