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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츠파이 Sep 28. 2019

최동원은 후배들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스타란 무엇인가 자각하고 있었던 불운의 거인

사람들은 너무 뻔하고 계산적인 사람에겐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 100% 이기는 싸움에만 관심 있거나 100원짜리 이익에 혹해 자기 주머니로 냉큼 챙기는 사람은 자주 찾아볼 수 있다. 


반면 대의를 위해 싸우고 희생과 헌신을 통해 구성원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영웅의 이야기는 언제나 동경받지만, 우리 주위의 소시민적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선 찾기 힘든 스토리다. 그래서인지 희생과 헌신의 가치가 클수록 사람들이 느끼는 존경의 양은 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소시민이 영웅이 될 필요는 없지만, 누군가에게 '롤모델'이 되려는 사람들은 한 번쯤 자신이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순간이 찾아온다. 


요즘 야구 재밌게 보시나요? 

# 사례 1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극적인 금메달을 차지한 이후 KBO 리그는 폭발적인 인기에 주체하지 못할 정도였다. '베이징 금메달의 주역'들은 여러 이슈를 몰고 다니며 흥행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는데, 야구팬들은 리그 최고의 좌완으로 평가받던 류현진과 김광현이 맞붙으면 누가 이길지 온라인에서 뜨겁게 격돌하기도 했다. 


미디어도 두 선수의 맞대결 성사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생길 때마다 '이슈 몰이'를 하며 열기를 부채질했는데, 결론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두 선수가 정식 맞대결을 펼친 역사가 없다.

두 사람의 맞대결은 시범경기서나 볼 수 있었다

당시 SK 감독이었던 김성근 감독과 한화 감독이었던 한대화 감독이 언급한 이유와 명분은 설득력 있었다. 

"로테이션을 무시하고 무리할 수 없다"

"자존심 강한 선수들이라 패한 선수의 후유증이 클 것이다"

"팀 필승 카드인데 이런 경기가 소모할 수 없다" 


당장 현장에서 1승에 목메는 KBO 리그 감독들의 특성상 '라이벌 격돌' 같은 로망을 기대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선수 자신들도 라이벌 대결에 그리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지 않았다. 


# 사례 2

지난 8월 23일 KBO 리그는 '야구의 날'을 맞아 전국 야구장에서 팬 사인회 행사를 열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을 기념해 제정된 야구의 날은 야구팬들에게 11년 전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만남의 날이었다. 


하지만 이 날 팬 사인회에 참가한 선수들의 명단에 '베이징 금메달의 주역'인 이대호와 손아섭, 김현수, 이용규가 빠져있었다. 이용규는 시즌 초 트레이드 요청 때문에 파국을 만들고 자숙 중이었고 손아섭은 부상 때문에 1군 엔트리에서 빠졌다지만, 이대호와 김현수는 팀에서 문제없이 시즌을 소화하고 있었다. 두 선수가 행사에 빠진 이유 역시 명분에 합당한 수준이었다. 


"젊은 선수들이 팬들과 만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팬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젊은 유망주들이 팬들과 팬 사인회를 갖는 행사가 매우 드문 것은 아니다. 구단이 마케팅에 선수가 필요한 경우 대부분 젊은 선수들을 동원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대형 스타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드물다. 특히 베이징 올림픽 우승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 자리에 우승의 주역이 없다는 것은 마치 '홍철 없는 홍철 팀' 이란 웃픈 무한도전 에피소드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풍요 속에 위기' KBO 리그의 실상

2008년 이후 선풍적인 인기 속에 성장한 KBO 리그는 시스템을 착실하게 다지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다. 덕분에 선수단 운영과 유소년 야구 활성화, 지역 사회에 야구장을 건립해 풀뿌리 야구가 자리 잡게 하는 등 큰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한국 스포츠 시장의 크기가 미국이나 유럽 정도가 되는 것이 아닌 이상, 시스템과 효율성 만으로 지금 한국 야구가 안고 있는 고민들을 해결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다. 결국 팬들이 꾸준히 유입되고 자극받을 수 있는 스토리가 크던 작던 계속 만들어져야 하는 상황인데, 이는 그라운드 안에서 뛰는 선수들이 해줘야 하는 몫이다.


