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십이월의 봄 Jan 11. 2024

한 시절 뒤에는 또 다른 한 시절이

[나로 향하는 길- 열두 밤의 책방 여행]을 읽고

<나로 향하는 길, 열두 밤의 책방 여행, 김슬기 글, 책구름>


내가 한 아이의 엄마였을 때, 말하자면 아이가 한 명뿐이던, 앳된 엄마였던 시절에 김슬기 작가의 <아이가 잠들면 서재로 숨었다>라는 책을 만났다.


어쩌면 좋지, 어떤 책은 아무리 감명 깊게 읽어도 제목이 때론 생각이 나지 않던데… 이 책만큼은 몇 년이 지나도 주방 식탁을 비추는 조명등, 잠든 아가 곁을 지키는 은은한 수유등의 불빛과 함께 나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마음속에도 해마가 살고 있다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책 속의 글자들을 밝혀주던 그 밤의 빛들과 그 불빛 아래 마주했던 책의 제목을 꾸욱- 삼켜버렸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어쩌면 머리보다 마음에 더 깊이 새겨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새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홀로 된 여행은 모두가 잠든 밤, 오롯한 고요, 그 귀하고도 묘한 설렘 속에서 ‘찰방찰방 밤을 건너는 책 읽기’이다.

<아이가 잠들면 서재로 숨었다>를 집필했던 김슬기 작가는 어느새 아이가 열 번째 생일을 맞이할 만큼 자라고, 한 달에 한번 책방 여행을 떠난다. 작가는 말한다.


p.7 아이가 잠들면 서재로 숨었다. 책을 부여잡고 한 시절을 버텼다. 이후로도 계속 글을 썼다. 내가 쓴 책이 네 권이 되는 사이 아이는 쑥쑥 자랐다. 혼자 할 줄 아는 것이 많아졌다. 하루가 다르게 내 손을 떠나가는 아이를 보며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토록 기다렸던 시간이건만 무언가 쓸쓸하고 뭉클했다. 자주 울컥하며 되뇌었다. ‘한 시절이 끝나고 있는 거야. 이렇게 한 시절이 지나가는 거야.’


아직, 나에게 지나가지 않은 한 시절이건만, 이 구절을 읽는 동안 마치 그 시간을 겪어본 듯 마음이 뭉클했다. 첫 아이가 21개월 즈음되었을 때, 토요일 아침 7시에 동시를 함께 읽자며, 손을 내밀어준 책 모임에 나가며 그랬다. 그림자를 잃어버린 피터팬처럼, 두리번두리번. 아이 없이 홀로 걷는 내가 왠지 어색하고, 현실적이지 않게 느껴졌다. 어쩐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가을 아침의 공기는 더없이 상쾌했고,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토록 기다렸던 시간이건만, 왠지 모르게 시원섭섭했던 2018년 9월 29일 토요일의 아침이 이 글 위로 겹쳐 보였다.




8살, 4살, 아직 돌이 되지 않은 세 아이를 키우며, 남들보다 제법 길고 두툼한 ‘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 막내가 어려서인지, 터울지게 셋을 낳아 키우며 틈이 없어서인지, 나는 여태껏 이 시절이 끝난 이후를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로 향하는 길>을 읽으며, 사회과부도를 처음 펼쳐 본 아이처럼 아직 가보지 못하고, 가 닿지 못한 꿈들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난생처음으로.)


나는 뭘 하고 싶지?
나 혼자 여행을 떠난다면?

근래 들어 한 번도 상상해 본 적도 없거니와, 최근에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 된 큰 딸을 보면서, 부쩍 큰 아이와 함께. 그렇게 둘이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어느새 이만큼 자라서 대화도 잘 통하고, 도톰해진 손을 쥐고 동생들의 말이 섞이지 않는 둘의 목소리를 나누며 걷고 싶다. 책방 여행도 좋고, 미술관 여행도 좋고, 그저 아무런 준비 없이 훌쩍 떠나는 여행도 괜찮을 것 같다.


운전을 하지 않는 뚜벅이 엄마(오로지 운전이라면, 꼭 해야 하는 출퇴근뿐인)를 위해 겨울에도 기꺼이 엄마 손을 잡고 발품을 팔아주는 큰 아이가 고맙다. 불평불만 한번 없이, 엄마랑 함께 오래오래 걸어주는 아이. 그런 아이와 조금 더 낯설고, 먼 곳으로 떠나는 상상을 해보았다.




아직 나에겐 끝나지 않은 한 시절.

그래서 지금 걷는 이 길에서, 아주 조금 더 걸어보는 길을 상상해 보았다. 아마도 그건 첫째와 함께 하는 여행.

<나로 향하는 길-열두 밤의 책방 여행>을 보며, 가던 길을 잠시 멈추어 볼 수 있어 좋았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시계처럼, 매일 반복되는 하루 안에서 그저 오늘 하루에 충실하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내 세계의 울타리를 넘어 더 먼 시간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 로 가슴이 뛰었다. 내겐 오늘 말고, 다른 ‘오늘’도 있구나!


아이가 잠든 밤, 책을 읽는 시간은 나에게 나 자신을 가장 귀하게 대접해 주는 시간이다.

찰방찰방 내디딘 발 주위로 물방울이 튀어 오르듯 밤을 건너는 시간. 그 시간을 통해 11월엔 <나로 향하는 길>을 만났다. 결국, 책으로 여행하고 이 여행이 또 다른 여행으로 나를 이끌어주리라고 믿는다.


'한 시절을 지나가고 있는 거야. 이렇게 한 시절이 지나가고 있는 거야.’


2023.11.




매거진의 이전글 모두의 축제 <페스티벌 피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