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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쥐아저씨 Nov 03. 2017

아비뇽 달빛이 만든 그리움

순간의 다이어리 #5. 나는 참 바보였다.


BGM ♪.  브라운아이드소울  -  '아름다운 날들'



회사를 그만두고 '내 사업' 이라는 가장 밑바닥 생활을 시작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다른 일인 것 같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라는 달콤한 마음이, 언제 들어도 20대의 설렘을 가져다 주는 이 마음이 가을의 색깔과 텅 빈 여운과 어우러져 그리움을 만든다. 하지만, 마음도 현실이 되야 한다고 믿고, 마음 바깥의 영역들을 타인에게 충족해 줄 수 없는 서른 여섯의 가을은, 그리움과 바보같음을 글로만 남기는 것이 전부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대전' 쯤에 위치한 성곽도시, 프로방스의 시작점 '아비뇽'


2015년 7월. 두 번째 프랑스 여행을 통해 연극축제와 성곽, 세계사 시간에나 등장할 법한 '아비뇽 유수' 의 무대인 대성당이 있는 중소도시 '아비뇽' 을 들릴 일이 있었다. 10일 막무가내 일정의 딱 중간 쯤이었다.

도시 이야기는 '터벅터벅 프랑스' 카테고리 에서 다시 한 번 쓸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연극축제의 막바지에 이 곳에 도착한 나는, 유일한 한인 민박인 '이유민박' 에 밤 11시에 도착하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나때문에 잠 못 이루고 카톡을 받으셨을 주인 형님께 지금도 죄송하다. 하하.

더 만행이었던 것은, 알고 보니 이곳은 여성 전용 민박이었고 덕분에 나는 주인 형님이 주무시던 침대와 공간에서 3일을 지내게 되었다. 그랬다. 혼자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니던 일정에 '사람들' 이 생겼고, '나만 남자인' 일정이 되어버렸다.


주인 형님의 친절한 가이드 덕분에, 베르동 계곡과 생레미 프로방스를 열심히 돌아보고 온 둘째 날이었다.

내 또래와 누님들로 구성되어 있던 동행인들과 여정을 통해 여전한 민망함을 안고 조금 친해지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그날 밤, 피곤했지만 나는 또 혼자 아비뇽 골목들을 보겠다며 밤 10시에 길을 나섰고, 11시가 좀 넘을 무렵 대성당 앞에서 다시 일행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비뇽 구시가는 정말 작으면서 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걷던 시간은 어느 새 자정을 가르키고 있었고, 나는 무슨 호기에서인지 이 분들의 네비게이션을 자처하며 지름길인 것 같은 곳으로 인도했다. 결과는 숙소의 정반대로 나왔다.

4명이었던 일행은 그냥 숙소까지 다시 걸었다. 그리고 그 일행 중에는 짖궅은 농담들에도 빙긋 웃는 것이 전부였고, 밤길을 걸으며 예쁘다는 말을 많이 했던, 길 잃은 네비게이터가 민망하지 않도록 나는 어떤 사람인지,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를 묻고 말해주던 분이 있었다. 동행인들이 힘들어 할 무렵에는 이따금 유머스러운 이야기를 하며 분위기를 바꿔주기도 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이지만 활기가 가득 들어 있었다.


낮 아니다. 오후 아니다. 이거 분명히 밤이다.


가끔 이야기를 나누다가 동행인들이 '철없는 것 같기도, 철이 든거 같기도' 하다며 정체성을 혼란해 했던 그였다. 짧은 시간에, 그것도 생판 모르는 여행길에서 만난 인연들이 서로를 얼마나 알수 있겠냐만서도 가만 지켜보았을 때 '선하다' 라는 에너지가 주체못하고 나오던 사람이었다. 밤 길 아비뇽 성곽을 들락날락하며 걷던 그 순간이었다. 잠시 쉬어가려고 멈춰 선 어딘가쯤이었고 깨끗한 밤하늘에는 달이 밝게 비추고 있었다.


"헐, 저 말괄량이 뭐하는거지?"


일행 중 누님 한 분이 뒤를 휙 보며 웃었다. 곧 다 같이 웃었지만 나는 멍해졌다.

편한 차림의 그는 성벽 근처에 놓인 나무를 외나무다리 타듯 놀다가, 달빛을 가만 보더니 휘리릭 짧은 춤을 추었다. 고요해 진 아비뇽 밤거리에 하얀 원 하나가 별똥별 자욱처럼 휙 하고 지나갔다.

다들 웃는 와중에, 나는 웃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나눈 이야기도 많지 않았고, 좋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만 했을 뿐 별로 눈길도 주지 않았음에도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런 사람에게 눈길을 못 준?), 심장이 막 뛰었다.