사례 1과 사례 2처럼 선수들이 "야구만 잘하면 된다"라는 인식에 빠진다면 위기는 가속화될 수 있다. 


'야구 만화 주인공' 같은 레전드 최동원

축구 선수가 꿈이었던 최동원의 아버지는 집안의 반대와 6.25 전쟁 때문에 꿈을 접어야 했지만, 아들 최동원의 가능성을 확인한 순간부터 헌신적으로 아들의 성장을 후원했다. 집 안에 자체 피칭 훈련 시설을 갖춰 줄 정도로 열성적인 지원이 있었고, 타고난 어깨를 갖고 있었던 최동원도 일본 프로야구의 호리우치 츠네오를 롤모델로 삼아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한다. 


당시 최동원이 살던 부산은 일본 위성방송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MLB 경기를 쉽게 볼 수 없었던 1970년대, 위성방송을 통해 접한 일본 프로야구 선수들을 롤모델로 삼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최동원 어머니가 직접 그린 훈련 시설

경남고 시절부터 '전국구 스타'로 떠오른 최동원은 고등학교 2학년 황금사자기 대회에 당대 최강팀이었던 경북고를 노히트노런으로 막아내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다음 상대인 선린상고도 8이닝을 노히트로 막아내며 17이닝 연속 노히트노런 대기록을 세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150km가 넘는 강속구를 던지며 이미 같은 나이 때에 최동원을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없었다. 당시 상대팀 선수였던 김성한 전 감독이 한양대에서 150km의 공을 뿌릴 수 있는 피칭머신을 빌려 밤새 연습했지만, 최동원의 공은 차원이 달랐다는 인터뷰를 남길 정도였다. 


고교 무대를 평정한 최동원은 대학 야구 무대를 독주하던 고려대를 막기 위해 권력 상층부의 강압에 의해 연세대로 진학하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지만 대학무대에서도 군계일학의 실력을 뽐냈고, 대학 2학년 시절부터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세계 대회에 출전하게 됐다. 

구타 사건의 희생자로 휘말리는 등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도 강력한 존재감을 보여줬다.

세계 대회에서도 최동원의 기량은 단연 눈에 띄었다. 


1978년 로마 세계 야구 선수권대회 열흘 동안 8경기 등판 38⅓이닝 투구를 시작으로 80년 도쿄 세계 야구 선수권, 81년 대륙간컵 국제 야구대회, 82년 서울 세계 야구 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연전 연투했다. 81년 대륙간컵에서 캐나다를 상대로 9회 2 아웃까지 퍼펙트 피칭을 펼친 것이 계기가 되어 MLB 토론토 블루제이스 스카우터의 주목을 받고 실제 계약제의 까지 받았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차범근의 독일 진출도 '국가 전력 유출'이라는 시선이 지배적이었던 시절이었고, 병역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해외 진출은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스포츠 유망주들의 병역을 면제해주는 파격 혜택의 주인공이 되긴 했지만, 4년 이상 국내 야구 리그에 몸 담아야 한다는 규정이 발목을 잡았다. 명문화된 규약은 없었지만 곧 탄생을 앞둔 프로야구의 흥행을 위해 스타 선수를 잡아놔야 한다는 명분으로, 없던 규정도 엉터리 해석으로 몽니를 부리며 최동원을 주저앉혔다. 


좌절할 법도 하지만 최동원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1981년 최동원은 실업야구 롯데에 입단한다. 당시 계약금으로 3천만을 받았는데, 이때 겪었던 억울한 사건으로 인해 최동원은 한차례 인생에서 각성을 하게 된다. 입단 협상 당시 롯데는 최동원에게 당시로는 파격적인 5천만 원을 지급하기로 협의했다. 막상 최동원이 입단하자 현금으로 2,100만 원-2,900만 원은 6개월짜리 어음으로 지급하는, 지금 기준으로 생각하면 어이없는 갑질을 당한다. 당연히 6개월 뒤 롯데는 나머지 금액 지불을 흐지부지 넘어가게 됐는데 이 일을 계기로 최동원은 "다시는 속지 않겠다"라고 다짐한다. 


