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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필귀정의 습격

by 봄책장봄먼지

#6_사필귀정의 습격


아니, 이럴 수는 없다.


그제,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던 봄보미. '인생, 이럴 수도 있다'라고 지극히 운명 순응론자처럼 굴었다. 다시 한번 검사를 하자는 병원의 이야기에 '여한죽(죽어도 여한이 없다) 리스트'를 업데이트하며 애써 '긍정 과다', '낙천 과잉'의 자세로 하루하루의 입꼬리를 올리던 봄보미.


그런 그녀가 오늘은 인상을 찡그린다. 아니, 왜 연락이 안 와? 조직 검사 결과가 괜찮으면 그냥 3일 안에 문자로 준다며? 왜 안 줘? 왜 (나만) 안 주는데! 자신의 폰을 달래고 보채 본다. 그러나 아무리 휴대폰을 어르고 협박해도 감감무소식이다. 평정심이 삐끗, 일순간 균형을 잃는다.

갑자기 자신을 병원으로 몰아넣은 범인을 색출하고만 싶다. 여유롭고 호기로운 척하던 태도가 돌변한다. 태세 전환의 이유는 뚜렷이 없다. 다만, 봄보미. 급작스럽게 이런 생각은 든다. '나, 벌을 받는 걸까?' 근데 누가? 갑자기 왜?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내가 뭘 어쨌다고?)


사필귀정(事必歸正):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길로 돌아감.

권선징악(勸善懲惡):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함.

신상필벌(信賞必罰): 공이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고, 죄가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벌을 준다는 뜻으로, 상과 벌을 공정하고 엄중하게 하는 일을 이르는 말.

인과응보(因果應報): 전생에 지은 선악에 따라 현재의 행과 불행이 있고, 현세에서의 선악의 결과에 따라 내세에서 행과 불행이 있는 일.≒과보, 인과보응.


봄보미, 갑자기 세상을 의심하려 용을 쓴다. 세상이 사필귀정과 권선징악을 실현하려고 봄보미에게 벌을 준 것이라면? 그 벌들을 벌집 쑤시듯 쑤셔서, 한 개의 구멍에서라도 그 원인을, 그 이유를 샅샅이 뒤져나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봄보미에게, 느닷없이 검은 옷을 입은 양심이 나타나 취조를 시작한다.

"너, 뭐 잘못했어?"

"저요? 없는데..."

"왜 말끝을 흐려? 수상해?"

"아, 아니에요. 저, 착,,, 착한 편이에요."

"그건 네 생각이고. 어서 좋은 말 할 때 순순히 불어."

"아 글쎄 없다니까요?"

"어디서 수작이야?"

"그럼... 그렇게 정 원하시면 한 가지만 우선 말해 볼게요."

"그렇지.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군."

"제가.. 전철에서 눈을 감았어요."

"눈을? 왜? 양쪽 다?"

"한쪽 눈만 감은 건 감은 게 아니죠. 제가 자리에 앉아 있을 때 다음 역 전철 문이 열리기 전에... 어떤 할아버지가 스크린 도어 앞에 서 있는 걸 봤어요. 제가 앉아 있는 칸으로 들어오시려고 하길래 냅다 아예 눈을 감아 버렸어요. 그, 근데 그건 다 합쳐서 몇 번 안 될 거예요. 지금껏 살면서 한,, 일흔여섯 번쯤? 저 그렇게 막 나가는 놈은 아니에요. 믿어 주세요."

"흠... 그건 잘한 짓은 결코 아니야. 하지만 그렇다고 겨우 그것 하나 때문에 네가 벌을 받는다고?"

"하나는 아니고..."

"뭐야? 더 켕기는 카드가 있는 거야?"

"아, 카드 하니까 또 생각나네요. 제가 사실.. 동생이 있는데요. 동생이 카드값 내준 적이 있어요. 아주 예전에요. 제가 오랫동안 백수여서... 그러고 나서 가만있자... 안 갚었나? 맞다. 다는 안 갚았던 것 같아요, 동생이 저보고 일 배우라고 학원비도 내줬는데 그게 수강료가 좀 컸..어요. 123만 원인가는 됐어요."

