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경영5_아직 인수되지 않은 감각에 관하여
이직 후 받은 명함에는 신사업 확장 담당 팀장이라고 적혀 있었으나, 실제로 주어진 업무는 기획 없는 마케팅 정리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조직 바깥에서 흘러오는 시장의 흐름을 읽고, 외부 파트너들과 직접 접촉하며 미래 비즈니스 구조를 설계하는 일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명함에 적힌 것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조직 전체를 바라보는 시선이 자연스럽게 작동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회사가 요구하는 것은 단기 마케팅 성과였다. 월별 목표 달성, 분기별 수치 관리, 기존 고객사와의 관계 유지 정도가 주된 과제였다. 그런데 외부에서는 다른 신호들이 계속 들려왔다. IT 전환을 고민하는 대표들, AI 도입을 위한 파트너십 제안, 기존 사업 모델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기술적 변화의 물결이 점점 더 구체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전환점은 어느 SI업체 대표와의 미팅에서 시작되었다. 기존 서비스 영역을 AI 기반으로 확장할 수 있는 기술 파트너십 제안이었는데, 단순한 시스템 구축을 넘어 실질적인 사업 구조 변화를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이런 제안을 받았을 때 일반적인 담당자라면 상급자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기다렸겠지만, 오히려 더 큰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다. 이 제안이 회사 전체 비즈니스 구조에 어떤 전략적 확장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는지, 기존 조직 역량으로는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실행 가능한 단계별 접근 방법은 무엇인지를 종합적으로 분석해야 했다.
사실, 이런 접근 방식은 조직 전체를 조감하는 실장급 시선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주어진 업무 범위 내에서 효율적인 실행에 집중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조직 전체의 성장 동력을 판단하고 외부 시장 변화에 대응하는 전략을 수립하는 것은 더 높은 차원의 업무다. 하지만 시장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직의 공식적인 역할 분담을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외부 파트너들과의 접촉이 늘어나면서 점점 더 명확해진 것은, 기존 사업 영역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었다. IT 시스템 통합, AI 기반 자동화 솔루션, SI 기반 확장 사업 등 기존 사업 구조에 없던 새로운 축을 설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회사의 실행 한계도 빠르게 인식할 수 있었는데, 기술 역량 부족, 개발팀 부재, 프로젝트 관리 체계 미비 등 내부 역량 구조의 근본적인 문제들이 드러났다. 이런 변화를 위해서는 단순한 외주 발주나 부분적인 협업을 넘어, 소규모 M&A를 통한 기술팀 인수 또는 핵심 기술 크루 영입 같은 조직 구조 자체의 재설계가 필요했다.
그래서 직접 대표이사에게 이런 분석을 전달했다. 외부 파트너들과의 미팅 내용을 정리하고, 시장 동향을 분석하며, 단계별 실행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기존 조직 역량으로는 커버하기 어려운 영역들을 명확히 짚어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 방향성을 논의했다. 특히 AI 개발 역량을 가진 소규모 스타트업 인수나, 핵심 기술 크루를 패키지로 영입하는 방식을 통해 미래 비즈니스 감각을 조직 내부에 내재화하는 전략을 제안할 예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 보고체계를 뛰어넘는 직접적인 경로를 통해 조직 전체의 방향성을 논의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하지만 조직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분석 내용 자체에 대한 검토보다는, 이런 수준의 제안을 현재 직책에서 올리는 것 자체에 대한 당황스러움이 먼저 드러났다. 기존 업무 프로세스와 보고 체계를 벗어나는 접근 방식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다. 무엇보다 조직이 이런 변화를 실제로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점점 더 명확해졌다. M&A에 대한 경험 부족, 기술팀 관리에 대한 노하우 부재, 신사업 확장에 따른 리스크 관리 체계의 미비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거절과 회피, 그리고 침묵이 이어졌다. 외부 파트너들과의 협업 제안은 명확히 거절되었고, 더 이상 진행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M&A나 기술 크루 영입과 같은 조직 구조 변화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검토 중이라는 답변만 반복되고 있다. 조직 입장에서는 현재 역량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변화를 성급하게 추진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장 변화의 속도를 고려할 때, 이런 보수적인 접근이 과연 올바른 선택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았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좌절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이 경험을 통해 조직과 시장 사이의 간극을 더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었다. 조직이 아직 준비되지 않은 변화라고 해서 그 변화 자체가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타이밍과 접근 방식의 문제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감각을 잃지 않으면서도, 조직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점진적으로 변화를 이끌어내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높은 곳에서 조직을 바라보는 감각이라는 것은 결국 조직의 현재 상태와 미래 가능성 사이의 간극을 읽어내고, 그 간극을 메워나가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이다. 단순히 외부 동향을 파악하는 것을 넘어, 조직 내부의 역량과 한계를 정확히 진단하고, 실행 가능한 변화의 경로를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번 경험을 통해 그런 감각을 더욱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조직이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변화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더 중요한 것은 미래의 흐름을 정확히 예측하고, 조직이 그 흐름을 따라올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이다. 지금 당장은 인수되지 않은 감각이지만, 시장 변화의 속도를 고려할 때 언젠가는 조직도 이런 감각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단순한 성공담이나 실패담이 아니라, 조직과 개인 사이의 간극을 메워나가는 과정에서 발견한 통찰들을 정리하고 싶었다. 조직을 조감하는 시선이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 어떤 방식으로 발현되는지를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직함과 실제 역할 사이의 간극, 조직의 현재 역량과 시장 변화 사이의 간극, 개인의 비전과 조직의 준비 상태 사이의 간극. 이런 다양한 간극들 속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 조직 전체를 이끄는 역할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완벽한 조건이 갖춰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 상황에서 가능한 최선의 방향을 찾아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다.
지금은 아직 인수되지 않은 감각이지만, 이런 감각을 알아보고 필요로 하는 조직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시장 변화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조직 내부에서 이런 감각을 가진 사람의 필요성도 더욱 커질 것이다. 그때까지 이 감각을 잃지 않으면서도,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 나가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