마지막까지 불태웠던 외로운 영웅 

1981년 실업야구 롯데의 에이스로 활약한 최동원은 이 해에만 204이닝을 던진다. 지금처럼 160경기 넘게 펼치는 프로야구가 아닌 36경기를 특정한 기간에만 소화하는 실업야구에서 경기 전체를 책임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최동원이 17승을 책임진 롯데는 실업야구의 결승전인 코리안시리즈에 진출해 당시 최강팀인 경리단팀과 맞붙는다. 김시진과 장효조 등 리그 최강 스타들이 포진한 경리단 팀을 상대로 최동원은 1984년 한국시리즈의 프롤로그를 연출한다. 

81년 우승 뒤 헹가래를 받는 최동원

10월 25일 1차전 9이닝 3실점 완투패

10월 27일 2차전 7이닝 무실점 (2회부터 구원 등판) 

10월 28일 3차전 7이닝 3실점 (5회부터 구원 등판)

10월 29일 4차전 7⅓이닝 3실점(희대의 기록인 1경기 1승 1세이브 기록)

10월 30일 5차전 3이닝 무실점(7회 구원 등판 세이브)

10월 31일 6차전 9이닝 4실점 완투승


7일 동안 6경기에 모두 등판해 42.1이닝을 막는 괴물 같은 활약 덕분에 롯데는 실업야구 우승을 차지한다. 특히 4차전엔 7회까지 선발로 던지다가 8회 초 1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고, 8회 말 2사 만루 상황에 구원 등판해 경기를 마무리 짓는 원맨쇼를 펼쳤다. 


국제 대회에서도 최동원의 혹사는 이어졌다. 77년부터 82년까지 국제무대에서 통할 수 있는 유일한 투수란 평가 속에 미국, 쿠바 등 강팀과 맞대결에선 어김없이 최동원이 마운드에 올랐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했지만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 선수권 대회 우승을 위해 최동원은 김재박, 장효조 등 여러 스타급 선수들과 함께 한해 더 실업야구에서 경력을 이어가야 했다. 


국제대회와 실업야구에서 혹사를 당한 최동원은 1983년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지만 이미 구속은 150km를 상회하던 전성기 시절과 비교해 10km 이상 떨어진 후였다. 

박영길 감독과 입단식을 갖는 최동원

하지만 여전히 최동원은 당당했고 150km를 던지던 시절처럼 정면 승부를 즐겼다. 단순히 자존심 때문에 홈런 맞는 것을 각오하고 정면 승부를 펼친 것이 아니었다. 최동원에 열광하던 야구팬들의 바람과 팀을 이끄는 에이스라면 보여줘야 할 존재감을 최동원은 여전히 보여줄 수 있었고, 보여줘야만 했다. 


83년 입단 직전까지 계약금을 한 푼이라도 깎으려는 롯데 구단과 줄다리기를 하느라 시즌 준비가 늦어졌고 그동안 혹사당하느라 허리 부상이 생겨 전반기 내내 공을 던지지 못했다. 하지만 83년 시즌 종료 후 하루에 1,000개가 넘는 공을 던지며 몸 관리에 들어갔고 84년 최동원은 화려하게 부활한다. 


실업 롯데 입단 당시 뒤통수를 맞은 최동원은 프로 입단 땐 치열한 협상을 벌였다.


"알겠심더. 마.. 함 해 보입시더"

1984년 한국 프로야구 최강 팀은 삼성 라이온즈였다. 당시 리그는 전반기 / 후반기로 나누어 진행됐고 전반기 우승팀과 후반기 우승팀이 한국시리즈에서 맞붙는 시스템이었다. 전-후반기를 모두 우승하면 한국시리즈 없이 우승이 확정됐다. 


전반기 여유 있게 우승을 확정 지은 삼성은 후반기 종합 우승을 노렸지만 OB와 롯데의 상승세 막혀 후반기 우승은 여의치 않게 됐다. 종합 우승이 물 건너가게 되자 삼성은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최대한 '만만한' 상대를 고르고자 했고 최동원을 제외하고는 모든 전력에서 약세인 롯데를 간택한다. 


