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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람 Oct 13. 2023

해설 단군신화(50. 교정)

고조선시대 말기(삼한춘추전국시대 2 ): 삼한조선의 선교와 제자백가

 삼한춘추전국시대(三韓春秋戰國時代)의 특징은 봉건권력통치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제자백가(諸子白家)의 탄생이다. 따라서 삼한춘추전국시대는 제자백가시대(諸子白家時代)라고도 한다.   

   

 제자백가시대에 고조선의 천도사상인 신교(神敎)를 믿던 삼한조선의 천도철학사상(天道哲學史想)인 선교(仙敎)가 사라지는 대신 동양에서는 수많은 제자백가(諸子白家)가 탄생하고, 서양에서는 이때를 즈음하여 유대교와 기독교와 천주교의 경전이 되는 구약성서가 탄생되어 천도사상의 서구 종교화 시대가 시작된다.  

 또한 제자백가 시대에 마케도니아의 왕(재위 BC 336∼BC 323) 알렉산더가 그리스·페르시아·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서구의 그리스 문화와 동방의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킨 동서문화교류로 새로운 헬레니즘(hellenism) 문화를 이룩하였고,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아테네의 폴리스(Polis)를 중심으로 한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적 정치체제인 아테네식 민주주의가 도입되었던 것 역시 이때의 일이다.   


 제자백가 시대에 탄생한 동양의 모든 철학사상과 서양의 모든 철학사상과의 사이에는 헬레니즘이라는 동서문화교류의 역사가 있을 뿐, 동양과 서양의 모든 철학사상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정확히 밝혀지고 있는 바는 없다.  

 명백한 것은 제자백가시대에 동' 서양에서 공히 오늘날의 문명과 정신문화의 바탕이 되는 수많은 철학사상이 집중적으로 탄생하였고, 제자백가시대에 출현했던 철학사상들이 동' 서양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자백가에 대해서 좀더 복합적이고 광범위하고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자백가(諸子白家)


 제자백가는 중국 춘추전국시대(BC 8세기∼BC 3세기)에 활약한 학자와 학파의 총칭이다. 제자백가의 '제자(諸子)'란 여러 학자들이라는 뜻이고, '백가(百家)'란 수많은 학파들을 의미한다. 

 즉 제자백가는 춘추 전국시대의 건국사상을 뒷받침하였던 공자(孔子), 관자(管子), 노자(老子), 맹자(孟子), 장자(莊子), 묵자(墨子), 열자(列子), 한비자(韓非子), 윤문자(尹文子), 손자(孫子), 오자(吳子), 귀곡자(鬼谷子) 등의 유가(儒家), 도가(道家), 묵가(墨家), 법가(法家), 명가(名家), 병가(兵家), 종횡가(縱橫家), 음양가(陰陽家) 등의 여러 학파를 통틀어 이른 말이다. 

 제자백가(諸子白家)는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는 삼한춘추전국시대의 군주들에게 정치의 방법을 제언하기 위해 등장했는데, 제자백가시대의 제자백가 사상가들은 각각 독자적인 우주관과 사회관, 인생관을 가지고 제자백가라는 이름대로 사상에 따라 학파로 나뉘어 장래 정치와 사회에 대해 논했다.


 하필이면 왜 이 시기에 중국에서 수많은 학자들과 학파들이 나타났는지에 대해서는 그 이유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설이 있으나, 중국역사가들은 대체로 주나라의 종법제적 규범이 완전히 무너지고 기존의 지배층들이 대거 몰락하면서, 그 몰락한 지배층들의 일파가 자신이 익힌 지식을 활용하여 교육과 후학 양성에 힘쓴 결과로 풀이하고 있다. 쉽게 말해 이토록 혼란스러운 시대를 도대체 어떻게 멈출 것인가에 대한 수많은 사상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 중에서 유력한 능력을 보였던 사람들이 제자백가라는 설명이다. 

 제자백가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중국역사가들에 의한 일반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중국역사가 들의 제자백가에 대한 해석은 제자백가 사상가들의 대부분이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는 중국의 군주들에게 그 정치의 방법을 제언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리가 있지만, 제자백가 사상가들이 각각 독자적인 우주관과 사회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과거의 사건들을 돌이켜 보면서 장래의 사회에 대해 논하였다는 점에서는 너무나 중국에 치우친 해석이다. 


 제자백가의 탄생은 주나라가 붕괴되어 동주로 나누어지는 시점인데, 그렇기 때문에 주나라의 붕괴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그러나 주나라의 붕괴는 사실 주나라가 천자(天子)의 구실을 하지 못한데 있다. 따라서 제자백가의 탄생 원인을 단순히 주나라라는 국가의 멸망에서 찾기보다는, 국가의 통치적 권력이나 국가들 간의 전쟁을 제어할 수 있는 통합된 어떤 큰 철학사상이나 종교의 몰락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이 옳다. 그러면 과연 어떤 큰 철학사상이나 종교의 몰락이 원인이 되어 제자백가가 나타났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데, 결국 제자백가의 시원사상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답이 된다. 