"헐.. 너무 큰 액수잖아. 사실이야?"

"네... 안 갚았으니까 지금 얘기하죠. 그게 말이죠. 생물학적으로는 제가 16개월 먼저 태어나긴 해서 나이로는 두 살 차이지만, 물리적으로는 저보다 16cm 더 커 가지고 동생이 더 언니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언니라고 쳐도 무방하지 않나, 뭐 제 생각은 그렇다고요."

"뭔 개솔(X소리)? 아무튼 언니지만 동생 삥 뜯었다는 이야기네. 123만 원은 조금이라도 갚았어?"

"12만 원인가 한 번만 갚고... 다음은 그냥 노동으로 때웠어요."

"피죽도 못 얻어먹게 생겨 가지고 노동은 무슨 노동?"

"육...아.."

"엥? 그게 물론 고강도 노동이긴 하지만, 그래도 돈 떼어먹은 거는 어쨌든 잘못이야, 잘못!"

"그렇죠... 그럼 혹시 그것 때문에 제가 벌을 받는 갈까요? 그래서 제 마음이 요새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걸까요? 그것 때문에 병원도 제 몸을 간 보면서 아플 것 같다, 아닐 것 같다, 아직 모른다, 이렇게 막 왔다 갔다 하고 그러걸까요? 제가 요즘 좀 '조직검사 결과 전 증후군' 걸린 사람 같아요."

"그런 증후군이 있어?"

"아, 지금 방금 제가 만든 말이긴 한데. 아무튼 그게 원인인 거죠? 그 원인을 없애면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흠흠. 근데 역시 안 되겠어."

"네?"

"그걸로는 역시 조금 부족해. 남을 다치게 하거나 심하게 아프게 하거나. 그런 건 없는 거야? 평소 '착한 척 대마왕'이라고 호언장담을 하던데 그런 사람들이 더 곁바속좁이더군. 정말 찔리는 건 없는 거고?"

"겉바속좁?"

"아 그건 내가 방금 만든 말일세. 속이 좁다고 겉은 바다 같은 척하지만."


봄보미는 입고 있던 재킷 칼라를 추어올린다. 목구멍에 어쩐지 한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여기서 어떤 진실을 더 고해야 하는 거지?

"저기, 그럼 혹, 호옥시나 이것.. 때문에... 아, 아니에요."

봄보미는 지레 찔려 손사래를 친다.

"뭔데 뭔데? 말해. 원인을 알아야 나도 저승 가서 네 선처를 구하든 말든 할 거 아니야?"


검은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갓끈을 어루만지는, 금방이라도 'your idol'이나 'soda pop'과 같은 노래에 맞춰 절도 있는 리듬을 탈 것만 같은 옷차림으로, 자신이 '양심 사자(使者)'라고 서 있는 이 자. 그는 봄보미에게 정녕 더 큰 죄는 없느냐며 자꾸만 여죄를 추궁한다. 질병에 이를 만큼 나쁜 짓을 했다면 어서 캐내라고 을러댄다. (없는 죄도 만들라고 할 판이다.) 부추기는 통에 봄보미의 옆구리가 자꾸만 고춧가루 뿌린 듯 뜨끔뜨끔한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검은 사자의 눈망울에, 봄보미는 자신의 죄를 벌써 들키기라도 한 듯 기침이 먼저 터져 나온다.

"켁켁."

"왜 갑자기 기침이야? 감기야? 나 감기 걸리면 안 돼. 좀 떨어져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저, 사실 저는 수신..."

"수신? 뭐? 수신제가치국평천하, 그런 거?"

"아, 아니요. 그게 아니고 수신... 거부."

"거부를? 누구를? 언제? 왜? 뭐 때문에? 정말이야?"

하나씩만 물어보면 좋겠는데 검은 양심사자는 흥분한 눈빛으로 사건의 원인 규명이 드디어 끝날 기미가 보인다며 열에 들떴다.

"시간 없어. 어서 불라고."