후반기 마지막 2경기를 남기고 롯데가 반경기 차이로 앞서있는 상황에서 롯데는 삼성과 2연전을 OB는 해태와 2연전을 갖게 된다. 고의 패배는 상상도 못 하던 상황에서 롯데와 삼성과의 경기는 공중파 TV 중계 일정까지 잡히며 팬들의 관심을 모았지만, 대놓고 실책과 주루사를 연발하며 자멸한 삼성의 추태 때문에 중계 아나운서가 공개적으로 사과를 해야 할 정도였다. 다음 날 신문엔 "야구냐 야바위냐"라며 실랄한 비판 기사가 한 면 전체를 덮었지만 한국시리즈 진출이란 성과 앞에 삼성은 모르쇠로 밀어붙인다.


삼성은 여러 가지로 얽혀있던 두산보단 롯데를 선택했다.


이렇게 간택된 롯데는 '최강팀' 삼성을 한국시리즈에서 상대하게 됐다. 


당시 롯데 감독인 김병철 감독은 삼성에 당한 수모를 갚고 어떻게든 승리를 따내기 위해 1-3-5-7차전에 최동원을 등판시키는 강수를 둔다. 삼성처럼 전력이 탄탄한 팀이 아닌 롯데는 다시 올 수 없는 기회를 꼭 잡아야 했다. 한국시리즈 직전 미팅에서 최동원에게 이 사실을 통보하자 최동원은 "너무 무리 아닙니까?" 라며 강병철 감독에게 항의했다고 한다. 그러자 강병철 감독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동원아, 우짜노 이까지 왔는데"라며 말했고, 잠시 생각한 최동원이 "알겠심더. 마.. 함 해 보입시더" 라며 이를 받아들인다. 


1차전과 3차전 선발 등판한 최동원이 완봉-완투승을 따내며 계획대로 시리즈가 진행되는 듯했지만 5차전부터 최동원의 힘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5차전 5회까지 무실점 호투를 펼치던 최동원은 6회 홍승규의 3루타와 장효조의 적시타로 인해 1점을 내줬고, 장효조의 도루와 실책이 겹치며 동점을 내준다. 믿을만한 중간계투가 있었다면 마운드를 넘겼겠지만, 롯데 마운드는 최동원 말고는 삼성에 대적할 수 있는 투수가 없었다. 힘이 떨어진 최동원을 9회까지 완투시켰지만 결국 경기 막판 실점을 내주고 역전패를 당한다. 


이 날 패배로 한국 시리즈 우승은 삼성이 가져가는 것이 확실시되는 듯했다. 


기적을 만든 가을비, 최동원이 완성하다

승기를 잡은 삼성은 6차전에 에이스 김시진을 등판시킨다. 하지만 이 결정은 결정적인 패인이 됐다. 

3차전 경기 도중 부상을 당한 김시진은 통증이 남아있는 상황에 진통제를 먹고 마운드에 올랐다. 실업야구 시절부터 최동원과 라이벌 구도를 만들었던 삼성의 에이스였지만, 한국시리즈에선 최동원의 투혼과 부상 때문에 완전히 가려졌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투혼(이라 부르고 무리)을 발휘했지만, 진통제로도 어쩔 수 없는 통증이 재발하며 롯데 타선에 빌미를 제공한다. 롯데는 4회 1사 조성옥의 볼넷으로 인한 출루 이후에 홍문종, 김용철, 김용희가 연속 안타를 터뜨리며 3점을 뽑아내는 기적을 만든다. 


6차전 선발로 등판한 임호균이 4회 피칭 도중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자 롯데는 다시 승부수를 던진다. 5차전을 완투한 최동원을 5회부터 구원투수로 등판한다. 삼성 타선은 5회 이후 단 3개의 안타만 만드는데 그치며 힘없이 물러났고 롯데는 8회 추가 득점을 올리며 6차전을 6-1로 잡아냈다. 


바로 다음날 한국시리즈 최종전인 7차전이 열릴 예정이었지만, 10월 8일 서울에 비가 내리는 바람에 하루 순연된다. 아무리 '철완' 최동원이라도 이틀 연속 등판은 무리였지만 가을비가 준 하루의 휴식이 전설을 만드는 복선이 됐다. 