 제자백가의 시원사상이라 짐작할 수 있는 철학사상은 제자백가시대 전에 있었던 철학사상으로, 고조선의 선교사상(仙敎思想)과 자연의 원리를 통하여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친 주나라의 주역사상(周易思想)이다. 그러나 제자백가시대에까지 선교(仙敎)가 주역(周易)과 함께 존재했다는 사실 뿐, 제자백가에 속하는 주역과 고조선의 신교의 가르침인 선교와의 관계에 대하여 역사 속에서 밝혀진 바는 없다.  


 주역(周易)과 선교(仙敎)와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기 위하여 먼저 주역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주역은 사서오경(四書五經) 중의 하나이다. 중국유학에서는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사서(四書)라 하고,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을 삼경(三經)이라 하며, 삼경에 춘추(春秋)와 예기(禮記)를 합해 오경(五經)이라 부른다. 사서와 오경을 모두 합해서 사서오경이라 부르는데, 오경 중에 역경을 주역(周易)이라고도 한다. 

 주역은 만상을 음양 이원으로 나누어 그 으뜸을 태극이라 하고, 이를 바탕으로 64괘를 만들어 길흉화복을 점치는 철학사상이다. 주역의 역(易)은 "바뀌다. 교환하다. 고치다"의 뜻으로 그 시원 사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나라의 주역 이전에 있었던 동양의 큰 철학사상은 고조선의 선교 밖에 없다. 따라서 선교가 제자백가 사상의 하나인 주역의 시원사상이라 추정할 수 있고, 제자백가시대 당시 삼한조선이 존재하였음으로 선교 역시 제자백가 사상 중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역은 제자백가시대는 물론 그 이후에도 중국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선교는 제자백가로 인해 몰락을 길을 걸었다. 여기서 주목하여야 할 것은 주역이 주(周)나라에서 정립된 학문이라는 사실이다. 주역은 하늘이 주는 길흉화복을 점치는 사상인데, 주나라의 왕은 스스로를 천자라 하면서 천도사상(天道思想)을 부정하였다. 이것은 주역이라는 말 그대로 주(周)나라의 정신이 천도(天道)와 정확히 상반되는 역(易)으로, 주나라가 멸망의 길을 걸은 것 역시 이 때문에 천자의 구실을 못한 이유이다.  


 다음으로 선교는 주지하듯이 천도사상(天道思想)을 바탕으로 하느님과 하나님을 믿는 종교적 신앙을 가진 철학사상으로, 주나라 이전부터 시작하여 주나라는 물론 제자백가시대까지 존재하였다. 제자백가의 중요경전인 주나라 주역이 천도사상을 부정하였다는 것은 선교를 부정하였다는 말과 같다. 순서를 보면 선교가 있었고, 선교를 부정한 주역이 생겨났으며, 제자백가가 생겨났을 때 선교와 주역이 함께 존재했다. 따라서 제자백가시대에 선교가 무너지면서 중국의 제자백가로 변한 것이 된다. 


 제자백가시대에 동양은 물론 서구에서도 전술하고 있듯이 아테네 민주주의와 성경을 비롯한 수많은 철학사상들이 탄생했다. 

 세계역사에서 제자백가시대처럼 수많은 철학사상들이 동서양을 망라하여 마치 파도가 밀려오듯 갑자기 생겨난 사례가 없으며, 세계종교의 모태가 되는 불경과 성경 등과 거대한 같은 종교철학이 생겨난 사례가 드물다.

 제자백가시대에 이처럼 인류 역사의 미래를 좌우할 결정적인 철학사상과 종교가 집중적으로 생겨나고 동서문화교류라는 문화적 사건이 일어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제자백가 시대 이전의 세계역사에 있었던 큰 철학사상이나 종교들을 통하여 미루어 짐작해 볼 수는 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모든 창조는 선행지식을 모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고대 한국 역사의 선교사상을 제자백가의 선행사상으로 해석하였던 이유이다. 


 제자백가시대에 존재하였던 제자백가에는 개개인의 인물과 학파가 있다. 

 제자백가시대에 동양에서는 단군의 선교(仙敎)가 전해지고 있었고, 노자· 맹자의 도교(道敎), 석가모니의 불교(佛敎), 공자·장자·순자·한비자 등의 유교(儒敎) 등 많은 인물과 철학사상들이 탄생했으며, 서구에서는 구약성서(B.C.1,000∼B.C.538년) 탄생과 완성(B.C.50)˙ 조로아스터(짜라투스라,B.C.628)˙ 소크라테스(B.C.470년)˙ 플라톤 (B.C.427)˙ 아리스토텔레스(B.C.384년)˙ 에피쿠로스(B.C.341)˙ 스토아학파(BC 334~262년) 등 기원후 역사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인류 문명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철학사상가와 철학파와 종교들이 탄생하였다. 

 제자백가시대에 등장한 가장 유력한 사상가로는 단연 동양의 단군과 공자와 서구의 소크라테스를 빼놓을 수 없으며, 제자백가시대에 있었던 가장 유력한 종교 경전으로는 삼한조선의 선교의 경전과 불경과 구약성경을 빼놓을 수 없다. 

