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성장, 가족의 탄생, 사회의 도약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1. 영화는 손에서 시작한다. 문방구에서 이것저것 만져보며 물건을 고르는 명은의 손. 세계를 감각하는 어린 손길. 이 감각의 주체는 물론 명은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 감각의 방향성을 보아야 한다. 어디를 향한 감각인가? 명은은 지금 문방구에서 자신의 담임 선생님 애란에게 줄 선물을 고르고 있다. 선생님이 가장 좋아할 것 같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할 선물. 말하자면 명은은 여기서 애란의 시점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감각하고 있는 것이다. 타인을 향한 감각. 아이의 몸으로 어른의 감각을 상상하는 것. 이 모습은 마치 어른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아이의 몸부림처럼 느껴진다. 인정투쟁의 과정. 어른의 세계에 받아들여지기 위한 작고 여린 움직임. <비밀의 언덕>은 이러한 명은의 인정투쟁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성장에 대한 조바심. 하루라도 빨리 어른의 세계 안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투쟁. 하지만 그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선물을 고르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명은은 급하게 다시 문방구로 돌아가 자신이 고른 리본의 색을 바꿔달라고 말한다. 이유는 선생님이 금색보다 핑크색을 더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대사를 할 때 명은은 분명 선생님의 시점을 상상하고 있다. 그러나 명은이 미처 알지 못하는 점. 여기서 명은이 상상하는 선생님은 명은 자신이 생각하는 선생님일 뿐 선생님 자신이 아니다. 소타자와 대타자. 인식 바깥의 타자. 명은 자신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의 이면. 좀 더 간단하게. 명은은 애란이 아니다. 그걸 이해하기에 명은은 아직 어리다. 감각의 방향이 아무리 타인을 향한다 할지언정 결국 그 감각의 주체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되어있다. 이지은은 이 첫 장면을 통해 영화 전체의 내러티브를 함축한다. 명은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여정을 떠나는 것이다. 타인에게 다가서고자 했지만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회귀한 아이. (그 자신에게 있어서는) 실패한 성장. 그러나 실패해야 마땅한 성장. 어른의 세계에서 아이의 세계로 돌아오는 여정.
그렇다면 왜 명은은 이토록 어른의 세계에 집착하는가? 영화는 그다음 신을 통해 대답한다. 아버지가 사 온 대게를 먹던 중 명은은 텔레비전에서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모집하는 방송을 보게 된다. 이를 본 명은이 성금을 내자고 하지만 인정이 없는 명은의 부모는 단호히 거절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자신들이 겪는 어려움만을 토로한다. 아직 명은은 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좀 더 정확히. 명은의 부모는 명은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부모의 상이 아니다.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고 자신에게 친절한 부모. 그러나 현실의 부모는 그런 소녀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 명은은 그런 부모를 자신의 부모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비밀의 언덕>을 추동하는 영화적 동력은 명은이 겪는 이러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 그 자체이다. 이상적인 가족과 현실의 가족. 현실을 이상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소녀의 몸부림. 명은이 상상하는 어른의 세계는 그녀의 이상으로 가득 차 있다. 혹은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소녀에게 성장은 소망의 대상이 아닌 두려움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인정하기 싫은 어른의 모습. 자신이 그 모습으로 자라야 한다는 두려움.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상이 투영된 어른들의 세계 안으로 한시라도 빨리 들어가야만 한다. 말하자면 이 소녀에게 성장은 곧 자신의 가족으로부터의 독립이다. 자신의 가족과는 다른 자신. 부모와는 다른 어른이 되는 것. 그러한 이상이 투영된 대상이 자신의 새로운 담임 선생님인 애란이다.
명은이 애란에게 선물을 사준 것은 학기 초에 있는 가정환경조사 면담을 교실에서 공개적으로 받는 것이 아닌 애란과 연구실에서 단독으로 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은의 계획은 실패한다. 면담 당일날 애란이 예상치 못하게 지각을 하자 애란은 명은의 선물을 보지 못하고 바로 면담을 시작한다. 계획의 실패. 이 실패는 단순히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애란은 명은이 원하는 시간, 원하는 공간에 도착하지 못한 것이다. 다시 말해 명은이 원하는 때, 원하는 곳에 있는 어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곧 명은 자신이 생각하던 이상적인 어른의 상에서 애란이 이미 벗어났다는 것이다. 실패한 이상. 혹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상. 그리고 명은의 차례가 오자 명은은 머리가 아프다며 양호실에 가고 싶다며 면담을 회피한다. 하지만 결국 면담을 피하지는 못한다. 이지은은 <비밀의 언덕>의 시초를 어린 시절 겪은 가정환경조사서에서 시작했다고 밝혔다. 조사라는 이름의 폭력. 언뜻 보면 명은은 이러한 제도의 폭력에서 회피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명은이 회피하고자 하는 것은 면담 자체가 아닌 면담을 통해 드러나는 자신의 가족 그 자체이다. 애란과의 면담에서 명은은 자신의 어머니는 주부이고 아버지는 종이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한다고 거짓말을 한다. 이 거짓말의 핵심은 단순히 명은이 자신의 가족을 이상적인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에만 있지 않다. 이 거짓말을 일으키는 것은 면담 자체이다. 이 폭력적인 조사는 아이들로 하여금 수치심을 느끼도록 강요한다. 타자로서의 수치심. 정상 범주 바깥에 있다는 수치심. 명은이 부끄러워하는 것은 자신의 가족이 자신의 이상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넘어 정상 가족의 범주 바깥에 있다는 것에 있다. 내재적 수치심과 외재적 수치심. 명은이 극복해야 할 수치심. <비밀의 언덕>은 이 수치심을 극복하는 과정의 영화이다. 그 과정이 곧 어른의 세계를 동경하던 명은은 아이의 세계로 돌려보내는 방법이다.