7차전의 전개도 드라마틱했다. 


지칠 대로 지친 최동원이 2회 3점을 내주고 끌려갔지만 8회 이전 타석까지 20타수 2안타 부진을 겪고 있던 유두열이 역전 3점 홈런을 터트리며 삼성 마지막 보루였던 김일융을 무너트렸다. 유두열의 홈런 이후 페이스가 살아난 최동원은 마지막 두 이닝의 위기를 잘 막아내고 롯데의 우승을 확정 짓는다. 


9회 마지막 타자인 함학수를 삼진을 잡아내고 환하게 웃는 최동원의 모습은 지금도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장면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 모습은 1985년 KBO 연감 표지로 선정된다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게 무엇인가요? 
아이고.. 자고 싶어요.    -  7차전 끝난 후 리포터가 최동원에게 질문하자..


1984년 한국시리즈 7경기 중 5경기에 등판해 40이닝을 던졌고 4승 1패, 평균자책 1.80을 기록했다. 단순히 투혼이라 평가하는 수준을 넘어선 활약이었다. 팬들은 미친 활약을 펼친 최동원에게 '불세출의 스타'라고 칭송하며 1984년의 명승부를 추억하지만, 그 이후 최동원은 혹사의 여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당장 1984년 우승 축하행사에 참석한 최동원이 자리에 앉자마자 코피를 터트릴 정도였다. 


대학과 실업시절 혹사로 한번 망가졌던 어깨는 1984년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 혹사로 인해 점점 빛을 잃어간다. 1985~87년에도 200이닝을 넘기며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지만 구속은 140km 초중반으로 내려갔고 예전처럼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최동원은 1984년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은퇴 후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최동원은 1984년 한국시리즈에 대해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다. 


"무리는 역시 대가가 있게 마련이더라. 그러나 후회한 적은 없다. 다시 그날로 돌아가도 난 1차전부터 7차전까지 던질 거다. 왜냐? 그게 최동원이니까."




야구 선수가 아닌 스타 최동원이니까 해야 했던 일들


최동원은 앞서 언급했던, 실업야구 입단 계약금으로 어음을 받는 사건 이후로 그 어떤 선수들보다도 자신의 연봉을 책정하고 받아내는데 철저한 선수가 된다. 자신의 아버지를 지금의 에이전트 역할을 맡기며 선수는 협상 전반에 빠지는 대신 인정에 휘둘리지 않고 치열한 협상 전력을 펼칠 수 있었다. 덕분에 1986년 연봉 5천만 원을 넘었고 1980년대 후반부엔 1억 원에 가까운 연봉을 받는다. 당시 물가 기준으로 강남 아파트를 큰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수준의 연봉이었다. 


혹사 때문에 예전과 같은 기량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프로야구에서 최동원 급의 투수는 흔하지 않았다. 이런 삶에 만족했다면 3~4년은 더 억대 연봉의 스타플레이어로 대접받으며 선수 생활을 영위했을 것이다. 영화 '변호인'에서 변호사 노무현이 우연히 부림사건을 맡아 인권 변호사로 한 단계 성장한 것처럼 최동원도 우연히, 최동원 아니면 하지 못할 일들에 관심을 갖는다. 


1988년 8월 27일, 해태 타이거즈의 투수 김대현과 외야수 이순철은 전반기 휴식기를 마치고 팀 복귀를 위해 새벽부터 자가용을 이용해 이동 중이었다. 후배 김대현이 운전 중이었고, 이순철은 조수석에서 수면을 취하고 있었다. 김대현은 선배 이순철을 배려하기 위해 의자를 뒤로 젖혀줬고, 이 배려는 생사를 가르는 선택이 됐다. 


휴게소로 들어가는 도중 주차 중인 덤프트럭과 김대현이 몰던 차가 충돌한다. 이 사고로 김대현은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이순철은 뒤로 누워있던 덕분에 가벼운 찰과상만 입고 목숨을 구한다. 전반기에만 9승을 따내며 영건으로 주목받던 유망주의 죽음이었지만, 구단은 선수의 장례와 이후 처리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한 가정의 아들이자 기둥이 사라졌지만, 당시 사회 시스템에선 개인의 불행으로 치부하는 시선이 컸다. 


