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솔바람 Oct 16. 2023

해설 단군신화(51. 교정)

고조선시대 말기(삼한춘추전국시대 3 ): 제자백가시대의 동양 철학사상

 제자백가시대의 동양 철학사상


 제자백가시대의 동양철학사상에는 단군의 선교, 노자와 장자의 도교,  공자·맹자·장자·순자·한비자 등의 유교· 석가모니의 불교 등의 수많은 철학사상이 있었다. 

 제자백가시대의 동양철학사상 서로간의 상호관계에 대하여 학술적으로 밝혀진바는 없지만, 연대순으로 배열하여 간력하게 설명하면서 선교와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1. 단군(檀君: B.C.2,400? ~B.C.425?)의 신교와 선교


 단군은 한국인들이 역사적 인물로 생각하여 일반적으로 친근하게 단군 할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만 그에 비하여 한국인들에게 단군의 신교와 선교사상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대에는 거의 돈과 권력에 미쳐서  신교와 선교사상의 핵심사상인 홍익인간사상조차 부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단군이 만든 신교의 역사와 선교사상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설명하였음으로 생략하겠다. 


 신교와 선교의 우수성은 세계 최초의 종교이자 종교적 가르침으로, 가장 종교적이면서도 인간중심적인 합리성에 있다.  

 종교가 존재하는 것은 인간의 부족함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과 삶의 고통과 질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神)과 천국(天國)을 만들고 신(神)을 통하여 그런 공포들을 해결하려 하였다. 그런데 역사를 살펴보면 종교는 항상 종교적 이기심이 중심이 되었고, 신(神)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사이에 차이를 두어 차별을 키워왔으며, 사람들은 항상 종교를 신(神)을 표방하여 욕심을 채우는데만 이용해 왔다. 그러나 단군의 신앙과 철학은 다르다. 

 단군의 신교와 선교는 창조주 하느님이 인간을 중시하여 구세주 하나님이 인간을 도우려 인간의 곁으로 내려오고 그것도 모자라 스스로도 인간이 될 정도로 인간중심적이며, 신(神)이나 특별한 인간(人間)이 통치하는 직접적인 방법이 아닌 홍익인간사상을 통하여 홍익인간교육이라는 본능적 욕망을 차단하는 간접적인 방법을 추구한다. 따라서 단군의 철학사상에서는 돈과 권력보다는 가치와 명예가 중시되고, 신(神)과 천국(天國)에 대한 신앙까지도 인간과 세상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한다.


 어쩌면 종교를 통하여 과학과 철학사상을 이야기하고, 과학과 철학사상을 통하여 종교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말도 안돼는 이야기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는 인간의 부족함과 과학과 철학사상으로 인간의 모든 것을 밝힐 수 없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단군의 철학사상은 신(神)을 믿으라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종교적이며, 신(神)이 만든 세상에 대한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해답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정치라 한다. 단군에 대한 국가 중심의 정치적인 역사논란을 넘어서서 세계인 중심의 종교적 철학적 해석이 더해져야 할 것이다. 




2. 브라만교(婆羅門敎,Brahmanism)와 힌두교(Hindū;인도교)


 브라만교는 B.C. 1500년경에 아리아인 인도에 침입하여 정착 뒤 신봉한 힌두교의 전신이 되는 인도 아리아인의 민속 종교이며, 인도 원시종교의 영향을 받고 불교에 영향을 주었던 종교이기 때문에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브라만교 이전에 인도의 인더스강을 중심으로 기원전 2500~1500년경에 인도 원주민인 문다(Munda)족과 토착민인 드라비다족에 의해 발달하였던 인더스 문명이있었는데, 이 인더스 문명에 인도 원시종교가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인도 원시종교의 유물로는 인더스 문명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도시 유적인 하라파, 모헨조다로, 돌라비라 등은 가로 1km 세로 1.2km의 웅장한 규모가 남아있다. 전성기에 이 도시 인구는 4만~ 8만 명 가량이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인더스 문명을 영위한 집단이 어떤 언어를 사용했는지는 현재 4대 문명 중 유일무이하게 해독 불가인 상태이며, 당시의 어느 인적 집단과 이어지는지를 확정 짓기는 어렵다. 인더스 문명은 아리아인의 남하 이전 모종의 이유로 쇠퇴하였으며, 아직도 명확한 쇠퇴 이유는 미지의 상태이다. 

 인더스 문명으로부터 시작된 '인도(India,印度)'는 중국 당대 초기의 불교 승려였던 현장이 인디아의 고대 페르시아어 'Hindu'를 음역함으로써 한국어를 포함한 한자문화권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현장 이전 한나라-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인더스강을 의미하는 'sindhu'를 음차한 신독(身毒), 혹은 천축(天竺)이라고 불렀는데, 중국사서 산해경 해내경에서는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조선천독이라는 나라가 있었다.(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고 하여 천축이 곧 고조선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동진의 곽박(郭璞)이 쓴 산해경 주석(山海經注) 18장 해내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 곽박은 말한다. 천독은 즉 천축국이다. 도덕을 귀하게 여겼고, 소리나 기호로 된 문장으로 일정한 의사나 관념 또는 사상을 표현했으며, 금은보화가 가득했고, 불교의 유물인 부도가 이 나라에서 나왔다. 진(晉)나라 대흥 4년에 천축국의 호왕(胡王)이 진귀한 보물을 선물했다.(郭璞云. 天毒即天竺國. 貴道德 有文書 金銀錢貨 浮屠出此國中也. 晉大興四年 天竺胡王獻珍寶貴道德.)”라고 하여 인도가 고조선에 속했음을 밝히고 있다. 

 또 청의 학자 오임신(吳任臣)은 곽박의 산해경주를 보완하는 산해경광주(山海經廣注)에서 더욱 분명하게 산해경의 해내경과 대황경은 모두 고조선의 역사를 기술한 고조선의 사기(古朝鮮史記)라고 했다. 이런 그의 주장은 송의 나필(羅泌)이 노사(路史)의 각주에서 “해내경과 대황경은 조선기(朝鮮記)이다.”라고 밝히고, 1734년 산서통지(山西通志)에도 기록된 것을 재인용 한 것이지만 오임신 이외에 송의 라벽(羅璧)이 펴낸 식유(識遺)·명의 동사장(董斯張)이 편찬한 광박물지(廣博物志)·고기원(顧起元)의 설략(說畧)·청의 장기(蔣驥)가 편찬한 산대각주초사(山帶閣註楚辭) 등에서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정리해보면 기원전 2500~1500년경에 인도 원주민들에 의해 발달하였던 인더스 문명은 고조선 문명인 동시에 인도 원시문명에 속하고, 인도원시 종교와 가르침 역시 고조선의 신교와 선교였음을 알 수 있다.      