2. 명은이 반장 선거에 나간다. 그리고 반장으로 당선된다. 하지만 영화는 명은이 반장으로 당선되는 선거의 과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게다가 누구에게도 축하받지 못한다. 명은의 부모는 명은이 반장으로 당선되었음에도 축하해주지 않고 선거가 끝난 뒤 반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에게서 축하받는 모습도 영화는 생략한다. 대신 영화는 이상한 장면을 보여준다. 명은이 반장 선거에서 하게 될 연설을 연습하는 장면. 그녀의 공약은 단 한 가지, 비밀 우체통을 설치하는 것이다. 이 연설 장면을 보여줄 때 누구든지 이 연설이 실제 선거에서 하는 연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카메라는 연설을 하는 명은을 원 샷으로 담아내며 서서히 줌 아웃한다. 하지만 곧장 이어지는 리버스 쇼트에서 이 연설이 연습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영화는 실제 선거 장면을 건너뛰고 반장에 당선된 뒤 집으로 뛰어가는 명은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장면의 생략이 아닌 연습 장면이 주는 효과에 주목해야 한다. 이 장면에서 명은은 무엇을 상상하고 있는가? 물론 실제 선거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반 친구들을 상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연설을 연습하는 명은을 보여줄 때 명은의 모습은 명은 자신이 상상하는 자신의 모습이자 자신이 되고자 하는 이상적인 자아이다. 완벽한 자아. 어떠한 결함도 없어 보이는 후보. 그러면서 어른에게 인정받는 자신.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고자 하는 몸부림. 한 마디로 인정투쟁. 연습 장면 뒤에 부모에게 달려가는 장면이 이어지는 것은 명은 자신이 인정받고자 하는 모습이 연습할 때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명은에게 있어 좋은 반장이 되는 것은 그 자체로 자신이 원하거나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 어른들에게 좋은 반장, 좋은 학생으로 기억에 남기 위해서이다. 목적과 수단의 전도.
영화는 머지않아 이를 보여준다. 반장으로 일하기 시작한 후 비밀 우체통에는 여러 제안들이 쌓이고 명은과 애란과 함께 이를 공약대로 이행한다. 명은은 그 이외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반장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이때 이 장면은 롱테이크로 촬영된 연설 연습 장면과는 다르게 여러 개의 쇼트들이 몽타주 되어 있다. 부분들의 집합. 이 쇼트들은 명은이 반장으로서 역할을 잘 수행하는 모습들을 담아낸 쇼트들이다. 누구든지 이 장면의 논리가 연설 장면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완벽한 자아를 인정받기 위한 명은의 인정투쟁이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한 마디로 명은은 반장으로서 훌륭한 자신의 모습만 모아 자아를 완성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거울 속의 자아. 하지만 이 자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진다. 누군가는 몽타주 장면에서 이미 균열을 발견했을 것이다. 비밀 우체통에서 나온 해외 친구들과 펜팔 친구를 맺자는 제안을 애란이 교장 선생님에게 전달하자 교장 선생님은 이 아이디어를 애란의 것으로 인식한다. 애란은 결국 교장 선생님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명은의 공을 애란이 가로챘다는 것이 아니다. 교장 선생님은 애초에 이 공을 명은에게 돌릴 생각이 없었다. 다시 말해 어른의 세계에 명은이 상상하는 자신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른의 세계는 어른들만을 위한 세계이다. 아이가 아무리 자신의 존재를 어른에게 인정받고자 해도 아이는 아이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 명은이 가장 완벽하다고 인식한 자신의 부분들로 자아를 만들고자 한 순간에도 세계는 순간순간 진실을 개입시키며 명은의 자아에 균열을 일으킨다. 아니, 차라리 이 순간에는 영화가 아닌 이지은이 영화를 경유하여 명은의 세계에 직접 개입했다고까지 표현하고 싶어 진다. 균열은 곧 붕괴로 이어진다.
얼마 후 학부모회가 교실에 방문하고 아이들에게 간식으로 햄버거를 나눠 준다. 여전히 명은의 부모는 참여하지 못한다. 명은은 그 자리를 공백으로 두지 않고 거짓으로 채워 넣은 상태이다. 만약 당신이 명은의 부모가 그 자리에 들어서면 해결된 문제라고 말한다면 그건 명은의 심리를 오해한 것이다. 그 자리에는 명은의 부모가 와서는 안 된다. 명은은 자신의 부모를 부모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자리를 거짓으로 채운 뒤 자신이 그 모든 책임을 지는 선택을 한 것이다. 단신으로 어른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하지만 그 세계에는 아이를 위한 자리가 없다. 어른의 세계는 어른을 위한 곳이다. 거기다 명은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자리마저 위협받는다. 교실로 들어온 명은은 애란과 대화를 나누는 경수를 보게 된다. 애란의 책상에는 경수가 준 것처럼 보이는 선물도 놓여 있다. 자신은 전달하는데 실패한 선물. 그러면서 경수는 명은이 자신만을 위한 자리라고 여기는 그 자리, 선생님과 단독으로 대면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자리가 왜 중요한가? 명은이 반장으로서 선생님과 독대할 때 명은은 단순히 한 명의 학생이 아닌 한 반의 반장이라는 대표성을 지닌 채 선생님을 마주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이 다른 학생들보다 우월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른을 마주할 수 있는 하나의 표상이다. 반증이라는 정체성. 반장이라는 존재의 표상. 그 표상이 있어야만 명은은 어른의 세계 앞에서 단지 한 명의 학생이 아닌 독자적인 인격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명은은 그 자리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아직 이 소녀가 모르는 것. 그 자리는 명은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명은이 반장이라는 표상으로 그 자리에 들어서듯이 회장 역시 회장이라는 표상 아래 선생님과 대면할 수 있다. 그때 명은이 마주하는 것은 무엇인가? 선생님의 옆자리는 어른의 세계가 아닌 모든 아이들이 들어설 수 있는 아이들의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 그렇기에 그 자신 역시 특별한 어른이 아닌 한 명의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진리. 회장의 선물이 명은의 선물과 달리 애란에게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명은과 달리 경수는 한 명의 아이로서 선생님에게 찾아갔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어른의 자리를 기다린 명은과 달리 경수는 자신이 한 명의 아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선생님과 마주한다. 결국 명은이 바라던 그 자리의 실체는 어른의 자리가 아닌 아이의 자리이다. 한시라도 빠르게 어른의 세계로 들어서고자 하는 소녀의 조바심은 끝내 좌절된다.
회장인 경수가 반 아이들에게 간식을 나눠준 것을 보고 자극받은 명은은 결국 자신이 부정하고자 하던 부모님에게 도움을 받아 자신 역시 간식을 나눠 준다. 하지만 아이들은 명은이 나눠주는 바나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명은이 야심 차게 설치한 비밀 우체통도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의 관심 바깥으로 밀려난다. 반장으로서의 실패. 이 실패의 핵심은 계획의 실패가 아니다. 명은은 그 반장의 자리가 어른의 세계와 대면할 수 있는, 어른의 자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자명한 사실. 반장도 한 명의 학생이자 아이이다. 그리고 그 반장의 자리를 만들어 준 것은 어른의 아닌 아이들이다(명은이 반장으로 당선되는 선거 장면의 생략은 이러한 진실을 망각한 명은의 심리의 반영이다). 아이들의 관심이 사라지자 반장의 자리는 모든 힘을 잃은 채 그 허망한 실체를 드러낸다. 명은은 그제서야 자신이 어른의 세계에 속한 특별한 아이가 아닌 그저 아이의 세계에 속해있는 평범한 아이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명은에게 있어 이것은 전락의 과정이다. 자신이 한 명의 아이에 불과하다는 것은 곧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는 부모로부터의 독립에 실패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건 성장의 실패가 아니다. 이지은은 이 소녀가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기를 원한다. 명은의 기대와는 달리 성장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시작된다.