거만하지 않고, 착하고, 엉뚱하고, 그럼에도 차분했던 사람이, 내 스스로 영문을 파악할 새도 주지 않고 사람으로서 마음에 치고 들어왔다.


아비뇽 유일 한인민박. 이유민박 앞. (홍보글 아님!)


그 이후로는 취한 듯 숙소에 도착했던 것 같다. 새벽 1시 쯤 되었던 것 같다.

거리를 함께 걸으며 여행에서 좋은 동생 생겨 재밌다며 살뜰하게 아껴 준 누님 한 분에게 카톡이 왔다.

안잘거 아니까 밖에서 이야기나 좀 하자고. 누님은 우리 여정의 분위기메이커였지만 사는 게 힘들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었고, 나보고도 자기 만만치 않게 힘들게 사는 것 같다고 했던 분이었다.

힘든 사람끼리 맥주 한 캔 하며 직장 이야기나 하자는 게 누님의 취지였다.


민박집 계단에 앉아서 누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좋은 조언도 듣던 찰나였다. 질문이 찾아왔다.


"너, 000 마음에 들지?"

"네?"

"누나가 괜히 누나가 아냐. 한마디도 안했는데 다 보여. 아까 밤에 다 봤어."


여행은 참 나쁜(?)게, 이럴 때 이런 대화를 하면 페이크고 뭐고가 없게 된다. 그리고 이미 문답에서 난 졌다.

그냥 '그 사람하고 이야기를 많이 나눈 것도 아니고 시간을 보낸 것도 아닌데 왜 이런지 모르겠다' 와 같은 고해성사가 잠시 이뤄졌다. 그렇다고 딱히 누님이 '어찌어찌해서 그런거다' 라고 말해 준 것도 아니었다.

'좋을 때다' 라는 말과, '잘 어울려 보였어' 라는 말, '나중에 다들 흩어지거던 단톡방에서 000 찾아서 꼭 연락해라' 라는 말이 전부였다. 누님에게 '고맙다' 라는 말도 제대로 전하지 못한게 아쉬웠다.




그리고 나는 니스에서 못다한 먹방을 찍었다고 한다.


그 다음날 일정부터는 제각각이었다. 단톡방에서 어디 갔다, 어디 좋더라 이야기들은 했지만 같이 움직인 적은 없었다. 심지어 아비뇽에서 니스로 이동하는 날에는 아무도 못 만나고, 인사도 못했다.

다만, 아비뇽을 떠날 때 단톡방에서 그의 카톡을 신주단지 모시듯 따로 저장해서 중요표시 해 놓은 게 전부였다.

아비뇽에서 니스로 향하는 떼제베에서 곤히 잠들었을 때, 그가 추었던 작고 고운 한 밤의 춤사위가 또 생생하게 나와서 탄성을 지르며 깰 뻔 했던 기억이 난다. 영화같은 꿈을 꾸고 일어난 곳은 묘하게도 '칸' 이었다.


니스 2일차쯤 해서는, 우연히도 아비뇽에서 동행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 함께 에즈와 모나코를 돌아보기도 했다. 한 분의 숙소에서 밤에 술을 먹기로 했었는데, 다들 일찍 피곤해져서 그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낮선 나라의 새벽, 테라스에 앉아 술과 안주 먹방을 찍다보면 어느 새 나는 그의 이야기를 꺼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일정을 마치고 니스 공항에서 출국하기 직전에 마음에 절실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허세가 찾아왔다.

아껴두었던 그의 카톡에 '나 이제 귀국하는데, 언제 귀국해요?' 라는 물음과 함께, '나 사실 00씨랑 한국에 가서도 또 만나고 싶어요. 00씨 생각이 많이 나요. 귀국하면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라는 이야기를 보내놓고, 혼자 전전긍긍을 시작했다. 허세도 아니었다. 비행기 타기 직전 카톡이 울렸다.


'만나면 되죠. 귀국하고 정리좀 할 게 있는데 연락해요.'


심플한 대답이었다. 혼자 소설을 쓰고 있던 나의 인천행 비행기는 왜그렇게 더뎠는지 모르겠다.




그 분이 보내준, 내가 미처 가보지 못한 아비뇽의 또 다른 곳.


며칠 뒤, 그에게 줄 터키 간식 '로쿰' 을 손에 들고 대학로 마로니에 거리에 서 있는 나였다.

영원할 것 같은 찰나의 끝에서 만난 그는 여전한 밝음과 온화함으로 인사해 주며 햇살처럼 나타났다.

첫 만남은 여행의 기억을 나누는 것이 전부였고, 그 만남은 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인연으로 만들어 갔다.