 아리아인이 남하하여 만든 고대인도종교인 브라만교의 핵심이 되는 종교와 사회사상은 산스크리트어 베다(바이디카:vaidika)에 유래하는 것이므로, 즉 브라만교와 그로부터 발전한 힌두교는 베다의 종교라고 해도 상관없다.      

 브라만교는 리그 베다, 사마 베다, 야주르 베다, 아타르바 베다의 4베다 및 그에 부수하는 브라마나, 아라냐카, 우파니샤드를 천계 성전으로 하여 절대 권위로서 받들었다. 그리고 주로 거기에 규정되어 있는 제식을 충실히 실행해서, 현세의 다양한 소망, 또한 궁극적으로 죽은 후의 생천(生天)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브라만교의 본질은 다신교로서 제식의 장에서 권청하는 신은 다양한데, 그 중에서도 화신 아그니를 중시하여 제단에 불을 피워서 그 속에 버터나 떡 등을 던져넣는 것을 호마(護摩)라고 하여 이는 아그니를 통해서 천계의 신들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을 의미하였다. 또한 제식을 집행하는 것은 사제계급에 해당하는 브라만(브라마나:brāhmana)이다. 

 브라만이 이야기하는 말은 진실, 즉 반드시 그 말대로 일을 실현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여 신들조차도 브라만의 진실의 말에는 따라야 했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브라만은 신 이상의 존재였다. 따라서 브라만이 노해서 발하는 저주를 말도 역시 확실한 효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하였으며 이 말의 힘에 의해서 브라만은 인도사회의 최상에 위치할 수 있었다. 

 브라만은 또한 자신의 우위성을 견고한 것으로 하기 위해서, 브라만을 지상으로 하는 이념적인 계급제도를 만들었다. 이를 카스트(바르나:varna)제도라고 하였으며, 인도사회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4개의 바르나로 구분되어, 이 구분을 침범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또한 브라만교에서는 바르나의 성원이 평생동안 밟아야 할 단계(생활기, 아슈라마)가 규정되어 있었는데 학생기, 가장기, 임서기, 유행기의 네 가지가 그것이다. 이를 정리해서 바르나 아슈라마제라고 하였는데, 브라만교의 기본은 이를 준수하는 것에 있다.      


 브라만들은 기원전 6세기경부터 동인도를 중심으로, 자이나교나 불교를 비롯한 비(非) 브라만교적 종교가 차례로 나타나자, 이에 대항해서 자신의 교학 정비에 착수해서, 기원전 3~기원전 4세기 이전에는 베다의 6개의 보조학(베단가), 즉 음성학·제사학·문법학·어원학·운률학·천문학을 확립하였다.  이중 제사학은 천계경, 가정경, 율법경, 제단경의 연구에 임한 것으로 이런 학문적 분위기 중에서 기원 전후에는 많은 철학체계(육파철학)가 생겨났다. 

 또한 브라만교 자체는 그 골격을 유지하면서도 비아리아적인 토착의 종교와 융합해서, 늦어도 5세기경까지에는 시바신이나 비슈누신을 최고신으로 하는 힌두교로 전개되었다.      


 브라만교와 융합하였던 비아리아적인 인도 고유의 토착 종교는 전술하고 있는 인더스 문명의 인도원시종교즉 고조선의 신교이고, 선교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로 불교와 의미가 같으며, 브라만교는 인도 원시종교와 융합하여 탄생된 종교이다. 

 이런 사실은 석가모니의 불교와 브라만교가 인도종교의 시원 사상이 되는 고조선의 원시불교를 토대로 하여 탄생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따라서 기원전 1500년경 생성된 인도 아리아 문명에 속하는 브라만교와 기원전 6세기경에 생성된 불교는 고조선 문명의 후신인 동시에 인도 문명에 속한다고 요약할 수 있다.         



3. 노자(미상,B.C.600년경)


  노자(老子)의 성과 이름은 이이(李耳)고 자는 담(聃)이었으며,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이며 도가(道家)의 창시자였다. 

  노자는 도교경전인 도덕경(道德經)의 저자로 알려져 있으며, 도교의 모든 이론은 노자에 의해 마련되었다. 현대 학자들은 도덕경이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저술되었을 가능성은 받아들이지 않으나, 도교가 불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통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노자의 중심 사상은 인의(仁義) 등 도덕이나 지혜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인민을 지배하려고 하는 유가(儒家)에 대하여, 도덕과 지혜와 지배 의욕을 버리고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의하여 지배하려고 하는 정치사상과 무위무욕(無爲無欲)으로 남에게 겸양하는 것에 의하여 성공ㆍ보신(保身)하려고 하는 처세술이다. 이들에 대한 근거로서 현상의 배후에 불가지(不可知)의 실재(實在)인 도(道)를 설정하여 우주생성설과 음양의 자연학을 도입하고, 세계는 도(道)로부터 나오고 '도'에 의하여 생성ㆍ사멸의 운동을 한다고 하는 객관적 관념론을 전개하였다.  

 노자는 인간이 지나치게 도덕과 지혜에 빠지면 오히려 그로 인한 지배욕에 휩싸이게 됨을 경고하면서 무위자연과 무위무욕으로 정치에 임하고, 남을 위해 겸양하는 것이 성공과 보신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즉 노자의 사상에서 도덕과 지혜' 보신과 성공' 등 모든 것이 특정 계급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노자에 의하면 우주는 음(陰)과 양(陽)과 도(道)의 삼위로 나누어지고, 도가 우주를 창조하고 음과 양의 천지만물을 다스리니, 도가 곧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영성 즉 홍인인간심 이다. 따라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는 도를 닦아 영성을 이루고, 영성을 이룬 후에는 무위자연과 무위무욕으로 남을 위해 겸양하는 것이 도덕과 지혜를 이루는 것인 동시에 성공과 보신을 이루는 것이 된다.  따라서 노자의 사상은 선교의 홍익인간사사상과 흡사한 점이 많다. 