3. 명은은 점점 반장의 자리에 대해서 무뎌진다. 그리고는 곧 그 자리를 스스로 내려놓는다. 여느 때와 같이 종례를 하던 중 명은은 자신이 해야 하는 선생님에 대한 경례를 회장에게 떠넘긴다. 애란이 이에 대해 꾸짖자 명은이 말한다. “저 반장 그만할래요.” 이윽고 울음을 터뜨리는 명은. 이 모습은 결단이라기보다는 좌절에 가깝다. 반장이라는 자리에 대한 좌절. 더 정확히는 자신이 마주한 반장의 실체에 대한 좌절. 반장은 어른의 자리가 아니다. 명은이 자신의 책임을 회장에게 넘기는 것은 자신의 이상이 허상이라는 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자신 역시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한 명의 아이에 불과하다는 것 역시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그 자리에 갈 수 있다. 역설적으로 그제서야 반장의 자리도 반장의 자리로 돌아온다. 아이 역시 아이의 자리로 돌아온다.
명은의 좌절을 지켜본 애란은 명은과 따로 면담의 시간을 갖는다. 두 번째 면담. 어쩌면 명은이 정말로 원했을 형태의 면담. 애란이 명은에게 눈물의 이유를 묻자 명은은 이렇게 대답한다. “할머니가 아프셔서 엄마가 딴 애들 엄마처럼 학교에 못 오는 게….” 우리는 이 대답을 하기 전 애란의 책상 위에 놓여있는 경수의 선물을 바라보는 명은의 시점 쇼트가 인서트 된 것을 함께 계산해야 한다. 첫 번째 면담에서 명은은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본 후 자신의 아버지가 종이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고 어머니는 가정주부라는 거짓말을 지어냈다. 명은에게 있어 거짓말은 단순히 진실의 반대가 아닌 그녀의 욕망이 투영된 현실의 대체이다. 부모에 대한 부정. 부모의 현실에 대한 대체. 두 번째 면담에서 명은의 거짓말은 무엇을 내포하고 있는가? 회장의 선물을 바라보았을 때 명은이 보는 것은 경수의 어머니이다. 어머니라는 자리. 다른 친구들에게는 정상적으로 작동하지만 자신은 거짓으로 채워 넣을 수밖에 없는 자리. 그 자리에 대한 한탄. 이때 명은이 한탄하는 것은 어른의 세계에 들어서지 못했다는 좌절이 아닌 아이의 세계 안에서 타자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이다. 어머니를 거부한 아이. 어머니 없이 버텨야 하는 아이. 그 아이가 이제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어머니를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명은이 요구하는 어머니는 자신의 진짜 어머니가 아닌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어머니의 상이다. 명은은 여전히 그 자리를 자신의 이상으로, 혹은 거짓으로 채워 넣고 있다. 거짓의 감각. 명은이 세계를 감각하는 방법. 왜 나에게는 다른 친구들의 어머니와 같은 사람이 없을까? 이 질문을 견디기 위해 명은은 끊임없이 거짓으로 어머니의 자리를 채운다. 명은의 대답을 들은 애란은 이렇게 대답한다. “부모님이 학교에 오시는 건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우리 학교 생활은 우리가 직접 만들어 나가는 거지, 부모님이 학교에 다니는 게 아니잖아.” 언뜻 보면 상투적으로 보이는 이 대답에서 핵심은 무엇인가? 명은이 어머니의 자리에 대해서 한탄하자 애란은 자신이 직접 명은의 어머니의 자리로 간다(애란은 명백하게 “너희”가 아닌 “우리”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명은이 요구하는 이상적인 어머니의 상에 스스로 들어간다. 물론 이 어머니는 학교에서의 어머니이다. 학교라는 세계. 그 세계를 견뎌야 하는 아이의 어머니. 첫 번째 면담에서 애란이 명은이 원하는 곳에, 원하는 때에 도착하지 못했다면 두 번째 면담에서는 스스로 그 자리에 들어간다. 그럴 때 명은은 비로소 아이가 된다. 더 정확히는 아이라는 자리를 받아들인다.
그런 명은에게 애란은 교내 환경보전 글짓기 대회에 나갈 것을 권한다. 그때 애란은 명은의 감수성과 섬세함을 칭찬한다. 우리는 그간 명은이 거짓을 통해, 타자를 경유하여 세계를 감각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런 명은에게 애란은 타자가 아닌 자신의 감수성으로 세계를 감각할 것을 요구한다. 첫 번째 성장의 순간. 타자의 감각에서 자신의 감각으로. 애란의 말을 따라 글짓기 대회에 참가한 명은은 바로 우수상을 탄다. 나는 여기서 이 결과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대신 명은이 글을 쓰기 시작한 후와 상을 받기까지의 과정에서 들어간 이상한 장면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명은이 글짓기 대회 글을 준비하고 쓸 때 명은이 바라보고 감각하는 것은 전부 환경보전이라는 주제에 충실한 감각이다. 그런데 여기서 벗어나는 장면이 하나 있다. 명은이 자료를 조사하기 위해 서점에서 책을 읽을 때 경수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둘은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경수의 어머니가 명은의 옆자리에 앉는다. 이때 경수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책을 우리는 명은의 시점에서 보게 된다. ‘우울증 인지 행동 치료’. 이 장면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후 서사의 어떤 부분에서도 이 장면이 하는 역할이 없기 때문이다. 왜 경수의 어머니가 이 책을 산 것인지, 누구에게 문제가 있었는지 등의 질문은 영화 어디에서도 해답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이 장면은 명은이 진행하는 서사에 경수의 어머니가 잠시 침입한 뒤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왜 이지은은 이 장면을 그냥 넘겨버렸는가? 단순히 <비밀의 언덕>이 명은이 이야기이기 때문이라는 대답은 충분하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명은이 이 장면을 감각하지 않고 넘겨버렸기 때문이다. 무슨 의미인가? 경수의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책은 자신 혹은 자신의 가족이 지니고 있는 고통에 대한 표상이다. 만약 명은이 그 표상을 제대로 감각했다면 명은은 경수의 어머니 혹은 경수의 가족이 겪고 있을 어떤 고통에 대해서 상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명은은 이 표상을 그냥 지나쳤다. 그렇기에 이 책이라는 기표 안에 내포된 고통이라는 기의는 명은의 눈에 들지 못한다.
