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H2의 실제 주인공 'KK콤비'의 배신과 복수의 이야기

복수는 나의 것 시리즈 3편

by 스포츠파이
H2는 야구팬들에게 교과서나 다름없는 만화다.

30대 이상 스포츠팬들이라면 ‘H2’라는 만화를 모르는 분은 없을 겁니다.


일본 고시엔 야구 대회를 배경으로 고등학생들의 사랑과 우정, 가족 간의 우애 등 다양한 주제가 복합적을 얽히면서도 아다치 미츠라 작가 특유의 여백의 미와 개그가 잘 버무려진 명작입니다.


국내에도 팬이 많은 만화인데 특히 델리스파이스의 명곡 ‘고백’이 H2를 보고 영감을 받아 만든 곡으로 유명합니다. 가사내용이 동성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지만, H2 내용에 영감을 받았다는 인터뷰가 나오고 나서는 그런 오해가 쏙 사라졌습니다.



21312321.jpg 히로와 히데오의 마지막 맞대결 장면은 H2 최고의 장면이다.

H2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루기로 하죠. 이 만화는 중학교 때 같은 팀에서 뛰며 전국우승을 이끌고 고등학교 때는 어쩔 수 없이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해 라이벌이 된 히로와 히데오가 주인공입니다. 히로는 강속구 투수, 히데오는 뛰어난 강타자로 고시엔에서 각자의 목표를 위해 라이벌 구도를 가져가죠. 그런데 이 두 캐릭터는 실제 야구선수를 모델로 만든 캐릭터입니다.


고시엔의 전설 KK콤비 '키요하라-쿠와타'

바로 오사카 PL학원에서 1983년부터 3년간 2번의 우승과 2번의 준우승을 만들어낸 ‘전설의 KK콤비’ 쿠와타 마스미와 키요하라 가츠히로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키요하라와 쿠와타는 고시엔 역사상 최고의 콤비였다.

쿠와타 마스미는 고교 통산 20승을 올리며 고교야구 본선 역대 최다승기록을 가지고 있는 투수입니다. 전문가들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투구폼’을 가졌다고 불릴 정도로 고교시절부터 극찬을 받았습니다. 프로야구 진출을 위해 야구 잘하는 선수들이 몰리는 ‘프로 사관학교’나 다름없는 PL학원에서 1학년 때부터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첫 대회에서 고시엔 우승을 이끄는 ‘괴물’이었습니다. H2에서 괴물 같은 강속구와 고속 슬라이더를 던지는 히로와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죠? 구와타는 타격에서도 일가견이 있었는데 고교 본선무대에서 6개의 홈런을 터트리며 H2 히로처럼 찬스에 강한 타자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 글의 실질적 주인공 키요하라 카츠히로는 5번의 고시엔 대회에 출전해 통산 13개 홈런을 터트리며 고시엔 역대 통산 최다홈런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1985년 3학년 마지막 대회에선 5개의 홈런을 터트리며 팀 우승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이 기록은 2017년 나카무라 쇼세이가 6개의 홈런을 터트리며 기록을 깨기 전까지 고시엔 개별 대회 최다 홈런 기록이었습니다. 1985년 대회에 키요하라의 활약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경기 중 해설자가 “고시엔 대회는 키요하라를 위한 무대인가?”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하죠.


H2의 히로와 히데오는 각자 다른 고등학교에 진출해 선의의 경쟁(야구와 연애 모두?)을 펼치다 히데오는 요미우리로 지명되어 프로무대에 진출하고 히로는 메이저리그 진출을 암시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렇다면 KK콤비의 결말은 어땠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파국이었습니다.