 노자는 그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신원이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생애는 늙은 노자와 젊은 공자(孔子)와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와 노자가 서쪽으로 사라진 전설에 대한 이야기가 유명하다.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의 노자전(老子傳)에서는“어느 날 초(楚)나라 사람으로 주(周)의 천문(天文)·점성(占星)·성전(聖典)을 전담하는 학자였던 노자와 노나라의 공자가 만났을 때 노자는 공자의 오만과 야망을 질책했고, 공자는 그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에 비유했다고 한다. 그 후 노자는 주가 쇠망해가는 것을 보고는 주를 떠나 진(秦)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다. 관문지기 윤희(尹喜)가 노자에게 책을 하나 써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노자는 5,000언(言)으로 이루어진 상편·하편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것이 도(道)와 덕(德)의 뜻을 말한 도덕경이다. 노자는 그리고 나서 그곳을 훌쩍 떠나 서쪽으로 사라졌고, 그 뒤 아무도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노자는 그 후 노군(老君) 또는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신성화되어 유가에서는 철학자로, 일부 평민들 사이에서는 성인 또는 신(神)으로, 당(唐)에서는 황실의 조상으로 숭배되고 있다. 



4.  석가모니(釋迦牟尼, BC 563? ~ BC 483?)


 석가모니는 불교를 창시한 고대인도(지금의 네팔)의 성자로 본명은 고타마 싯다르타(GautamaSiddhārtha,瞿曇悉達多)이며, 깨달음을 얻어 붓다(Buddha, 佛陀)라 불리게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부처님으로 불러왔다. 

 석가모니는 깨달은 사람이란 뜻의 불타(佛陀, Buddha)외에도 여래(如來), 세존(世尊), 사주(師主) 등의 여러 가지 존호(尊號)가 있다.      


 석가모니는 현재의 네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부근인 히말라야산(山) 기슭의 카필라성(Kapilavastu:迦毘羅城)을 중심으로 있었던 샤키야족(釋迦族)의 작은 나라의 슈도다나(정반)왕과 마야부인을 부모로 하여 태어났다. 

 마야부인은 출산이 가까워짐에 따라 당시의 습속대로 친정에 가서 해산하기 위해 고향으로 가던 도중 룸비니 동산에서 석가를 낳았다. 이는 아소카 왕(阿育王)이 석가모니의 성지를 순례하면서 세운 석주(石柱)가 이곳에서 1,896년에 발견·해독됨으로써 확인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태어났을 때, 히말라야산에서 아시타라는 선인(仙人)이 찾아와 왕자의 상호(相好)를 보고, "집에 있어 왕위를 계승하면 전 세계를 통일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것이며, 만약 출가하면 반드시 불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석가모니는 생후 7일에 어머니 마야부인과 사별하고, 왕족의 교양에 필요한 학문·기예를 배우며 성장하여 당시의 풍습에 따라 16세에 결혼하고 아들도 낳았다. 

 석가모니는 이같이 안락하고 행복한 생활을 보내던 중, 카파라성(城)을 나가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 모습과 동문 밖에서의 늙은이의 모습과 남문 밖에서의 병든 이의 모습과 서문 밖에서의 사자(死者)의 모습과 북문 밖에서 도를 구하는 승려와 사문을 보고 인생의 4고(四苦)와 삶의 밑바닥에 잠겨 있는 괴로움의 문제와 직면하였다. 이에 29세 때 고(苦)의 본질 추구와 해탈(解脫)을 구하고자 처자와 왕자의 지위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를 결심하였는데, 이것을 사문출유(四門出遊) 또는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 하였다.      


 석가모니는 6년간의 고행 끝에 마침내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도(道)를 깨닫고 정각(正覺:abhisambodhi)을 얻어 부처가 되었다. 그 깨달음의 내용이 불교의 중요한 기본 교리가 되는데, 아함경(阿含經)에는 사제(四諦)와 십이인연(十二因緣)과 사선삼명(四禪三明) 으로 설명하고 있다. 

 ① 사제(四諦)는 현상계의 괴로움과 그 원인을 넘어서서 열반에 이르는 고집멸도(苦·集·滅·道)의 4가지 진리에 대한 깨달음의 길을 의미한다. 

 ② 십이인연(十二因緣)은 과거(過去)의 업(業)과 현재(現在)의 과보(果報)와 미래(未來)의 고통(苦痛)으로 이어지는 윤회(輪廻)의 상(相)을 있게 하는 원인이 되는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 생(生)˙노사(老死)의 열두 가지 인연(因緣)을 의미한다. ③ 사선삼명(四禪三明)은 업보와 윤회 및 번뇌를 정확하게 알고 벗어날 수 있는 3가지 지혜인 삼명(三明)과 지혜로부터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사선(四禪)을 의미한다. 

 사선(四禪)에는 초선(初禪)의 과정인 대상을 명료하게 관조하여 탐욕을 떠나는 관선(觀禪)과 제2선(第二禪)의 과정인 청정한 지혜로써 번뇌를 점점 정화시키는 연선(練禪)과 제3선(第三禪)의 과정인 기쁨을 소멸하여 몸과 마음이 평온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성숙하고 걸림 없는 경지의 훈선(熏禪)과 제4선(第四禪)의 과정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소멸되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마음이 평온하여 생각이 모든 경지를 자유자재로 드나드는 수선(修禪)의 4 가지 선정(禪定)이 있다. 

 복잡한 내용이지만 기본적으로 인생의 괴로움과 그 원인이 되는 사제(四諦)와 십이인연(十二因緣)으로부터 삼명(三明)의 지혜를 얻고, 선정(禪定)에 의한 강렬한 마음의 집중으로 인생의 괴로움과 그 원인을 벗어나는 법(法:dharma)을 깨달아 도(道)를 얻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득도(得道)한 석가모니는 녹야원이라는 동산에서 고행을 같이 하였던 다섯 명의 비구 수행자에게 최초의 가르침을 주어 제자로 삼았으며, 이때에 최초의 불교교단(僧伽)이 성립되었다. 그 후 석가모니는 중부 인도 각지를 45년의 세월에 걸쳐 설법과 교화를 계속하였고, 불교는 그의 설법을 통하여 세계에 널리 알려져 제자의 수도 점차 증가하고 각지에 교단이 조직되었다. 

 석가모니는 80세에 이르러 쿠시나가라의 숲에서 열반하였는데, 그의 탄생지인 룸비니 동산과 성도지인 부다가야와 최초의 설법지인 녹야원(사르나트)과 입멸지인 쿠시나가라는 4대 영지(靈地)로서 중요한 순례지가 되고 있다.  석가모니의 유해는 다비(茶毘:화장)되어 그 유골(舍利:śarīra)이 중부 인도의 8 부족에게 분배되어 사리탑에 분장(分藏)되었다.  이 사리탑은 중요한 예배대상으로 되어 후에 불탑신앙으로 발전하였으며, 이곳에 사찰이 들어서 석가모니를 모시는 전각이 세워졌는데 대웅전, 대웅보전이라 한다. 