여기에 대비되는 장면은 무엇인가? 명은이 쓴 글이 내레이션을 통해 흘러나올 때 명은은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버리는 자신의 어머니를 타박한다. 여전히 명은의 어머니는 명은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어른의 자리에 있지 않다. 이 장면은 왜 있어야 하는가? 명은은 자신의 글에서 인간의 무관심에서 비롯된 지구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원인에 자신의 어머니를 포함시켰다. 여기서 어머니의 존재를 단순히 환경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어른의 모습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 순간 명은은 그러한 어른과 함께 살아야만 하는 자신의 고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이상에서 벗어난 어른. 그들이 자신의 삶에 전하는 고통. 말하자면 명은은 지구의 고통을 감각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고통을 감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명은의 고통의 핵심은 물론 이상과 현실 사이의 거대한 간극이다. 명은은 그 간극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전 장면으로 돌아오자. 명은이 경수 어머니가 지닌 책을 보았을 때 그녀는 경수 어머니가 지닌 고통을 감각하지 못했다. 이 소녀에게 있어 경수의 어머니는 자신의 어머니보다 훨씬 더 이상적인 어른일 뿐이다. 그럴 때 명은의 고통은 특수성을 지닌 고통이 된다. 남들과는 다른 고통. 남들과는 다른 부모와 살아야 한다는 고통. 그것은 곧 자기 자신과 가족을 타자화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아직 이 어린 소녀는 알지 못한다. 모든 어른과 가족은 저마다의 고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것을 이지은은 명은에게 거의 노골적으로 보여주었으나 명은은 아직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 이건 무슨 의미인가? 명은은 자신의 고통을 마주하고 이야기할 줄 알지만 아직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 정확히 말하면 가족으로서의 고통. 모든 가족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저마다의 고통. 어쩌면 이지은이 명은에게 대상이 아닌 우수상을 준 것은 아직 그녀의 성장이 덜 이뤄졌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고통을 넘어 타인의 고통을 감각하기. 이제 그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이지은은 새로운 인물을 명은에게 보낸다.
4. 학교에 혜진과 하얀이 도착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명은의 교실로 혜진이 전학을 온다. 혜진의 전학은 명은에게 있어 단순히 인물의 도착을 넘어 사건의 도착이다. 어떤 사건? 타자의 도착. 타자와의 마주침. 우리는 명은이 지금 자기 자신을 타자화한 상태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때 자신에 대한 타자화는 곧 자신의 고통에 대한 타자화이다. 그런 명은 앞에 전혀 예상치 못한 타자가 나타난다. 혜진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상당히 어른스러워 보인다. 어른의 세계를 체화한 듯한 소녀. 명은이 갈망했던 세계. 하지만 그 세계에서 온 소녀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무엇이 혜진을 어른으로 만들었는가? 전학 온 첫날, 자기소개를 하는 과정에서 명은은 혜진이 전학을 많이 다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수업 중에는 혜진이 아버지 없이 자랐고 어머니가 성 노동자로 일한다는 사실까지 듣게 된다. 명은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타자. 가족의 또 다른 형태. 이때 핵심은 혜진의 어른스러운 태도가 성장의 산물이 아닌 고통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명은이 동경한 세계의 실체. 성장이 아닌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 그때 명은은 자신이 타자화한 스스로의 고통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그녀 스스로 특별하다고 여겼으나 사실은 평범할 수도 있는 고통. 더 정확히, 그녀만의 고유한 사건이라고 여겼던 고통은 각자의 방식으로 모두에게 존재한다. 거기다 혜진과 하얀은 명은과 달리 아이의 세계에서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점심시간에 반 친구들과 따로 떨어져 먹는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쌍둥이 자매는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충만하게 지낼 수 있다. 명은에게 있어 이건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우리는 앞서 명은이 아이의 세계 바깥에서는 무너지고 마는 반장의 역할을 경험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아이들의 지지와 관심 없이는 무의미한 자리. 그에 반해 아이의 세계 바깥에서도 충만하게 지내는 혜진과 하얀. 명은이 추구하는 이상을 실현하는 듯한 자매.