이 일을 계기로 최동원은 '선수협의회' 결성을 주도한다. 김대현의 교통사고 전에도 최동원은 선수들의 처우개선에 관심이 많았다. 


"2군 포수가 연습 도중 내 공을 받아준 적이 있었다. 수고했다며 고기를 사줬는데 '얼마 만에 먹는 고기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더라. 2군 선수 최저 연봉이 300만 원인데 장비 사고, 부모님 용돈 드리고, 동생들 학비 대주면 남는 게 없다고 하더라" 


"그런데 구단은 2군 선수들을 '낙오자' 취급하며 머슴처럼 부리더라. 내가 슈퍼스타 대접을 받고 팀이 돌아가는 것은 내 공을 받아준 포수 같은 2군 선수들이 뒤에서 고생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자신이 즐겼던 정면승부처럼 선수협 결성도 구단과 정면 승부를 벌였다

사실 최동원은 1988년 이전부터 선수협의 필요성에 대해 동료 선수들에게 알리고 있었고, 여러 변호사들을 만나 자문을 구하고 있었다. 문재인 당시 변호사와 선수협 자문을 구한 것이 최근 밝혀져 관심을 받기도 했다. 8월에 동료들 중 간부를 맡아줄 선수들을 구하고 체육부와 노동부의 자문까지 구하며 '선수협' 구성을 거의 끝마친 상황에 김대현의 교통사고가 심지가 되었다. 


9월 13일 대전 유성호텔에서 프로야구 선수 1백42명이 모인 가운데 기습적으로 창립총회가 치러졌다. 이날 총회에서 최동원이 초대회장, 이광은이 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최동원의 아버지 최윤식이 선수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선수들의 권익옹호와 연금제도는 표면상의 명목일 뿐 궁극적으로 노조를 결성하는 것이 목표"로 취임 각오를 밝힌 최동원은 각종 언론을 만나 자신의 뜻을 밝힌다. 올림픽을 앞두고 강력한 노동운동과 노조 설립의 발람이 불고 있던 사회의 분위기도 최동원의 편이 되어주는 듯했다. 하지만 구단의 반발은 집요했고 강력했다. 


구단들은 선수는 물론이고 선수의 가족들에게 연락해 "선수 생활이 끝날수 있다"며 선수협 탈퇴를 종용한다. 당시 프로야구 선수들이 자영업자 신분이라 곧바로 노동조합을 구성하기보단 선수 친목 단체로 출발해 점차 발전시켜가려고 했지만, 이 선택이 오히려 선수들의 계약을 보호하지 못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구단은 '선수협 회비를 낸 선수와 재계약하지 않겠다'라며 엄포를 놨고, 이런 협박 속에 선수들은 하나 둘 선수협을 떠나기 시작한다. 노동부도 이런 움직임을 알고 있었지만 개입할 법적 근거가 없었고 여론도 선수들의 편이 아니었다. 


결국 최동원과 마지막 선수협 대의원들도 KBO에게 '선수 연금 제도 실시'와 '최저 임금 인상'이란 몇 가지 작은 소득만 얻고 와해된다. 선수협을 만들고자 했던 최동원에겐 상상도 못 할 롯데 구단의 보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롯데는 최동원을 삼성으로 트레이드해버린다. 최동원은 "막강한 롯데 팬들의 응원이 있는데 설마 버리겠냐"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이미 미운털이 박힌 최동원을 처분하려는 롯데의 결심은 굳건했다. 롯데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최동원은 이 트레이드에 큰 충격을 받았고 삼성에 '뛰지 않겠다'라고 선언한 뒤 미국으로 건너간다. 


이후 6개월 만에 다시 삼성으로 돌아와 두 시즌을 뛰지만 야구에 대한 원동력과 동기부여를 잃은 최동원은 예전과 같은 공을 던지지 못하고 32살의 이른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이번이 팬들에게 인사할 마지막 기회가 될 것 같아"

은퇴 이후 의류 사업도 손을 데고, 1991년엔 민주자유당 김영상 총재의 권유를 뿌리치고 꼬마 민주당 소속으로 '야당의 무덤'이나 다름없는 부산 서구 시의원으로 지방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당시 야당 의원치곤 놀라운 37.8%의 지지율을 받았지만 결과는 '낙선'이었다. 