 부처들은 같은 모습으로 형상화 되지만 손 모양을 다르게 표현하여 부처들을 구분하고 있다.  이러한 손의 모양을 수인(手印)이라고 하여 통인·지권인·합장인·아미타정인·상생인·천지인·구품인·선정인(禪定印)·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전법륜인(轉法輪印)·시무외인·여원인 등으로 각기 구분하고 있으며, 회화나 조각의 소재가 되어 불교미술을 이해를 하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되고 있다. 석가모니불의 경우에는 선정인(禪定印)·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전법륜인(轉法輪印)·시무외인·여원인의 5가지 수인을 주로 취하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은 네팔과 인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전 세계로 퍼져나갔으며, 이는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인 예수의 가르침이 현대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에서부터 시작되어 그리스, 로마를 거쳐 서구 전역으로 전파되어 오늘날 전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에 비할 수 있다. 

 석가모니 사상의 위대함은 지나친 사변적 논리를 떠나 인간 현실에 주목하고 인생의 무상과 고통과 무아(無我)를 이해하려 하였으며, 브라만교의 카스트에 반대한 인간 평등을 주장하며 인류가 혹독한 삶으로 고통 받는 근본 원인을 진단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한 데 있다.    


 불교와 고조선의 신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위 브라만교에 대한 설명에서는 물론 이미 수차 설명하였음으로 생략하겠다. 

 다만 대승(大乘)불교에서는 불타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 가해져 석가모니불은 석가모니보다 2,500여 년인 BC  2,000여 전의 인도라고 하는 특정의 지역·시대에 나타난 응신의 불타로서, 시방삼세제불(十方三世諸佛)의 일부에 해당한다고 해석하고 있으나, 신앙의 입장에서 석가모니불은 위의 모두를 갖추고 있는 분으로 숭배되고 있다. 즉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석가모니불의 원신은 BC 2,000여 전으로 인류 최초의 깨달은 선각자인 단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5) 공자(B.C.551~B.C.479)


 공자(孔子)의 이름은 구(丘)에 자는 중니(仲尼)였으며,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이고 학자였다.

 중국유학의 사실상의 창시자인 공자는 노나라 사람으로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인(仁)을 정치와 윤리의 이상으로 하는 도덕주의를 설파하여 덕치 정치를 강조하였다. 만년에는 교육에 전념하여 3,000여 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시경과 서경 등의 중국 고전을 정리하였다. 


 공자의 인(仁)사상에 대한 언행은 제자들이 엮은 논어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공자는 자신이 주장하는 인(仁)의 의미에 대해 명확하게 정의를 내리고 있지는 않다. 

 대체로 공자가 말한 인(仁)은 공경함ㆍ공손함ㆍ관대함ㆍ신실(信實)ㆍ소박함ㆍ민첩함ㆍ자애로움ㆍ지혜로움ㆍ용기ㆍ충서(忠恕)ㆍ정직ㆍ효성심 등의 내용을 포괄하고 있고, 인(仁)을 달성하는 방법으로 주나라의 예에 따르는 극기복례를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춘추전국시대의 현 시창을 한탄하며, 주나라의 크고 아름다운 기풍을 현실 속에서 되살리기를 평생토록 갈망했다. 그가 노나라의 역사서 춘추에서 주나라의 질서에 어긋나는 예를 뽑아내 지적한 것이 현재 전하는 춘추(春秋)인데, 주나라의 질서로의 회복을 주장하는 이 책의 이름이 춘추시대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로서 확립되었다. 

공자가 주장한 극기복례가 주나라의 봉건제도인지 철학사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인(仁)을 주장한 것으로 볼때 봉건제도가 아닌 철학사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나라에서 있었던 철학사상은 주역과 선교사상이고, 인과 관계있는 철학사상은 주역이 아닌 선교이다. 따라서 공자의 극기복례는 인을 주장한 것으로 주나라 당시 있었던 선교라고 볼 수 있는데,  인(仁)자가 사람인(亻)변으로 사람이 하늘과 땅을 잇는 형상인 것으로 증명된다. 


 공자는 스스로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 하여 자신은 옛날부터 이어져 오던 예악(禮樂) 전통을 정리하고 계승했을 따름이며, 새로운 사상의 창시자가 아니고 옛 성왕(聖王)˙성현(聖賢)의 행적에 깃든 참뜻을 밝혀낸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까지도 널리 회자되는 유명한 술이부작(述而不作)은 "저술한 것이지 창작한 것은 아니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실제로, 흔히 유교 문화로 알려진 것들 중에는 공자 이전부터 있었거나 혹은 나중에 가서야 형성된 관습들이 많으며, 공자의 철학사상을 공가(孔家)가 아닌 유가(儒家)라고 부르는 것도 후대의 학자들이 이런 점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중국역사학계에서도 중국에는 공자이전부터 유학이 존재하였으며, 공자에 와서 유교가 생성되면서 정식적인 학문으로 정착되었다는 것을 정설로 하고 있다.      

 공자 이전에 있었던 중국의 유학에 대해서는 공자가 예악(禮樂) 전통과 옛 성왕(聖王)˙성현(聖賢)의 행적을 참고하였다는 사실 외에는 어떤 것이었는지 밝혀진 바가 없다. 그러나 공자의 진짜 업적이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교육을 민간에 전파했다는 점과 공자의 기본 교육이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의 육예(六藝)라 하여 의례절차와 음악과 무예와 문서작성과 회계처리에 이르기까지 현대 교육학에서 말하는 지덕체 전인교육에 해당했다는 점과 공자의 교육방법이 시(詩)라는 표현 그대로 실제로 리듬을 타면서 노래까지 불렀었다는 점에서는 선교나 선도수련법과 유사한 점이 있다. 