그런 자매를 마주한 뒤 명은은 조용히 그들을 밀어내고자 한다. 비밀 우체통을 확인하던 중 혜진이 쓴 사연을 발견한 명은은 조용히 종이를 숨긴다. 그 뒤에 도서관에서 함께 책을 읽을 때도 기싸움하듯이 자매 앞에서 책을 읽는다. 이건 단순히 타자에 대한 배척이 아니다. 명은은 지금 혜진과 하얀이라는 사건을 거부하는 것이다. 타자라는 사건. (질 들뢰즈의 표현에 따르면) 기호와의 (폭력적인) 마주침. 이때 명은과 혜진, 하얀 자매의 차이는 무엇인가? 명은과 쌍둥이 자매는 모두 자신의 이상 바깥의 부모와 살고 있다. 그러나 명은은 그러한 자신의 부모를 부모로서 인정하지 않는 반면 혜진은 너무나도 당당히 자신의 부모를 인정하고 공개한다.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명은이 타자화한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이다. 명은은 한 번도 타자의 자리를 욕망한 적이 없다.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타자화한 후 자신이 이상하는 자리로 가고 싶어 한다. 두 명의 명은. 현실의 명은과 이상의 명은. 현실 가족 안의 명은과 이상 가족 안의 명은. 명은은 자신이 속한 현실 가족의 품을 벗어나 자신이 만들어낸 이상 가족의 자리로 가기를 욕망한다. 그에 반해 혜진과 하얀 자매는 자신들이 타자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고통을 체화하는 자매. 고통의 타자화와 존재의 타자화. 이때 혜진과 하얀 자매의 존재는 명은의 고통이 타자의 자리에 오는 것을 멈추게 한다. 명은의 고통이 타자화되지 않을 때 이 고통은 회피할 수 있는 고통이 아니라 편재하는, 그렇기에 자신이 온전히 짊어져야 하는 고통이 된다. 명은은 이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그녀의 고통이 타자로서의 고통이며 가족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으로서 그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자매의 존재를 교실에서 배척해야 한다. 명은에게 있어 그녀의 고통은 특별해야 하며 그 고통은 자신이 욕망하는 이상적인 가족의 품 안에서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이지은은 그런 명은의 욕망을 바꾸고 싶어 하는 것만 같다. 영화의 두 번째 글짓기 대회. 평화를 주제로 한 글짓기 대회에서 명은은 또다시 우수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혜진과 하얀이 최우수상을 수상한다. 곧이어 자신이 쓴 글을 낭독하는 차례가 온다. 아이들은 명은이 쓴 글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이지만 혜진과 하얀의 글은 유달리 집중해서 듣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혜진과 하얀은 자신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적었고 그건 다른 아이들이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고통이다. 타자의 고통. 이 순간 명은은 다시 한번 자신의 고통이 타자의 자리에 있지 않다는 사실과 마주한다. 그러나 명은은 여전히 그 사실을 부인한다. 그리고 이 부인은 더 큰 상처가 되어 돌아온다.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놀던 중 자신의 오빠 민규가 싸우는 것을 목격한다. 아마도 자신의 부모님에 대해서 함부로 말한 것에 분노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족의 이름으로 싸우는 소년. 하지만 명은은 그런 오빠를 보고서도 모른 척한다. 가족에 대한 부인. 명은의 친구가 싸움을 말리려 하자 그 친구를 막는 과정에서 본인도 상처를 입는다. 부인의 (폭력적인) 회귀. 누군가는 이때부터 이전까지 서사에서 큰 역할을 하지 않던 민규가 갑자기 주요 인물로서 작용한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두 개의 중요한 장면. 아버지에게 혼난 후 집을 나간 민규는 그날 밤 다시 집으로 들어와 방 안에서 단 둘이 어머니와 대화를 나눈다. 명은이 얼핏 들은 대화의 내용은 민규가 어머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어머니가 자신과 아버지를 비하하는 내용이다. 우리는 명은의 시점을 따라가기에 명은과 같은 내용을 들을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장면. 학교에서 돌아온 명은은 민규가 자신의 방에서 자신이 가짜 가족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을 마주한다. 민규는 그런 명은을 타박한다. 이때 서사에서 민규의 역할을 무엇인가? 민규는 가족의 이름으로 싸우는 것으로 등장했다. 그 후 아버지에게 혼나 집을 나간 뒤에도 다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화해한다. 가족에게서 받은 상처를 가족으로 해결하기. 그리고 명은이 만들어 낸 가짜 가족을 진짜 가족의 이름으로 심판하기. 명은과 달리 민규는 자신의 가족이 주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속한 자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혜진과 같은 방법론. 그 모든 고통에도 자신의 존재를 회피하지 않는 것. 혜진이 명은의 고통을 타자의 자리에서 밀어낸 것처럼 민규는 가족 바깥으로 벗어나려는 명은을 가족 안으로 끌어들인다. 밀어내는 힘과 끌어당기는 힘. 인력과 척력. 이지은은 그 모든 힘을 써서 명은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고자 한다. 그러자 명은은 그 힘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도망친다. 가족들과 식사를 하던 중 불우이웃 돕기 성금 방송을 본 아버지가 채널을 돌리려고 하자 명은이 이에 반항하듯이 성금을 하겠다며 전화를 건다. 그리고는 곧 집을 나가 외삼촌과 외할아버지 집으로 간다. 가족을 거부하는 소녀. 현실을 벗어나 이상을 좇는 소녀. 유사 가족의 탄생. 이지은이 소녀를 가족에게 돌려보내려고 할 때마다 명은은 계속해서 도망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지은은 이 소녀를 포기하지 않는다.
5. 갑작스러운 장면이 있다.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갑자기 비약하는 것만 같은 장면. 체육 시간에 홀로 교실에 있던 명은은 담임 책상에 있는 혜진과 하얀의 글을 발견하고 몰래 읽는다. 그러다가 혜진이 들어오자 명은은 급하게 책상 아래로 몸을 숨긴다. 그런데 혜진은 책상 밑에 명은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듯이 의자에 앉아 말을 건다. “애들 완전 밥맛이지 않냐? 돌아가면서 따돌리는 거, 진짜 더러워. 전학 다닌 모든 학교가 다 그랬어.” 그리고는 명은에게 함께 놀러 가자는 제안을 한다. 이윽고 다음 장면에서 명은과 혜진, 하얀이 함께 놀러 다니는 장면이 나온다. 이 이상한 흐름. 영화는 이전까지 명은과 자매 사이의 어떠한 친분도 묘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 갑자기 친해진다. 이러한 장면은 이후에 한번 더 등장한다. 명은과 혜진이 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집으로 가는 길에 명은은 혜진과 하얀을 모른 척하며 지나친다. 친구에게 인사하라는 외삼촌의 말에도 자매에 대해 말하기 싫다는 듯이 그냥 자리를 떠난다. 뭔가 갑작스러운 전개. 우리는 그전에 혜진과 명은이 함께 놀이공원에 놀러 가기로 약속한 것을 보았다. 게다가 이번에는 명은이 대상을 받고 혜진과 하얀은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렇게나 친밀해 보였던 관계가 갑자기 끝난다. 좀 더 정확히는 명은이 그 관계를 끝낸다. 갑자기 시작된 관계는 갑자기 끝을 맺는다. 무언가 서사에서 빠져나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만 같은 흐름. 서사 안의 또 다른 서사. 서사 안에서 괄호 쳐진 서사. 그렇기에 나는 이 관계의 시작과 끝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고자 한다.