소소한 연락들 속에, 그가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가 아이들을 늘상 대하는 일을 했다는 것에서 아비뇽 밤거리에서 보여준 엉뚱함에 대해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평범한 매일이, 매 순간 평범하지 않게 흘렀다. 여기서부터 나는 실수를 하기 시작했다.


'남자다운' 게 뭔지도 몰랐고, 이제와서 돌아보면 그럴 필요도 없었던 일이지만, 사소한 이야기 중간중간에 내가 그에게 느낀 감정들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거나, 은연중에 이를 받아주기를 강요했던 모습도 있었다.

다만, 아직까지 그는 이 모든 행동을 가르치는 아이를 대하듯 온화하게 받아주었지만 불편해 하는 내색도 충분히 했던 것 같다. 설익은 사람이 그것을 느끼지 못했을 뿐.


두 번째 만남에서 '뷰티 인사이드' 라는 영화를 보게 된 것 또한, 내 스스로 '내면이 더 착실한 사람이 되자',

'그를 조급하게 하지 말자' 라는 반성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물론, 마음과 머리는 늘 다른 길을 걸었다.

그날 저녁, 재즈바에서 음악을 듣고 술 한잔 하면서 문득 그가 물어왔다.


"나한테 왜 호감을 느꼈어?"


인생에서 들을 수 있는 질문 중 가장 어려운 질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겠지만, 그 날 내 입에서는 이런 말이 아무렇지 않게 나왔다.


"길 잃고 걸어다녔던 그 날, 네가 너무나 착했고 선했고 완벽했어. 몰랐던 사람이기에 더 알고 싶었어.

  그리고, 그 날 밤 달빛에 비춰서 춤추던 네 모습이 세상 어떤 명화보다 아름다웠어. 홀렸어."


내 인생에서 이 질문에, 이런 말을 가감없이 말할 수 있을 날이 과연 또 오기는 할 것인가.




막차가 하루의 끝을 알릴 즈음이었다. 저 대답에 피식 웃고서는 여전히 음악을 듣고 있던 그의 귀가가 걱정되었다. 지금 출발해도 우리 모두 새벽 1시는 넘어서 귀가할 예정이었다.


"이제 곧 막차시간 될 것 같아. 다음에 또 얼굴보자."

"오빠는 나하고 오래 같이 있고 싶지 않은가보네?"


라며 남은 맥주를 홀짝 마시더니 이내 곧 일어서서 날 바라보며 빙긋 웃더만 톡 쏘아붙인다.


"됐거든? 얼른 가자. 진짜 이러다가 막차 놓친다."


이 밀고 당김에 여지없이 정신을 잃었던 그 때의 어여쁨과 감정상태는 지금 쓰려고 해도 못 쓸 것 같다.

다만, 이게 그와의 짧았던 행복의 마지막 조각이 되었다.

다만, 집이 참 멀었던 그를 데려다 줄 만한 차가 없는 내 자신이 한동안 엄청 초라했었다는 것도 기억난다.




"멍청한 이기심"


이라는 말로 나를 돌아보며, 그 순간을 행복했고 미안한 순간으로 남긴다.

두 번째 만남 이후 조금씩 더 알게 된 그는, 여행을 떠나오기 얼마 전 헤어짐이라는 아픈 과정을 거치며 아직 생채기를 미처 가라앉히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따금 내가 마음을 열었던 사람들은 우연처럼 아픈 기억을 간직한 채 나를 만나게 되었기에, 좀 더 성숙한 어른으로서 이를 조용히 다독여주면 좋았을 텐데.

그 당시의 나는 여전히 성숙하지 못했다. 사실 지금도 과연 그 때 보다 성숙한지는 잘 모르겠다.


아이들 방학 동안 고향으로 내려가 남은 휴가를 보내기로 한 그였기에 얼굴 보고 말할 시간이 없었던 만큼,

오히려 그 시간 동안 나를 홀린 소중한 인연을 조금씩 알아가고 이해하면 좋았을 텐데, 내가 선택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한 내 마음을 전했으니, 나를 만나주면 안되겠냐' 는 인연에의 강요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직설적이고 밀어붙이는 것이 마음을 얻는 방법중에 하나라고 하더만은,

나는 역시 '마음을 방법으로 얻는 것' 이야 말로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만을 인연의 상실을 통해 배웠다.

심지어, 달빛이 선물해준 인연은 이 '마음의 표현' 에 대해 '자꾸 그래서 힘들다' 는 말을 꺼냈을 정도였으니.

이 힘들다는 것을 왜 나는 '당신이 싫다' 로 받아들였을 까.

'내 마음과 당신 마음의 등가교환' 을 바랬던 이 멍청한 이기심은 지금도 너무나 나를 괴롭힌다. 못나서.


아비뇽 밤거리에서 고운 춤을 추었던 그가, 어디서든 행복하기를. 평안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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