 고운 최치원도 난랑비서에서 "신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그것을 풍류라고 한다. 그 가르침의 근원을 설한 것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나타나 있거니와, 실로 이는 유'불'선 3교(敎)를 다 포함하고 있어서 군생(群生)에 접화(接化)하고 있다. 즉 집에 들어와선 효도하고, 밖으로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공자의 취지이다.”라고 했다.  선사(仙史)는 선도(仙道) 즉 선교(仙敎)의 역사이다. 따라서 한국의 '풍류'라는 전통적인 가르침이 고조선의 선교에서 공자의 유교로 이어져 풍류가 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공자에게는 공자의 사상을 널리 알린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공자의 학문을 좀 더 보편화 시킨 묵자(墨子), 보통 법가로 알려져 있는 상앙(商鞅), 순자의 제자였던 한비자(韓非子)와 이사(李斯), 공자로 하여금 사후에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天喪予, 天喪予!)라고 탄식하며 슬퍼하게 했던 안회(顏回), 공자가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라고 외치며 다음 해에 사망하게 했던 자로(子路), 장사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고 하는 자공(子貢), 공자에게서 우직하지만 아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증자(曾子)가 있었고, 외에도 논어에 수록된 재여(=재아), 자유, 자하, 자장, 민자건(민손), 염백우, 진항(진자금), 중궁, 염유, 담대멸명, 복부제, 원헌, 공야장, 남궁괄, 공석애, 안무요, 상구, 고시, 칠조개, 공백료, 사마경, 번수, 유약, 공서적, 무마시 등 제자들, 논어 외의 기록에 등장하는 공견정, 공량유, 공서여여, 공서잠, 공손룡, 공조구자, 공충, 공하수, 교선, 구정강, 방손, 백건, 보숙승, 상택, 석작촉, 숙중회, 시지상, 신당, 악해, 안고, 안조, 안지복, 안쾌, 안하, 안행, 양사적, 양전, 연급, 염결, 염계, 영기, 원항적, 임부제, 적흑, 정국, 조휼, 좌인영, 진비, 진상, 진염, 진조, 칠조도보, 칠조차, 한보흑, 해용잠, 현성, 후처 등 거의 3,000명에 육박하는 제자가 있다.

 특히 공문십철(孔門十哲) 이라고 하여 덕행(德行)이 뛰어난 안연(顔淵)·민자건(閔子騫)·염백우(冉伯牛)·중궁(仲弓)과 언어에 뛰어난 재아(宰我)·자공(子貢)과 정사(政事)에 밝았던 염유(冉有)·계로(季路), 문학이 뛰어난 자유(子游) ·자하(子夏) 등의 걸출한 10명의 제자가 있었으며, 이들은 여기에 나오는 덕행·언어·정사·문학의 사과(四科)로 나누어 사과십철(四科十哲)이라고도 하였다. 사실 이 사람들이 대륙 곳곳으로 진출해서 상당수의 제자백가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자의 사상은 2천 년 가까운 세월동안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왕조의 국가이념으로 자리 잡으며, 학자들은 공자의 유교를 동아시아 인문주의의 원형으로 보고 있다. 인문주의(人文主義)는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긍정해서 신(神)보다는 인생의 존재 의의를 명확히 하고자 하는 철학사상의 아류이다. 

 공자의 인문주의는 인(仁)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사람에게 인 즉 어진마음이 있다는 전제가 조건이 되는데,  어진마음은 신이 인간에게 준 영성인 홍익인간심으로 비롯된 것으로, 홍익인간심이 없으면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는 물론 인도 없다. 그러나 공자는 어진마음을 빼먹고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에만 몰두함으로써 가부장적인 인문주의관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공자의 인에 대한 판단의 반은 잘못된 것으로, 이것이 유교가 가진 본질적 문제이다. 

 공자의 가부장적인 인문주의 사상은 한국인의 인격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치며 현대에 이르러 한국사회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며, 이러한 유교화된 사상들은 유교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공자의 인(仁)사상은 '친족 중심에서 그 외연을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 여러 문제를 야기시킨다. 특히 혈연, 지연, 학연 중심의 엘리트 사회 구성과 그에 따른 부정부패는 공자 사상의 고질적인 문제로 제기되어 왔으며, 이런 반감으로 인해서 2000년대 초에는‘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나와 센세이션한 흥행을 하기도 하였다. 공자의 경(敬)사상 역시 자신의 나이보다 많거나 비슷한 또래의 제자들과도 잘 어울렸던 공자의 진면목과는 달리 조금이라도 나이가 많거나 직책이 높다면 깍듯이 높임말을 쓰는 상명하복의 예절로 변질되어 유교문화의 잔재로 남아 인문주의를 가로막고 있다. 

 공자의 사상 중 일부는 현대의 시각에서 바라 볼 때 인문주의가 지향하는 법치주의와 평등주의 사상에 반대되는 부분이 있어서 꾸준히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논어에서 공자가 "오직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 어려우니, 가까이 하면 겸손하지 않고, 멀리 하면 원망하느니라." 라고 말한 부분과 공자가어의 '삼종지도와 칠거지악' 부분 등은 여자를 매우 수동적인 존재로 묘사했기 때문에 평등주의적 관점에서 비판을 받았으며, 효(孝)와 시스템 중 무엇을 우선하냐는 문제에 있어 논어에서 " 아비는 자식을 위하여 숨기고, 자식은 아비를 위하여 숨기니, 진실로 곧음이란 그 가운데 있다' "라고 말한 부분은 우리나라 현행법에 '효'의 개념으로 일부 반영되어 법치주의 적 문제에 있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   



(6) 맹자(BC 372년? ~ BC 289년?)


 맹자(孟子)는 전국시대의 철학자˙정치사상가로 본명은 맹가(孟軻)이다. 맹자는 의(義)를 강조하여 인(仁)의 위치에 같이 놓으며 공자의 사상을 보충하고 발전시켰다. 주자는 그를 진(秦)나라 이전 유학의 마지막 적통으로 평가했는데, 그 영향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흔히 공자와 묶여 공맹(孔孟)으로 언급되어 유교의 대표 인사로 꼽히고 있다. 

 

  맹자는 공자가 사망하고 백여 년 후 산둥성 쩌우청에서 태어나 편모가정에서 자랐다. 

 맹가의 어머니 장씨는 아들을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이사를 세 번 했다는 바로 그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와 짜고 있던 베를 잘라서 아들이 학문을 중도에 그만둔 것을 훈계했다는 맹모단기지교(孟母斷機之敎)로 유명한 현모였고, 맹자는 이런 어머니에게 큰 영향을 받아 학교 수업을 마친 뒤 공자의 고향 노나라로 가서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의 문인에게서 공자가 편찬한 육경을 배웠다. 편모가정임에도 자식 교육을 위해서 노력하는 훌륭한 어머니와 좋은 환경 덕분에 그의 재능이 썩지 않을 수 있었으니 축복받은 어린 시절이라고 할 수 있다. 

