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딩] 브랜딩은 '설득'이 아니라 '말투'다

브랜딩5_똑같은 내용을 전달해도 결과가 다른 이유

by 봄플

조합

커피숍에서 바리스타가 건네는 한마디에도 브랜드가 담겨있다. "따뜻하게 드릴까요?"라는 물음 하나로도 어떤 곳은 친근하게, 어떤 곳은 고급스럽게 느껴진다. 똑같은 질문이지만 톤이 다르면 완전히 다른 경험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브랜드란 결국 어떤 말투로 세상과 대화하느냐의 문제였다.

전략기획자로 일하며 수많은 브랜드의 목소리를 설계해왔는데, 대부분의 프로젝트에서는 로고 디자인과 네이밍 작업부터 직접 참여했다. 특히 한 AI 업체 프로젝트에서 로고의 한글 자음 조합을 선택하는 과정이 인상깊었다. 영문 브랜드명이 먼저 정해진 상황에서, 한글 자음의 가시적 아름다움과 세련됨을 보여주고 싶었다. AI라는 최첨단 영역에서도 한글이 얼마나 모던하고 세련된 디자인 요소가 될 수 있는지 알리는 것이 목표였다.

페르소나 분석도 했고, 경쟁사 조사도 철저히 진행했다. 타겟 고객층의 선호도를 파악하고, 시장에서 어떤 포지셔닝을 가져야 할지 데이터를 쌓았다. 하지만 정작 최종 결과물은 그 모든 분석을 과감히 무시한 채 나왔다. 시장 조사에서는 AI 업체라면 차갑고 미래적인 이미지를 선호한다고 했지만, 오히려 한글의 온화하면서도 세련된 조형미로 차별화를 꾀했다. 데이터가 말하는 안전한 길 대신, 직감이 이끄는 과감한 선택이었다.

브랜드 컬러를 정하듯 말투도 설계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건 우연한 계기였다. 한 회의에서 "시민 여러분께서는"이라는 표현을 두고 팀원들이 의견을 나눴다. 어떤 이는 너무 격식적이라 했고, 다른 이는 존중의 표현이라 했다. 그 순간 언어 하나하나가 관계를 규정한다는 사실이 선명해졌다. 브랜딩이란 결국 관계 맺기의 방식을 정하는 일이었고, 말투는 그 관계의 온도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였다.


가이드

로고와 네이밍 작업을 통해 깨달은 건 브랜딩의 시작점이 얼마나 중요한지였다. 시각적 정체성이 확립되면 이후 모든 커뮤니케이션이 그 방향성을 따라 흘러간다. 한글 자음의 조합이 주는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인상, 영문명과의 조화로운 균형감, 이 모든 요소들이 브랜드가 추구해야 할 언어적 톤의 기초를 제공했다. 디자인과 언어는 서로 다른 영역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메시지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일 뿐이었다.

이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는 한 공공기관의 브랜딩이었다. 시민들에게 다가가고 싶어하는 기관이었지만, 기존의 공문서 같은 딱딱한 언어로는 한계가 명확했다. 문제는 단순히 친근한 단어를 쓰는 것이 아니라, 어떤 태도로 시민과 마주할 것인가를 정의하는 일이었다. 공공기관이라는 권위와 시민과의 친밀감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야 했고, 이는 기존의 관습적 소통 방식을 완전히 재검토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프로젝트는 '친근한 공공'이라는 콘셉트로 시작됐다. 하지만 친근함이라는 단어 안에도 수많은 결이 존재했다. 친구 같은 친근함인지, 이웃 같은 친근함인지, 아니면 가족 같은 친근함인지에 따라 언어의 질감이 달라진다. 사용성 테스트를 진행하며 시민들의 반응을 살폈을 때, 가장 좋은 반응을 얻은 건 "함께하는 동반자" 같은 느낌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보지도 않고, 아래에서 올려다보지도 않는, 수평적 관계의 언어였다.

언어 실험을 계속하면서 흥미로운 패턴을 발견했다. 같은 내용이라도 문장의 길이, 어미의 선택, 단어의 배치에 따라 느껴지는 거리감이 달라졌다. "접수해주세요"와 "접수하시면 됩니다"는 단어 몇 개의 차이지만 전자는 요청하는 느낌이고 후자는 안내하는 느낌이었다. 이런 미묘한 차이들이 모여 전체적인 브랜드 인상을 만들어냈다. 언어의 힘이 얼마나 섬세하면서도 강력한지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었다.

B2B 파트너들과의 협업에서도 언어의 중요성이 드러났다. 같은 내용이라도 어떤 톤으로 전달하느냐에 따라 협업의 질이 달라졌다. 비즈니스 파트너들에게는 전문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경직되지 않는 균형점을 찾아야 했고, 이를 위해 상황별 언어 매뉴얼을 세분화했다. 공식 문서, 이메일, 프레젠테이션, 일상 대화까지 각각의 맥락에 맞는 톤을 정의했다.