그 이후 야구 해설가나 방송 패널로 TV에 얼굴을 비추긴 했지만, 최동원이란 이름값에 맞는 야구계에서 입지를 잡지 못했다. 워낙 강성이란 이미지가 강해 구단들이 감독이나 코치로 두기 꺼려했기 때문이다.  2001년 한화 투수코치로 1년 활동 후 긴 시간 야인 생활을 했던 최동원은 2006년 김인식 감독의 부름을 받고 다시 한화 투수코치로 돌아온다. 류현진을 키워내는 등 나름 성과를 냈고 2군 감독으로 부임하며 조금씩 자리를 잡으려는 순간 '대장암'이 최동원에게 들이닥친다. 


1차 대장암이 발견된 것은 초기라 수술 이후 빠르게 회복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예상치 않게 암이 뼈로 전이되면서 그 이후 힘든 암투병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2차 암투병을 기점으로 최동원은 자신이 힘들게 투병 생활을 하고 있음을 팬들은 물론이고 주위 야구인들에게도 철저히 비밀로 부친다.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자존심도 있었지만 MBC ESPN에서 '날려라 홈런왕'이란 어린 야구 꿈나무들을 키우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다. 


이전까지 건강한 최동원의 모습만 기억하던 팬들은 2011년 7월 22일, 군상상고와 경남고 간의 레전드 이벤트 매치에 등장한 초췌한 최동원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는다. 


이미 대장암 말기 상황이라 일상생활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내도 최동원의 외출을 말렸지만 최동원은 아내에게 "이번이 팬들에게 유니폼을 입은 내 모습을 보여줄 마지막 기회일 것 같다" 라며 야구장으로 떠났다. 야구장으로 향하기 전 병원에 들러 '배에 찬 복수를 빼 달라'며 최대한 팬들에게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당시 행사를 진행하며 언론과 나눈 인터뷰에서도 "걱정하지 말라. 다이어트를 과하게 해 말랐을 뿐이다. 곧 야구장으로 돌아가겠다"라고 이야기했지만 2달 뒤 세상을 떠난다. 그의 나이 향년 53세였다. 공교롭게도 자신의 라이벌이자, 선수협부터 함께 했던 장효조 2군 감독이 세상을 떠난 지 1주일 만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아픈 몸을 이끌고 굳이 야구장으로 향한 최동원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최고 연봉 스타 자리와 롯데 프랜차이즈로 코치-감독 자리가 보장된 미래를 내팽개치고, 지금 기준으로 보면 조악할 수 있는 시스템 속에 선수협을 만드려고 했던 선택 역시 바보 같은 짓이라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최동원이 남들과 같은 평범한 길을 선택했다면 지금처럼 팬들이 그를 '불세출의 스타' '최고의 투수' 라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KBO 리그 최고의 투수에게 주어지는 '최동원 상'이 제정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평범한 스토리의 선수였다면, '퍼펙트게임' 같은 주옥같은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선동열과 최동원은 3번 맞붙어 1승 1패 1무를 기록했다.

최동원의 혹사를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혹사는 결국 선수 생명을 갉아먹는 악의 근원이나 마찬가지고 최동원의 선수생명이 짧게 끝난 이유도 혹사가 원인이 됐다. 하지만 시스템과 돈에 얽매여 영혼이 없는 선수 역시 리그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마찬가지다. 


2008년 부흥기 이후 다시 위기를 맞은 프로야구의 현 상황의 해답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선수들이 어떤 자세로 경기와 팬들에게 임해야 할지는 최동원이 생전 마지막 인터뷰가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별은 하늘에만 떠있는다고 별이 아니에요. 누군가에게 길을 밝혀주고, 꿈이 돼줘야 그게 진짜 별이에요. 그래서 생각한 건데, 이제 야구계를 위해 나도 뭔가를 하려고 해요. 이젠 그냥 '최동원'이란 이름 석 자가 빛나는 별이 아니라, 젊었을 때 나처럼 별을 쫓는 사람들에게 길을 밝혀주는, 그런 별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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