 장성한 맹자는 삼한춘추전국시대의 갈등과 전쟁으로 인한 탐욕, 의심, 모략, 살육에 단호한 반대의 입장을 보였던 묵자(墨子)와 이기적인 쾌락설을 주장하였던 양주(楊朱)의 사상과 경쟁하여 유가사상을 확립했다. 40세 이후에 인정과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주창하며 천하를 유력하다가, 법가나 종횡가가 득세하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은퇴했다. 맹가의 60세 이후의 삶은 알려져 있지 않다. 

     

 맹자의 핵심사상은 공자의 인(仁)를 바탕으로 자신의 의(義)를 주장하여 백성들이 왕의 권력을 부여한다는 민본사상(民本思想)과 왕의 통치권력 보다 정치도의를 중시하는 왕도정치사상(王道政治思想)을 펼쳤다. 그리고 맹자는 성선설(性善說)과 호연지기(浩然之氣)라는 고사성어를 통하여 민중과 왕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며 이런 사상들을 뒷받침하였다. 

 맹자는 성선설을 바탕으로 양혜왕에게 "왕은 하필 이로움을 말하십니까? 다만 인의(仁義)만이 있을 뿐입니다."고 하여 인의정치를 주장하였으며, 인의를 바탕으로 백성의 안정과 인간다운 삶을 최우선으로 하고, 그 목적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힘에 의한 강제적 해결이 아닌, 통치자의 인격과 덕의 감화에 의한 해결이어야 한다는 왕도정치론을 펼쳤다. 


 군주의 권위의 정당성이 백성에게 있다는 맹자의 왕도정치론은 역성혁명론으로 까지 발전하였다. 

 역성혁명론은 제나라의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한 “은의 탕(湯)왕이 하의 걸(桀) 왕을 몰아내고, 주의 무왕이 은의 주(紂)왕을 몰아낸 신하의 불의”에 대한 답변에서 “인(仁)을 해치는 자를 '해롭다'라 말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인하다'라 말하는데, 이 경우 임금이 아닌 잔인하고 해로운 일개 보통사람(一夫)를 죽인 것에 불과하다.”고 왕위찬탈의 정당성을 부여한 데서 기인하였다.     

 맹자는 이어서 백성들이 역성혁명을 통하여 인과 의를 지키는 민본사상을 호연지기(浩然之氣)로 설명하였다. 호연지기는 “자신의 마음에 떳떳해서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의롭다고 생각되면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떳떳하고 넓고 당당한 기운”을 의미한다. 부끄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찌 당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맹자의 역성혁명을 통한 민본사상의 정당성은 이처럼 부끄러움 없이 당당한 호연지기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2세기부터 맹자를 공부하는 박사 직위가 있었으므로, 오래 전부터 맹자의 민본사상이 가치를 인정받은 듯하다. 

 맹자의 민본사상이 중요한 까닭은, 민(民)과 천(天)을 동일시하면서 국가의 정통성에 있어서 "민심"을 중시하도록 만들어 놓은 데 있다. “민심을 따르지 않으면 권력자가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은 고조선의 홍익인간사상을 제외하면 민주주의가 대세가 되기 이전에는 찾아보기가 어려운 사상이다. 이후 이러한 맹자의 민본주의는 동아시아 근현대 민주주의 발전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맹자는 왕 앞에서 대놓고 “잘못된 왕은 갈아엎어야 한다, 백성을 착취하는 왕과 관료들은 도둑놈이다.” 라는 말을 서슴없이 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모든 정치권력과 종교 권력의 권위를 마냥 인정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면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단순히 이해득실을 따지는 공리주의가 아니라, 군주의 권위의 정당성이 어디까지나 백성에게 있다는 말이다. 유교적 민본주의(民本主義)를 설명할 때 가장 자주 인용되는 대목이다. 

 맹자가 굉장히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좋은 것을 독점하지 말고 최대한 많은 백성들과 함께 하라"는 것이었다. 특히 천(天)을 백성과 동일시하여 천명(天命)의 개념을 인문주의적으로 뿌리박았고, 천명이 바뀌는 혁(革)의 기준을 민심으로 규정하여서 민본(民本)의 개념을 정치의 축으로 세웠다. 또한 이런 백성을 위한 정책도 말하였는데, 맹자는 정전제를 통하여 어떻게 민생을 구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지에 대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국에서 맹자는 유교를 특히 두드러지게 공맹(孔孟)의 가르침이라고 칭할 정도로 공자와 함께 중요한 인물이다. 

 사실 맹자의 인(仁)사상은 공자의 인사상과 함께 선교의 홍익인간정치사상과 일치하는 면이 있어 예로부터 한국인의 정서와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15대 대통령이었던 김대중 또한 맹자의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아시아도 민주주의를 실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역사 순으로 보면 홍익인간정치사상이 맹자의 인사상에 앞서기 때문에 맹자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한국의 민족주의자들 가운데 고조선의 홍익인간사상에서 공맹의 근원을 찾는 합리적 이유이다. 

 고려 말 정치가 정도전이 정몽주가 선물한 맹자를 탐독하며 역성혁명의 꿈을 키웠고, 맹자의 왕도정치론을 바탕으로 신진 무장 이성계와 손잡고 역성혁명을 일으켜 고려를 잇는 새 왕조 조선을 건국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지으면서 조선 체계 구성의 곳곳에 맹자의 사상을 배치하였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는 실제적으로도 이후 강화된 언론기관과 함께 조선을 움직이는 이념으로 작동하였다. 특히 맹자의 이념으로 무장한 사림 세력은 개국 공신인 훈구파들을 몰아내며 이 사상을 더욱더 강화하였으며, 특히 언론을 개방해 임금과 신하간의 소통을 원만하게 하기위해 설치한 사헌부˙홍문관˙사간원은 임금을 견제하는 기능을 발휘하여 신하들의 힘이 크게 되는데 일조하였다. 조선이 동시대의 명나라, 청나라와는 다르게 신하의 권력이 컸었던 것에는 정도전이 맹자의 역성혁명론을 충실히 조선건국에 반영했기 때문이다. 조선이 유독 의로움을 강조했었던 것도 정도전의 영향이자 맹자의 공로라고 볼 수 있다. 정도전의 사상은 역사가들에 의해 맹자를 추구하던 훈구파들과 함께 민본으로 해석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선교의 홍익인간정치사상에서는 백성으로부터 권력의 출발이 시작되는 민주의 개념이 중심이 된다. 반대로 맹자의 민본주의는 백성이 아닌 왕으로부터 권력의 출발이 시작되는데, 이것이 맹자의 민본주의의 한계이다. 세조를 도왔던 훈구파와 향촌에서 학문을 연구한 사림파로 나뉘어 대립하였던 조선 초기 정계의 두 지배 세력간의 갈등을 통하여서도 이런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정말 백성이 주인인 나라에서는 정계의 세력이 왕이 아닌 백성의 눈치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정도전의 민본사상은 맹자의 민본사상과 달랐을 수도 있다. 역사에서 정도전이 고려말 우왕 때 유배생활을 하던 중 유배된 부락의 천인들과의 정서적 교류를 통하여 유교로 부로(父老)를 훈시하던 오만함을 버리고, 그들의 지식과 지혜에 대한 파악과 이해를 거치면서 백성을 중시하며 실용을 중시하는 사고관으로 크게 바뀌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1398년에 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에 의해 살해당해 역사의 뒤로 사라졌으며, 정도전이 이처럼 그 뜻을 펼치지 못하였기에 정도전의 사상이 맹자의 민본이었는지 홍익인간정치사상의 민주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전술했던 유배생활 당시의 행적으로 보아 정도전의 민본사상은 맹자의 민본사상이 아닌 민주사상에 더 가깝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흐름은 조선후기와 근 현대에 들어서도 계속된다. 