이 관계의 시작은 무엇인가? 명은이 혜진이 쓴 글을 훔쳐본 것이 관계의 시작이다. 왜 훔쳐보았는가? 단순한 대답. 혜진의 글의 비밀을 알기 위해. 명은 자신이 갖지 못한 어떤 비밀. 이 비밀을 훔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혜진과 하얀이 타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명은의 친구의 자리로 와야 한다. 지금 명은은 자매의 글에 내재한 타자로서의 고통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방법론이 궁금한 것이다. 다시 한번 반복. 명은은 언제나 타자의 자리를 기피해 왔다. 명은이 자매를 마주하기 위해서는 타자로서가 아닌 친구로서 마주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 자매도 흔쾌히 명은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지은은 이를 위해 모든 과정을 생략해서라도 혜진과 하얀 자매를 명은의 친구의 자리로 보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이 흐름은 무언가 작위적인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이지은은 이 비약을 안고서라도 명은에게 자매의 비밀을 전해주고자 하는 것만 같다. 어떤 비밀? 어느새 친구가 되어 함께 점심을 먹던 중 명은이 자매에게 물어본다. “근데 너네, 글짓기 대회 같은 거 며칠 동안 준비해?” 하얀이 대답한다. “한 시간?” 명은이 비결을 묻자 혜진이 대답한다. “우리 준비 같은 거 안 해. 그냥 자기 얘기 솔직히 쓰잖아? 그럼 선생님들은 감동받아서 상 주시거든. 지금까지 모든 학교가 그랬어.” 명은이 알고 싶었던 비밀. 솔직함이라는 비밀.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진실한 글을 쓰는 것. 자매의 비밀을 들은 명은은 골목길 언덕을 오르던 중 글을 쓰기 시작한다. 시 대회 참여를 위한 두 번째 글. 영화에 등장하는 명은의 네 번째 글. 돌아가신 할머니에게 쓰는 편지. 그리고 시작되는 내레이션. 모두가 알다시피 명은의 세 번째 글은 아무런 내레이션도 없이 (제목만 보인 채) 지나갔다. 두 글의 차이. 세 번째 글이 외삼촌의 조언에서 시작되었다면 네 번째 글은 명은 자신에게서 시작한 글이다. 여기서 우리는 명은이 첫 번째 글을 쓸 때 역시 내레이션이 나왔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첫 번째 글의 내레이션이 나올 때 가장 중요한 장면은 무엇인가? 물론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버리는 어머니를 타박하는 명은의 모습. 그때 명은은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어머니라는 고통. 세계의 고통을 이야기할 때 불쑥 찾아든 자신의 고통. 그래서 첫 내레이션에서 명은의 고통은 잠시 스쳐 지나갔다. 두 번째 내레이션은 어떠한가? 명은은 할머니에게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있는 힘을 다해 고백한다. 그렇기에 내레이션이 진행되는 동안 명은의 고통이 담긴 장면들이 몽타주 되어 나타난다. 명은이 바라보는 가족의 모습. 현실 가족과 이상 가족의 교차. 명은의 이상 바깥에 있는 현실 가족과 명은의 이상을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외삼촌과 외할아버지.
이때 이 몽타주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화면 밖에서는 명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화면에서는 명은이 생각하는 자신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가 몽타주 된다. 그런데 정작 화면에서 나오는 장면들은 명은의 고통이라기보다는 명은의 가족의 고통으로 보인다. 가게에서 외면받는 아버지. 아침 일찍부터 일하러 나가는 어머니. 맏이로서 어머니의 푸념을 감당해야 하는 민규. 화면 밖에서 명은은 여기서 자신이 겪은 고통을 말하지만 정작 우리가 보는 것은 명은이 아닌 가족의 고통이다. 시각과 청각의 불일치. 이미지와 사운드의 (의미론적) 충돌. 명은은 오직 자신의 고통만을 고백하고 있지만 영화는 그런 명은에게, 혹은 우리에게 미처 명은 자신이 알지 못한 고통의 이면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명은 자신이 고통을 지니고 있듯이 모든 가족 구성원은 저마다의 고통을 지니고 있다. 아직 명은은 이를 알지 못한다. 혹은 아직 알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어째서? 명은은 혜진과 하얀을 통해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최대한 진솔할 것을 배웠다. 진실한 고통. 하지만 아직 가족의 고통은 생각하지 못했다. 가족이라는 타자. 가족 안의 타자.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의 삶을 공유하고 마주한다. 그러니 명은이 가족 안에서 고통을 겪을 때 그것은 명은만의 고통이 아니다. 명은이 고통을 겪을 때 아버지도, 어머니도, 민규도 각자의 방식으로 고통을 마주한다. 명은은 그 고통을 단편화하여 개인의 차원에서만 해석했다. 여전히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소녀. 이지은은 그런 명은에게 이 소녀가 미처 알지 못한 이면을 알려주고자 몽타주 장면을 넣은 것처럼 보인다. 명은의 네 번째 글은 결국 그녀에게 대상을 안겨 준다. 그리고 이 순간은 명은과 자매의 관계가 끝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혹시 명은은 자신에게 가르침을 준 자매를 이제 버리는 것인가? 나는 그보다는 명은이 자매의 가르침에서 도약하여 새로운 단계로 접어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 단계는 과연 무엇인가?
6. 명은은 대상을 받았음에도 상을 거부한다. 그러자 애란이 명은을 불러 면담을 한다. 세 번째 면담. 애란이 이유를 물어도 명은은 받기 싫다는 대답만을 할 뿐이다. 여기서 이상한 편집 방식이 등장한다. 결국 그냥 받는 걸로 알겠다는 대답 후 애란이 교실을 나가자 명은이 그녀를 말린다. 복도에서 잠시 다투던 두 인물은 다시 교실로 들어온다. 그게 왜 이상한가? 이 장면은 영화 경제적으로만 놓고 보면 비효율적인 편집 방식이다. 한 공간에서 나간 인물들을 다시 원래 공간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것. 분명 이지은은 면담 장면을 교실 안에서 계속 진행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두 인물을 잠시 내보낸 뒤 다시 교실 안으로 돌려보냈다. 이 편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더 정확히, 이 편집 방식은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가?