체계

피드백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인사이트도 얻었다. 사용자들이 브랜드 언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일관성이었다. 가끔 친근하다가 가끔 격식적인 것보다는, 조금 딱딱하더라도 일관된 톤을 유지하는 것을 더 신뢰한다는 반응이었다. 이는 브랜드 신뢰도와 직결되는 문제였고, 말투의 설계가 단순히 감정적 호감도를 높이는 것을 넘어 브랜드 신뢰성까지 좌우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 모든 경험을 통해 체계적인 스타일 가이드를 만들어갔다. 긴 문장을 유지하되 문장 시처럼 끊지 않고, 생각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호흡 리듬을 조정했다. 숨 고를 수 있게 문장 안에서 쉼표로 자연스러운 여백을 만들고, 감정어를 줄이며 단어는 절제하되 서술은 깊게 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단순한 감정 서술을 금지하고, 존재와 시간, 삶 같은 본질적 질문으로 확장시키며, 마침표를 찍더라도 여운을 남기는 구조로 문장을 설계했다.

스타일 가이드 제작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건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인 지침으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세련되게 써라"는 막연한 지시보다는 "형용사는 문장당 2개 이하로 제한하고, 부사보다는 동사로 표현하라"는 식의 명확한 기준이 필요했다. 언어의 뉘앙스를 규칙화한다는 것은 모순적이면서도 필수적인 작업이었다. 창의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일관성을 보장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것이 관건이었다.

금지 사항도 명확히 정했다. 짧은 문장 남발 금지, 극단적 감정 단어 사용 금지, 설명 과잉 금지, 강조어 남용 금지까지. 담백하면서도 세련된 언어로 브랜드의 목소리를 완성해갔다. 특정 단어들은 아예 사용을 제한했는데, 이런 세세한 가이드라인이 쌓여 하나의 일관된 브랜드 톤을 만들어냈다. 금지 목록을 만드는 것이 자유를 제약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더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해 오히려 창의적인 표현을 가능하게 했다.


기획자의 예리함

프로젝트가 마무리된 후 가장 보람을 느낀 건 시민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이전보다 훨씬 이해하기 쉬워졌다", "뭔가 친근하게 느껴진다"는 피드백들이 쌓이면서, 언어가 정말로 인식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브랜딩이 단순히 겉모습을 꾸미는 일이 아니라, 존재 방식 자체를 재정의하는 작업이라는 걸 체감했다. 특히 기관에 대한 호감도가 눈에 띄게 상승했다는 후속 조사 결과를 봤을 때는, 언어 하나하나가 만들어내는 변화의 힘을 실감할 수 있었다.

브랜딩 작업을 하며 깨달은 건 결국 언어가 관계를 만든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단어를 선택하고, 어떤 문장으로 조합하고, 어떤 톤으로 전달하느냐에 따라 브랜드와 사용자 사이의 거리가 결정된다. 설득하려 들면 거리가 생기지만, 자연스러운 말투로 다가가면 마음이 열린다. 브랜딩의 본질은 논리적 설득이 아니라 감정적 공감이고, 그 공감은 결국 어떤 목소리로 이야기하느냐에서 시작된다. 하나의 톤을 정했으면 모든 접점에서 그 톤을 유지해야 하고, 작은 안내문 하나까지도 같은 목소리로 일관되게 이어져야 비로소 하나의 브랜드가 완성된다.

돌이켜보면 브랜딩 프로젝트마다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여러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이었다. 경영진은 권위적인 톤을 원했고, 마케팅팀은 친근한 톤을 원했으며, 고객서비스팀은 명확한 톤을 원했다. 모든 요구를 다 수용하면 정체성이 흐려지고, 한쪽을 선택하면 다른 쪽의 반발이 생겼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건 브랜드의 핵심 가치로 돌아가 판단하는 것이었다. 무엇이 브랜드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인지 명확히 하고, 그 가치를 구현하는 방향으로 언어 전략을 세우는 것이 해답이었다.

브랜드 컬러를 정하는 일처럼 기획자는 색을 선택하지만 스스로는 무채색이어야 했다. 화려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내면서도 정작 만드는 사람은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면 안 되는 모순적인 존재였다. 회사의 목표와 비전을 반영하고, 디자이너의 개성을 고려하면서도 일관성을 지켜야 하는 작업은 단순한 조율을 넘어서는 감각을 요구했다. 클라이언트의 요구와 시장의 기대, 사용자의 니즈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일은 개인의 취향을 완전히 지워야만 가능했지만, 동시에 그 모든 요소를 하나의 일관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기획자만의 예리한 직관이 필요했다. 브랜드가 가져야 할 색깔을 선명하게 만들수록 기획자 자신은 더욱 투명해져야 했고, 그 투명함 속에서 오히려 진짜 전문성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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