 동학에서도 인내천(人乃天) 또는 사인여천(思人如天)이라 하여 민주를 주장했으며,  일제 감정기에는 맹자가 강조했던 "의로움(義)"을 내세워 '의병(義兵)'과 '의사(義士)'들이 곳곳에서 일어났는데, 이것은 민본이 아닌 민주 사상이다. 우리나라에는 동학농민운동과 삼일운동˙2.28 학생운동˙4.19 혁명˙5.18 민주화 운동˙촛불운동 등 유독 잘못된 것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뒤엎어 버리는 민주 혁명들이 많이 있다. 혹자들은 이러한 혁명들이 유교적 의로움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하여, 맹자의 뜻(義)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했던 정도전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사회지도계층에 의한 혁명이 아닌 이런 순수한 민중혁명은 유교사상보다는, 정도전을 위시한 우리 국민성 속에 민족성으로 내재되어 있는 선교의 홍익인간정치사상에 따른 민주의식의 영향이 더 크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실제로 동학농민운동과 삼일운동을 추진하였던 추체는 선교의 홍익인간정치사상을 이어받은 동학교와 천도교였다. 



(7) 장자(BC 369년 ~ BC 289년경)


 장자(莊子)는 전국시대 말기 송(宋)나라 몽(蒙)출신으로 본명은 장주(莊周)이고 자는 자휴(子休)이며, 제자백가 중 도가(道家)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맹자와 동시대에 살았다고 전해진다.   

   

 흔히 노자와 장자를 묶어 노장(老莊) 사상이라고 부르지만,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노자가 정치와 사회의 현실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데 대해, 장자는 개인의 안심입명(安心立命)에만 몰두했다. 노자가 혼란한 세상을 구하기 위해 무위자연에 처할 것을 가르쳤던 반면, 장자는 속세를 초탈하여 유유자적하고자 했다. 노자의 사상이 정치술에 가까운 반면, 장자의 사상은 정치를 떠나 세속을 초탈한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이다. 

 두 사람의 작품에 있어서도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이 깊은 사색을 필요로 하는 철학적 작품인 데 비해, 장자의 남화경(南華經)은 읽는 사람을 도취의 망아(忘我) 상태로 빠져들게 하는 문학적 작품이다.      

 장자는 철학자임과 동시에 탁월한 산문가로서, 일천여 년 동안 그의 문학을 모방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의 문장은 모두 우화(寓話) 형식으로 되어 있고 내용도 대부분 허구적이기는 하지만, 이솝 우화처럼 재미와 함께 무궁무진한 의미가 들어 있다. 


 장자의 사상을 요약하자면 '상대주의' 또는 '관점주의(perspectivism)'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의견은 결국 각자의 견지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이른바 보편타당한 객관적 기준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장자는 조삼모사(朝三暮四)˙무용지용(無用之用)˙포정해우(庖丁解牛) 등의 일화를 통하여 깨치지 못한 인간들이 사물의 양면을 보지 못함과 궁극적인 실재가 하나임을 모르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장자에 의하면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삼라만상은 모두 도(道)가 나타난 것에 다름 아니다. 도 밖에 만유(萬有, 만물)가 없고, 만유 외에 도가 없다. 만물은 도가 밖으로 나타난 것이므로, 도는 만물을 생성하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만물은 도에서 생겨나고, 다시 도로 돌아간다. 도는 절대 무차별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스스로 근본이 된다. 도는 모든 것을 보내고 맞아들이며, 모든 것을 파괴하고 건설한다. 그러므로 진정 도를 깨닫는 사람은 삶을 기뻐하거나 죽음을 싫어하지 않으며, 작은 것을 탓하거나 성공을 과시하지도 않고, 억지로 일을 꾸미지도 않는다. 물고기가 물속에 있을 때 아무런 저항 없이 편안하게 살아가듯이, 사람 역시 도 가운데 행할 때 아무런 문제없이 스스로 유유자적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설명한다.  


 장자의 도(道) 사상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사물이 서로 얽히고 뭉쳐서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고 하는 만물일체론(萬物一體論)으로 이어진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물은 전체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어떠한 개별적 변화도 전체 질서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가령 한쪽의 완성은 다른 쪽의 파멸을 뜻하므로, 전체 질서에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인간이 인식하는 차별이나 변화는 결국 인간의 유한한 지식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지식의 한계를 깨닫고 쓸데없는 시비(是非)를 버려야 한다.      

 장자의 사상은 유명한 호접지몽(胡蝶之夢)의 예화를 통해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어느 날, 장자가 꿈을 꾸었다. 그런데 스스로 나비가 되어 이 꽃 저 꽃을 다니며 노닐다가, 자신이 장자라는 사실도 잊고 말았다. 

 꿈에서 깨어난 장자는 “과연 내가 꿈속에서 나비로 변한 것을 보았는가? 아니면 나비가 꿈을 꾸면서 나로 변한 것을 보고 있는가?”하는 묘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말은 자신이 인간으로서 꿈을 꾸다가 나비로 둔갑했는지, 아니면 원래 나비였던 자신이 인간 장자로 변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봤을 때, 장자와 나비는 원래 구별이 있다. 장자는 인간이고 나비는 곤충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인지 둘이 함께 융화되어 누가 누구인지 구별할 수조차 없게 되는데 이러한 경지를 우리는 물화(物化)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물화 이후의 장자는 천지와 한 몸이 되어, 무소부재(無所不在)의 정신으로 변해버린다. 