배신으로 얼룩진 1985년 NPB 드래프트

1985년 마지막 고시엔 대회가 끝나자 NPB 모든 팀들은 쿠와타와 키요하라에 관심이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쿠와타는 일찌감치 와세다 대학 진학을 선언했고, 그 어떤 팀이 지명해도 프로무대에 진출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러자 키요하라에게 모든 팀의 관심이 집중됐죠. 키요하라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뛰고싶다.”라는 뜻을 공공연하게 밝혔는데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만 해도 요미우리는 NPB 최고의 인기팀이자 다른 팀들과 위상을 비교할 수 없는 명문 구단이었습니다. 키요하라의 할아버지는 "오사카에서 최고가 되면 오사카 내에서만 최고지만, 도쿄에서 최고가 되면 일본최고가 된다”라는 말을 했고, 이 말은 기요하라가 도쿄를 대표하는 팀인 요미우리 입단을 꿈꾸게 만드는 기폭제가 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망의 드래프트 날.

ㄱㅅㄷㄱㅅㄷㄱㅅㄷㅅ.png 파국의 1985년 드래프트, 키요하라가 세이부 지명을 받은 직후 기자회견장에 들어섰다.

NPB 드래프트는 KBO나 MLB와 다르게 특이한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1라운드는 모든 팀들이 원하는 선수를 적어서 제출합니다. 여기서 같은 선수를 지명한 경우 해당되는 팀들끼리 제비 뽑기로 드래프트 할 팀을 정하는 ‘운’의 요소가 많이 작용됩니다. 절차대로 모든 팀들이 1라운드 지명 선수를 적어서 제출했고 결과가 공개됐는데, 모두의 예상을 깨고 요미우리는 키요하라가 아닌 쿠와타를 지명하는 꼼수를 부립니다.


요미우리의 이 선택에 많은 설이 돌아다니는데, 가장 신빙성이 높은 것은 쿠와타와 요미우리가 드래프트 한참 전부터 미리 협의해 ‘대학 진학설’을 뿌리며 경쟁팀들의 관심을 끊어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당시 요미우리는 키요하라 포지션이라 할 수 있는 3루수엔 리그 MVP까지 수상하고 이후 요미우리 감독까지 되는 하라 다쓰노리가 있었고, 1루에는 1984년에 32홈런을 기록한 나카하타 키요시가 확실한 1군 전력으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뛰어난 쇼맨십으로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선수라 키요하라를 드래프트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에이스의 자질을 갖춘 쿠와타를 지명하는 것이 우승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선택이었죠.


요미우리를 제외한 6개 팀이 키요하라를 1순위로 지명했고 제비 뽑기를 통해 퍼시픽리그의 강팀 세이부 라이온스가 우선 협상권을 얻습니다. 요미우리 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키요하라는 울먹거리며 프로야구에 진출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가족들의 간곡한 설득으로 세이부 라이온스에 입단합니다. 입단 당시 키요하라는 “쿠와타도, 요미우리도 용서하지 않겠다.”라며 강한 복수심을 불태웠습니다.


212321ㄴ.jpeg 표정이 좋지 않은 쿠와타와 울기 직전이 키요하라

쿠와타는 드래프트 당시 요미우리가 자신을 지명하자 “지명에 감사하지만 와세다 대학이 입학하겠다.”라며 키요하라를 위해주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결국 와세다 대학의 입학 환영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요미우리 입단을 확정 지었습니다. 쿠와타의 요미우리 입단이 확정되자, 당시 같은 반이었던 키요하라는 쿠와타에게 “왜 하필 요미우리냐!”라며 소리를 질렀고, 쿠와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교실을 나왔다고 하네요. 당시 고교팀 감독은 키요하라의 분을 풀어주기 위해 실내 연습장에서 2시간 동안 마음이 후련해질 때까지 배팅을 치게 해줬는데, 당시 배팅볼 기계가 있던 시대가 아니었던 터라 후배들이 돌아가며 배팅 투수 역할을 해줘야 했다고 합니다.

키요하라와 와세다 대학은 요미우리에게 이용당하며 큰 상처를 입고 만 것이지요.


생각보다 일찍 찾아온 복수의 기회

요미우리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프로무대에 데뷔한 키요하라는 신인 시즌부터 잠재력을 폭발하며 세이부의 중심타자로 자리를 잡습니다. 신인시즌인 1986시즌 타율 .304-31홈런-78타점을 기록하며 당시 신인 역대 최다홈런을 경신하며 퍼시픽리그 신인상을 수상합니다. 그리고 키요하라가 꿈꾸던 복수의 기회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옵니다.