면담 장면의 첫 쇼트를 떠올려보자. 열려 있는 교실 문을 통해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에는 명은의 등이 보이고 그 옆에 애란이 보인다. 이 구도는 왠지 면담이라기보다는 심문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이러한 구도는 교실을 교실로 보이지 않게 만든다. 앞서 두 면담 장면에서는 면담 이전에 교실 장면을 보여주면서 교실이라는 공간적 맥락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명은이 공중전화로 대상을 포기한다는 통보 장면 뒤에 갑자기 면담 장면이 이어진다. 거기다 세 번째 면담의 첫 쇼트에서 명은은 뒷모습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앞선 두 면담에서 카메라가 인물의 뒷모습을 담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 이때 명은의 뒷모습은 마치 새로운 공간으로 처음 들어선 인물의 뒷모습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쇼트는 교실을 교실이 아닌 다른 공간으로 보이도록 만든다. 어떤 공간? 학교라는 공간. 학교라는 사회. 오해하면 안 된다. 교실과 학교는 동의어가 아니다. 교실은 아이들과 교사가 상호작용하는 실재적 공간이지만 학교는 어른들의 제도와 질서가 작동하는 시스템의 장(場)이다. 간단히 말해 아이들은 교실이 어떤 공간인지는 알지만 학교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런 명은이 처음 마주하는 학교라는 공간. 그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교사와 학생으로 마주하던, 더 나아가 한 명의 어머니와 한 명의 딸로서 마주하던 명은과 애란의 관계 역시 재배치된다. 어떤 관계? 어른과 아이. 학교의 논리를 체화한 어른과 학교를 알지 못하는 아이. 그러니 세 번째 면담은 면담이 아닌 심문으로 출발한다. 아이를 심문하는 어른. 그때 비로소 명은은 어른의 세계와 마주한다. 명은 자신이 그토록 욕망한 세계. 그 세계에서 명은은 그저 한 명의 어린 소녀에 불과하다. 도달 불가능한 세계. 그렇기에 명은은 이유를 추궁하는 애란 앞에서도 대답을 거부한다. 더 정확하게, 명은은 어른의 심문을 거부한다. 어째서? 애란이 어른의 자리에 있는 한 그녀는 명은을 이해할 수 없다. 절대적인 간극. 명은의 결단은 이전과 달리 어른이 되고자 하는 결단이 아닌 아이로서의 결단이다. 그것은 곧 가족 바깥으로 향하던 욕망이 가족 안으로 회귀하는 첫 번째 순간이기도 하다. 아이라는 주체. 학생인 동시에 어머니의 딸. 그제서야 명은은 딸의 이름으로, 가족의 이름으로 애란과 마주한다.
명은이 계속 대답을 거부하자 애란을 교실을 나선다. 그러자 명은이 뛰쳐나가 애란을 말리고 둘은 다시 교실로 돌아온다. 이 메커니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애란이 면담을 마치고 나설 때 그녀는 아이에 대한 심문을 마치고 나간 것이다. 하지만 명은이 애란을 다시 교실로 돌려보낼 때 그것은 심문이 아닌 면담이 된다. 학생과 교사, (학교에서의) 어머니와 딸. 다시 말해 명은은 애란에게 심문이 아닌 면담을 요청하는 것이다. 동시에 명은은 교실이 다시 교실이 되기를 원한다. 어른의 공간이 아닌 아이의 공간. 학생과 교사를 위한 공간. 애란이 이 요청을 받아들이는 한 그녀가 어른이라도 명은이라는 소녀의 논리를 따라야 한다. 그래서 두 인물이 다시 교실에 들어왔을 때 면담은 담임 책상이 아닌 명은과 애란이 방과 후에 언제나 함께 있던 교실 한가운데 책상에서 진행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면담. 그때가 돼서야 명은은 자신의 진심을 조금씩 고백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상한 장면. 명은이 비밀 우체통을 가져와 무언가를 적은 뒤 종이를 넣는다. 그 후 애란이 직접 우체통을 열어 종이에 적힌 내용을 확인한다. “제 솔직한 마음 때문에 가족이 상처받을까 봐 겁나요.” 왜 명은은 이러한 방식으로 고백하는가? 이전까지 명은은 비밀 우체통의 주인이었다. 반장이라는 이름의 주인. 선생의 옆자리. 다른 말로 하면 어른의 옆자리. 하지만 명은이 비밀 우체통에 자신의 사연을 넣을 때 이 소녀는 스스로 반장이라는 자리에서 물러나 한 명의 아이로서 애란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곧 선생의 옆자리를 모두에게 열어주겠다는 결단이기도 하다. 그전까지 명은은 선생의 옆자리를 반장인 자신이 독차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반장이 아닌 한 명의 아이로서 그 자리에 앉을 때 그 자리는 모두의 자리가 된다. 그럴 때 애란은 명은의 어머니가 아닌 모든 아이를 위한 어머니가 된다. 애란이 명은의 어머니의 자리에 간 것은 명은이 자신의 친어머니가 학교에 오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상기하자. 이제 명은은 애란이 어머니의 자리에 가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어른이 되고자 한 명은의 욕망은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가족에 대한 거짓말로 가득 찼던 두 번의 면담과 달리 이번 면담에서 명은은 자신의 가족을 뒤로 숨기지 않는다.
그런 명은을 보며 애란 역시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 비밀 우체통에 넣는다. “명은이는 가족을 정말 사랑하는구나!” 명은은 이 말을 부정한다. “저 가족 사랑하지 않아요. 우리 가족 같은 사람들 정말 싫어요.” 그리고 덧붙이는 말. “근데 마음이 정말 불편해요.” 고통에 대한 고백.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명은이 자기 자신의 고통만이 아닌 자신으로 인한 가족의 고통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외면해 왔던 가족의 고통, 더 나아가 타자의 고통을 마주하기. 동시에 이건 명은이 고통을 배척하지 않고 수용하는 첫 번째 순간이기도 하다. 가족이라는 고통.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지니는 고통. 더 이상 명은은 자신의 고통을 타자화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명은이 지키고자 했던 애란의 옆자리, 어른의 옆자리는 모두를 위한 자리가 되고 애란은 모두를 위한 어머니가 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장. 어쩌면 명은이 대상을 받은 후 혜진, 하얀 자매와 관계를 끊은 것은 자신의 고통에 진실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른이 되기를 꿈꾸던 소녀는 이제 아이의 자리로 돌아가 한 걸음씩 성장한다. 면담이 끝난 후 명은은 시청을 찾아가 자신이 쓴 글을 돌려받는다. 그리고는 어느 산으로 올라가 그 글을 땅 속에 묻어버린다. 나에게 있어 이 장면은 마치 자신의 성장을 위한 거름을 심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 소녀가 묻은 글은 산을 이루는 나무들처럼 거대한 성장의 시작이 될 것이다.