 각각의 철학사상과 종교 서로 간의 연관 관계나 동양과 서양 서로 간의 연관 관계는 밝혀진 바가 없으니 알 수 없으나, 유사성을 통하여 발전순서와 변천 과정을 짐작해 보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성과는 있을 것이다.


 제자백가시대에서는 이처럼 동양과 서양을 막론한 세계 전역에서 수많은 철학 사상들이 나타나고, 동양의 천도사상이 서양에서 종교로 재탄생한다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서구에서 선교의 홍익인간사상과 맥락을 같이 하는 세계시민주의와 자연 과학이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제자백가를 동서양의 모든 철학사상과 종교적 신념을 통털어 포함한 개념으로 확대해보는 의식의 전황이 필요한데, 이와 연관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전술했던 헬레니즘의 동서문화교류이다.  



 

 중국사서에서 춘추전국시대의 철학사상이라 정의한 제자백가에 서구의 철학사상과 학문을 포함시키는 점에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지만, 오늘날의 동양과 서구 철학사상의 시원이 되는 당시의 동서양의 철학사상의 상관관계를 살펴본다는 점에서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

 특히 당시의 동서양의 철학사상이 똑같이 천도사상을 시원사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제자백가시대 이전에 천도사상인 선교가 있어 제자백가시대까지 이어졌고, 제자자백가시대에 천도사상에 속하는 불교, 기독교와 천주교의 경전이 되는 구약성경이 동양과 서구에서 탄생하였다는 것은 오늘날의 종교문화나 고고학적 연구결과를 통하여 이미 밝혀져 있는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인류역사를 통하여 살펴보면 모든 창조는 경험의 축적을 통하여 쌓은 지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철학사상과 종교와 문화 또한 마찬가지이다. 

 경험의 축적을 통하여 쌓은 지식을 바탕으로 철학사상과 종교적 신념이 탄생하고, 철학사상과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새로운 철학사상과 종교문화가 탄생한다. 동서양의 철학사상 또한 마찬가지이다. 동양의 철학사상과 서양의 철학사상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결국은 모두가 천도사상으로 이어진다. 제자백가에 동서양의 철학사상을 모두 포함하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삼한춘추전국시대가 국가 간의 침략적 전란(戰亂)을 관점으로 한 시대분류라면, 제자백가시대는 국가 간의 철학사상과 종교 등의 문화적 변란(變亂)을 바탕으로 한 시대분류라 할 수 있다. 

 국가 간의 철학사상과 종교 등의 문화 변란(變亂)을 바탕으로 시기를 분류할 때는 제자백가에 대한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인류 고대문명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짧게 잡아도 6,000여년에 속하는 역사에서 BC 770년경으로부터 BC 425년~200년경까지 불과 570~350년 정도의 짧은 기간에 오늘날 인류가 향유하고 있는 철학·과학·종교·정치·문화 등 방면의 기초가 되는 제자백가가 나타난 것은 가히 획기적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창조는 모방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가설을 전제로 살펴보면, 제자백가 이전에 제자백가의 모태가 되는 어떤 큰 철학사상이나 종교가 있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물론 알렉산더의 동방원정 역시 침략적 전란이 아닌 문화적 변란으로 보는 관점에서다.


 한국고기에서는 삼한춘추전국과 제자백가 시기의 문화 변란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삼한춘추전국시대의 혼란 속에서 선교가 사라지고 제자백가가 융성할 때, 간다라지역에 있었던 천독은 즉 천축국이라 불렸던 고대인도는 고조선의 종교지국으로 기원전 6세기 경에 신교를 바탕으로 브라만교와 불교를 탄생시켰는데,  당시 삼한춘추전국의 전란 속에서 고대인도에서도 16대국이 일어나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기원전 6세기부터 강성한 세력을 키워 왔던 서역의 페르시아는 인도의 서북부를 계속 침공하였다.

 마침내 기원전 327년 서구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일어나서 인도의 서북부를 침략하였다. 알렉산더 동방원정으로 그리스의 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던 미술이 인도에 전해져 간다라미술이 탄생하였다. 

 알렉산더의 침공 루트는 카불을 넘어 힌두쿠시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그는 북부 인도를 횡단하여 서북 일대를 석권하고, 탁실라(Taxila)와 제룸(Zerum)의 두 왕국을 붕괴시켰으며, 계속 동남쪽으로 진군하려 하였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군기가 해이해지고, 휘하의 장병들은 도저히 전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할 수 없이 회군을 결정한 그는 1년 후인 기원전 326년경부터 철수를 시작하였다. 


 한편 삼한춘추전국시대 이전에 한국과 지리적으로 겹쳐있던 중국에는 정체거 모호한 유학이라는 학문이 있었다고 할 뿐 별 큰 철학사상이 없었고, 오직 고조선의 신교와 선교 철학사상만이 존재했다. 따라서 삼한춘추전국시대의 중국 철학사상은 고조선의 신교와 선교 철학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고, 삼한춘추전국시대 이전의 고대 중국유학이 곧 고조선의 선교 철학사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 해설 단군신화(51) " 고조선시대 말기(삼한춘추전국시대 3 )- 제자백가시대의 동양 철학사상" 편에서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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