1987시즌 타율은 .259로 다소 떨어졌지만 29홈런-83타점-출루율 .382-OPS .907을 기록하며 중심타자로 제 역할을 톡톡히 했고 팀은 71승 45패로 2위 한큐를 9경기 차이로 따돌리고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일본 시리즈에 진출합니다. 그리고 일본 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맞붙습니다. 당시 요미우리로 입단한 쿠와타는 1986년 투수와 타자 중 어떤 포지션으로 가야 할지 고민하며 제대로 경기에 뛰지 못했지만, 1987년 투수로 포지션을 확정하며 포텐을 폭발시켰습니다. 15승 6패, 평균자책 2.17을 기록하며 방어율 1위와 함께 사와무라상을 수상했고, 1987년 일본시리즈 1차전 선발투수로 낙점받을 정도로 팀 내 신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2년 차 신인이 짊어지기엔 너무 큰 부담이었을 까요? 쿠와타는 1차전 2.2이닝 6피안타 3실점(2자책)을 내주며 고전합니다. 키요하라에겐 안타와 사사구를 헌납하며 초반 실점의 빌미를 제공합니다. 팀 타선이 폭발해 패전을 면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죠.


반면 키요하라는 2차전 팀 승리에 쐐기를 박는 3점 홈런을 터트리며 시리즈 전적 1승 1패를 맞추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3승 2패로 앞선 6차전엔 2회 선두타자로 나와 안타로 진루한 이후 결승 득점을 기록하며 팀 우승에 공헌합니다. 쿠와타는 5차전 선발로 재등판했지만 1회에만 3실점(0자책)을 내주며 조기강판 당하는 수모를 당합니다. 3루수 실책이 빌미가 되긴 했지만, 1회 1사 1-3루 상황에 키요하라 타석에서 아무도 없는 2루로 견제를 던지는 이해할 수 없는 실수를 범하는 등 정규시즌 보여준 안정감과는 거리가 큰 모습이었죠.


6차전에도 맹활약을 펼치며 팀 우승에 기여한 키요하라는 우승 확정에 아웃 하나를 남겨둔 상황에 그라운드에서 울먹이기 시작합니다. 당시 우승 확정을 앞둔 세이부 선수들을 비추던 TV 카메라맨은 당황하며 울먹이는 키요하라를 잡기 시작했고 당시 2루수였던 선배 츠지 하츠히코가 키요하라를 다독여 겨우 진정시켜야 할 정도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324234ㄹㅇㄴ.jpeg 울먹이는 키요하라를 달래주는 선배

자신을 버린 요미우리에게 복수했다는 성취감과 자신이 그토록 원하고 좋아했던 요미우리를 격파하는데 일조했다는 부정적인 감정이 얽히며 눈물이 흘린 것이 아니겠냐는 동료들의 후술이 나중에 나오기는 했지만, 키요하라 본인이 이 부분에 대해 정확히 밝힌 적은 없다고 합니다.


1990년, 1994년 다시 맞붙은 쿠와타와 키요하라

키요하라의 요미우리와 쿠와타를 향한 복수전은 1987년뿐 아니라 1990년과 1994년에도 재현됩니다. 1990년 일본시리즈에서 키요하라는 비록 홈런을 터트리지 못했지만 13타수 4안타(.307)-3타점-5사사구를 얻으며 팀의 4승 무패 우승에 기여합니다. 이 시리즈에서도 쿠와타는 3차전 선발투수로 나와 8이닝 7실점 완투패를 당하며 제 역할을 해주지 못했습니다.