7.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시에 신비롭게 느껴지는 장면이 있다. 명은이 시청에서 상을 받은 후 외삼촌, 외할아버지와 집으로 돌아가던 중 잠시 어딘가를 다녀오겠다고 말한다. 외삼촌과 외할아버지는 그런 명은에게 아무런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마치 어디를 가는지 아는 듯이. 이윽고 명은은 어딘가를 향해 힘차게 뛰어간다. 도착한 곳은 부모님이 일하는 시장이다. 우리는 이미 이전에도 명은이 상을 받은 후 부모님에게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이지은은 유독 부모님께 가는 과정을 더 자세히, 거기에 음악을 더해 보여주었다. 명은이 부모에게 자신이 받은 상을 자랑하자 아버지는 딱 한 마디만 한다. “우리 딸 대단하네.” 어머니는 그 곁에서 조용히 미소를 띤다. 딸은 그런 어머니의 미소를 옆에서 지켜본다. 명은의 부모는 명은이 오랜만에 왔음에도 마치 언제나 자신들의 곁에 있었던 것처럼 맞이한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딸. 가족의 재탄생. 마치 이전까지 서사의 진행을 비약하는 듯한 명은의 이 운동은 명은이 한 걸음 더 도약한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이지은의 선택처럼 보인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상을 받았을 때 명은과 세 번째 상을 받았을 때 명은의 차이점. 앞선 두 번의 상을 탄 후 명은은 부모님에게서 상으로 고기를 먹는다. 하나의 거래. 무엇을 거래하는가? 명은은 자신이 받은 상을 통해 가족에게서 작가로서 인정받고자 했다. 이때 명은이 주장하는 작가의 자리에 부모를 위한 자리는 없다. 명은은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글을 썼다. 작가라는 주체. 부모로부터 독립된 주체. 명은은 그 자리를 부모에게서 인정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명은의 부모는 명은이 원하는 명예를 주지 않았다. 대신 언제나 그녀에게 고기를 사주었다. 이때 핵심은 무엇인가? 명은이 상을 받고 난 후 가족이 함께 고기를 먹을 때 명은이 받은 상은 명은 자신의 명예가 아닌 가족의 명예가 된다. 다시 말해 명은의 부모는 명은의 성취를 가족의 성취로 환원하고자 했다. 명은의 부모는 그들의 딸을 가족 공공체의 일부로 대할 뿐 작가로서 대하지 않았다. 두 개의 힘. 원심력과 구심력. 두 개의 운동. 가족 바깥으로 나가고자 하는 운동과 가족 안으로 끌어들이는 운동. 그러나 명은이 세 번째 상을 받았을 때 명은은 부모에게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다. 명은의 부모 역시 단 한 마디의 칭찬을 남길뿐이다. 그럴 때 명은은 비로소 작가로서 인정받는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명은은 이를 통해 진정한 가족 구성원이 된다. 어째서? 가족 바깥으로 나가고자 했던 명은은 이제 자신의 부모를 진정한 부모로 인정했다. 앞선 두 번의 상을 받았을 때와 달리 세 번째 상을 부모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줄 때 그것은 단순히 한 작가의 인정투쟁을 넘어 가족 구성원으로서 받은 상을 보여주는 것이다(명은은 가족에 대한 고통을 고백하면서 대상을 받았음에도 이를 포기했다는 점을 상기하자). 운동의 전도. 명은이 작가로서 인정받고 부모가 부모로 인정받는 순간. 이제 명은은 가족을 가족으로서 받아들이고 부모는 그들의 딸을 한 명의 작가로서 인정한다. 공동체 안의 개인들. 그러면서 명은과 부모는 공동체를 이루는 개인들 사이의 간극과 차이를 받아들인다. 환원되지 않는 개인들. 그럼에도 함께 공존하는 것. 이지은은 그곳에서부터 진정으로 가족이 탄생한다고 믿는 것만 같다.
이어지는 장면. 혜진과 하얀이 방송을 통해 최우수상을 받은 자신들의 글을 낭독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자신들의 고통을 절절하게 고백하는 자매(이 표현은 사실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혜진과 하얀은 자신들이 친자매가 아님을 낭독을 통해 고백한다. 그럼에도…). 이를 묵묵히 듣고 있는 명은. 이 순간은 완전히 관계가 끝난 것처럼 보였던 명은과 혜진, 하얀 자매 사이가 다시 연결되는 순간이다. 차이는 무엇인가. 명은이 처음 자매와 친해지게 된 계기는 자매의 글의 비밀을 훔치고자 한 것이다. 도구적인 관계. 그렇기에 정작 자매가 쓴 글의 내용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명은이 자매의 낭독을 듣게 될 때 명은은 비로소 자매가 지닌 고통을, 부정하고자 했던 타자의 고통을 마주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타자를 타자로서 마주하기. 더 이상 명은은 자신의 고통을 타자화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서 모두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내재한 고통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 순간 모든 개인은 각자에 대한 타자가 되고 하나의 공동체는 그러한 타자들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 된다. 가족이 그렇듯이 학교 역시 학생이라는 이름만으로는 환원할 수 없는 아이들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 이지은은 그 사실과 마주하는 명은과 애란, 교장 선생님의 모습을 이어 붙인다. 그리고 혜진의 음성이 나오는 가운데 명은의 어머니의 모습 역시 화면에 나온다. 신문에서 딸의 글을 읽던 어머니는 명은의 글을 수첩에 보관한다. 개인의 도약을 넘어서는 공동체의 도약. 명은의 가족과 학교는 그렇게 다시 한번 태어난다.
이제 마지막 장면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6학년이 된 명은은 새 학기 첫날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가정환경조사서를 작성한다. 그리고 다음 날 새로운 담임선생은 학생들에게 가정환경조사서를 내는 대신 그 뒷면에 자기 자신에 관해 쓰라고 한다. 명은이 종이에 자기 자신에 대해 쓰면서 영화는 끝난다. 아마도 누군가는 이 결말이 지나치게 계몽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지은은 이 장면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지은은 지금까지 명은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던 가장 큰 장벽이 가정환경조사서(로 대표되는 사회의 폭력적인 시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회 안으로 환원되고자 하는 욕망. 타자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차이를 말소하는 폭력.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개인이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을 때 사회는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 타인을 향한 감각에서 시작한 영화는 자기 자신을 향한 감각을 일깨워주며 마무리한다. 가족과 학교를 넘어 사회의 도약을 꿈꾸는 이지은. 그럴 때 명은과 아이들은 진정으로 자신의 욕망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사회의 이상이 아닌 주체 자신을 위한 이상으로. 바깥을 향해 발산하는 욕망에서 안으로 수렴하는 욕망으로. 물론 이후에 아름다운 이야기만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 해는 1997년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IMF라는 거대한 비극이 찾아올 것이다. 가족과 학교와 사회는 거대한 변화를 겪을 것이다. 그러나 이지은은 그런 변화가 오기 전 영화를 멈춰 세운다. 물론 이지은이 유토피아적 미래를 상상하며 멈춘 것은 아니다. 대신 <비밀의 언덕>은 우리에게 제언을 남기며 끝난다. 자신에게 진실할 것. 그 진실함을 배척하지 않을 것. 모든 개인이 각자의 방식으로 공존하는 것. 그 이상이 실현되기를 꿈꾸며 이지은은 영화를 마친다. 그 뒤의 이야기는 아마 우리의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