봄보미는 사자의 상기된 표정을 보자 어쩐지 이 병의 원인을 찾은 것만 같다. 그건 햄이나 소시지 같은 가공육을 많이 먹어서도 아니고 라면이나 햄버거 같은 인스턴트를 즐겨서도 아니고 평소 유제품이나 피자를 과하게 제 몸에 욱여넣어서만도 아니다. 그래서 몸이 고장 난 것이 아니고, 오로지 그것 때문... 아닐까...


"좀 더 주시면 안 돼요?"

밥 한 그릇, 국물 한 수저 더 얻어먹겠다는 듯이 심드렁한 말투로 돈이 더 필요하다고 수시로 봄보미를 찾아와 봄보미의 선잠을 깨우던 아이가 있었다. 그런 너를 미워해서일까? 몇 년 동안 괴롭혔으면, 그만큼 뜯어갔으면 이제 좀 나를 내버려 두라고, 요전번에는 가족이 아파서 병원비도 많이 들어갔다고 내가 진즉 말하지 않았느냐고, 있으면서 안 주는 게 아닌데 왜 자꾸 없다는데도 또 달라고 그러느냐고.


"이번 달은 진짜 여기까지야. 더는 나도 없어."

"네."

"더 힘이 못 돼서 나도 미안해."

"네. 근데요."

"어?"

"10만 원만 어떻게 더 안 될까요?"


진짜 여기까지야, 라는 말을 상대에게 아무리 해 보아도 돌림노래처럼 일주일, 이주일 뒤면 녀석과의 카톡창에 빨간 말풍선이 뜬다. 새 메시지를 읽기 싫어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봄보미는 때때로 빚까지 내서 널 도왔던 거라고, 그렇게 소리쳐 버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때의 자신을 떠올리니, 봄보미, 또 한 번 더 얼굴에 홍조가 오른다. 왜 자꾸 나에게 의탁하느냐는 억울함이 들었던 그때의 봄보미.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팔자에도 없는 보모, 혹은 부모, 혹은 할머니 역할까지 해야 하나. 그 친구을 원망하고, 그런 자신을 원망하고, 그러다 여유가 없는 자신의 상황까지 스스로 비난했던 봄보미.

"엄마한테 말해 보는 건 어때?"

"(다시 만난 엄마랑) 이젠 연락도 안 하는데요?"

"할머니나 큰삼촌한테 이야기해 봐."

"저 빌려줄 돈 없대요."

봄보미는 자신의 가족조차 도와주지 않는다는 그 아이에게 외쳐 버리고 싶었다. 난 너의 가족이 아니라 그냥 그저 스쳐 지나가던 인간에 불과하다고. 나는 너의 구멍이 아니라고, 특히나 돈 나올 구멍은 더더욱 아니라고.


"그것 때문일까요?"

"그래서, 넌 수신 거부까지 했고?"

맹세코, 태어나 처음이에요. 봄보미는 하늘을 보며 신에게 짜증을 냈던 것까지는 이실직고하지 않는다. 그때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라고 항변하며 가슴에 찌르르한 통증이 섬광처럼 스쳐 가는 것을 느낀다.

"그동안 찌르르한 느낌은 없었고요?"

다시 한번 의사의 질문이 떠오른다. 초음파를 하며 가슴 통증이 없었냐는 질문. 그래, 있었다. 찌르르한 소리가 가슴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것이 봄보미 몸에서 실제로 자체 발산하는 소리인지, 아니면 누군가를 더는 이해하지 않으려 한 양심 찌꺼기가 뒤 구르기를 하는 소리인지, 봄보미는 결코 알 수 없었다.


진짜 이것 때문일까?

수신 거부를 하늘에 들키고야 말아서, 좋아하던 사람을 고작 돈 때문에 스스로 미워하기로 정했다는 것이 들통나고야 말아서, 내 죄를 내가 알아차려야 했는데 짐짓 모르는 척만 하고 있어서,


그래서 이렇게 건강으로부터 수신 거부를 받는구나. 사필귀정은 이렇게 '모양이 안 예쁘다는 혹들'과 함께 봄보미의 가슴 두 쪽을 불시에 습격한다.


그렇게 모든 일은 제자리로 돌아가나 보다.

"네 죄를 네가 알렷다?"



(출처: tingey-injury-law-firm-veNb0DDegzE-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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