1990년에도 세이부가 요미우리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1994년 일본시리즈에선 마침내 쿠와타와 요미우리가 세이부를 넘어 일본시리즈 우승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시리즈 전적 2승 4패로 쉽지 않은 승부였고 키요하라에게 무려 4개의 홈런을 허용하며 엄청난 압박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쿠와타는 5차전 선발로 나서 9이닝 3실점 완투승을 거두며 세이부를 상대로 한 첫 일본 시리즈 승리를 따냈지만 키요하라에게 연타석 홈런을 헌납하며 찜찜한 승리를 기록했습니다. 쿠와타는 5-1로 앞선 6회말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키요하라가 타석에 들어서자 ‘승부를 즐겨도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한가운데 직구를 강하게 던졌지만, 키요하라는 그 공을 펜스를 아득히 넘기는 홈런으로 연결했다고 합니다. 컨디션도 좋고 구위에 자신이 있어 외야 플라이로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쿠와타의 생각이 오판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8회말 키요하라와 다시 만났을 때는 절대 연타석 홈런을 줄 수 없다는 생각에 슬라이더를 던졌지만 이 공 역시 홈런으로 연결됐다고 하네요. 연타석 홈런을 허용하자 “역시나.. 그렇지..” 라며 허탈하게 웃었다고 합니다.



복수를 성공한 키요하라! 하지만 복수만이 전부가 아니다?

3번의 맞대결에서 요미우리를 상대로 복수에 성공한 키요하라는 1996년 세이부와 계약이 만료된 이후 FA로 요미우리 입단을 선언합니다. 당시 요미우리의 라이벌 팀이자 고향팀인 한신 타이거즈가 10년간 30억엔을 준다는 엄청난 오퍼를 던졌지만, 고향팀인 한신을 대신해 자신을 버렸지만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요미우리 입단을 선택한 것입니다.

ㄱㅅ3424.jpeg 결국 요미우리에 입단한 키요하라

일본 야구선수들에게 요미우리아 어떤 의미인지 100%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지만, 어쨌든 키요하라는 요미우리에서 쿠와타와 재회해 2000년-2002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합작합니다. 자신을 버린 요미우리에게 복수도 성공하고, 자신이 사랑한 요미우리에 입단해 우승도 이룬 키요하라의 복수 성공 스토리로 끝나기엔 이후 키요하라의 인생은 파란만장합니다. H2가 야구팬들의 로망을 그린 만화라면 키요하라 스토리는 현실이 얼마나 파란만장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키요하라는 말년에 야구보다는 파벌 싸움과 술, 약물과 관련된 사건사고에 자주 휘말리며 팀 분위기에서 겉도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결국 2005년 팀에서 방출되어 오릭스로 쫓겨나듯 이적하고 오릭스에서도 별다른 활약을 남기지 못한 채 2008년 은퇴를 선언합니다. 이후 해설위원으로 TV에 간간히 얼굴을 내비쳤지만 불성실한 방송 태도로 퇴출되고 2016년 자택에서 마약을 소지한 혐의로 체포되어 곤욕을 치렀습니다.


342ㄷㄴㄷㄱ.jpeg 마약 소지 혐의로 체포된 직후 키요하라

결국 복수의 성공이 본인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진실을 알려주는 한 단면이 아닐까 하는 섣부른 생각도 하게 됩니다. 반면 키요하라에게 매번 당했던 쿠와타는 39살의 나이에 MLB 도전을 택합니다. 모두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도전은 피츠버그 소속으로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오르는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비록 패전처리로 등판한 경기였지만, 쿠와타의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었습니다.


223.jpeg 쿠와타는 39살의 나이로 MLB 데뷔에 성공한다.

스포츠의 복수에 대한 이야기는 이처럼 여러 가지 의미와 교훈을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다음 시간은 실제 전쟁에 얽힌 스포츠의 복수 스토리로 찾아뵙겠습니다.


TMI.

키요하라가 반쵸라는 이미지에 스포츠 선수라 '재일교포'라는 루머가 국내 팬들에게 돌기도 했는데, 사실무근인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실제 키요하라가 재일교포라 밝힌 적도 없으며 일본 국민만 참여할 수 있는 국민체육대회에 고교시절 참여한 전력도 있습니다.


이 글은 콘텐츠뷰 '스포츠파이'에 4월 14일 업데이트 된 글을 재업로드했습니다.

https://v.daum.net/v/V4xiokmeSy


keyword
작가의 이전글86년 묵은 저주를 날려버린 2004 보스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