 그는 이제 조물주와 함께 거닐다가 세속에 돌아오기도 하고, 이리저리 흘러 다니면서 풍운조화(風雲造化)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한 그에게, 과연 인간세계의 영고성쇠(榮枯盛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세속을 초탈해버린 최고조의 경지에서 봤을 때 잠시 잠깐 출세를 하면 무엇 하며, 돈을 번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것은 비관과 낙관을 한꺼번에 융화시킨, 일종의 달관주의(達觀主義)이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 진인(眞人)은 삶을 기뻐하지도 않고, 죽음을 미워하지도 않는다. 태어남을 기뻐하지도 않고, 죽음을 거역하지도 않는다. 그저 무심히 자연을 따라가고, 무심히 자연을 따라올 뿐이다.      


 장자는 대붕(大鵬)의 우화를 들어 세속적 삶의 덧없음을 설명한다. 

 옛날 북쪽 바다에 곤(鯤)이라고 하는 커다란 물고기가 살고 있었는데, 나중에 대붕으로 변했다. 그 새는 등 넓이가 몇 천리에 이를 만큼 엄청나게 큰데, 구만 리나 되는 높은 공중에 치솟아 오르며 삼천리나 되는 파도를 일으키면서 남쪽의 천지를 향해 곧장 날아갔다. 

 이때 땅에서 매미와 비둘기가 그를 비웃으며 말하기를, “우리는 기껏 느릅나무나 다목에 올라 머물기 때문에, 잘못되어 봐야 땅바닥에 동댕이쳐지는 일이 고작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구만 리나 솟아 올라가 그 먼 길을 가려 할까?” 했다. 

 이에 대해 장자는 “우리가 교외로 나갈 때 가까운 곳으로 가는 사람은 세끼의 식사 준비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백 리 길을 가는 사람은 하룻밤을 꼬박 걸려 곡식을 찧어 준비해야 하고, 천 리 길을 가는 사람은 석 달 동안이나 식량을 모아야 한다. 그런즉 이 조그만 날짐승들이 어찌 대붕의 큰 뜻을 알 수 있겠는가? 아침에 돋아나 저녁에 스러지는 버섯은 새벽과 심야의 경치를 모르기 마련이고, 봄에 나서 여름에 죽는 매미는 초봄과 늦가을의 풍경을 모를 수밖에 없다. 옛날에 대춘(大椿)이라 불린 나무는 팔천 년 동안은 봄이고, 다시 팔천 년 동안은 가을일만큼 오래 살았다. 그런데 불과 팔백 년을 산 팽조(彭祖)를 두고 사람들은 오래 살았다고 하니, 이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하늘을 솟구치며 날아가는 그 대붕은 어쩌면 장자 자신을 일컬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초인적인 지혜와 안목과 기백을 어찌 세속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이처럼 장자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훨훨 날아서 자신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잠잠히 머물고, 기분이 좋을 때는 몇 마디 조롱하며 웃어버린다. 

 유가에서는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이 나와 인의도덕의 정치를 해주기를 바랐고, 노자는 무위자연의 정치를 기대했다. 하지만 장자는 이 모든 것들을 초월한 신인(神人)의 경지를 말했다. “신인은 그 몸의 먼지나 때, 쭉정이나 겨만 가지고서도 요순과 같은 성인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거늘, 무엇 때문에 하찮은 천하 따위를 위해 고생하려 하겠는가?”이러한 말을 통해, 우리는 노자를 능가하는 장자의 초월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이제 장자의 윤리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① 장자는 유가(儒家)의 인위적인 도덕을 비판하고 나선다. 

 장자는 공자가 초나라에 갔을 때 광접여(狂接與)라는 사람이 불렀다는 “말지어다, 말지어다. 도덕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은. 위태로운지고, 위태로운지고. 땅에 금 긋고 달리는 것은.”(已乎已乎 臨人以德 殆乎殆乎 畵地而趨)“이라는 노래를 인용하며 시대에 따라, 나라에 따라 많은 도덕과 윤리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도덕을 사람에게 강요하고 주입시키는 것은 마치 땅에 금을 그어놓고 달리게 하는 일처럼 위험하고 답답한 일이다. 한때 가장 선(善)이라 여기던 것들이 세월에 따라 박물관의 박제처럼 변하기도 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유가의 도덕을 비판한 장자의 철학을 배우는 것이다. 장자의 이런 도덕관은 그 때의 상황에서 최선을 찾는 홍익인간사상과 유사하다.      


 ② 장자는 생명 존중의 윤리를 주장한다. 

 백이(伯夷)는 대의명분과 자신의 명예를 위해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고, 도척(盜跖)이란 자는 자신의 이익과 욕망을 좇아 살다가 동릉산 위에서 처형을 당했다. 

 이 두 사람은 비록 죽은 원인이 서로 다르지만, 목숨을 해치고 타고난 본성을 상하게 한 점에서는 같다. 그런데 어찌 백이만 옳고 도척을 잘못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는 마치 책을 읽는 바람에 양을 잃어버린 남자 종이, 노름을 하다가 양을 잃어버린 여자 종보다 결코 낫지 않음과 마찬가지다. 비록 두 사람이 한 짓은 다르지만 양을 잃어버렸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오늘날에 빗대어 말하자면, 국가 민족을 위하는 충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애국지사나 변심한 애인 때문에 한강에 뛰어든 청년이나 별반 다르지 않으며, 군대를 가지 않기 위해 손가락을 자르는 짓이나 독도 수호를 외치며 행하는 단지(斷指)나 똑같다는 뜻이다. 물론 그 의미를 따지자면 비교할 수조차 없겠지만, 결국 장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생명을 지키고 몸을 보존하는 일보다 더 위대한 도덕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선교의 홍익인간사상에 의하면 생명 자체보다는 그 존재의 의미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니, 선교사상이 장자의 생명 존중 윤리보다 한 수 위라 할 것이다. 

    

 ③ 장자는 본성에 따라 사는 분수의 윤리를 주장한다.

 즉 일부러 천성을 망쳐서는 결코 안 되며, 사람이 자신의 명성 때문에 본래부터 타고난 덕을 희생시켜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참으로 현명한 사람이라면 다섯 발가락 중에 두 개가 서로 붙어 있어서 네 발가락이어도 장애자라 생각하지 않고, 손가락에 하나가 더 있다 할지라도 육손이라 여기지 않는다. 길다고 그것을 여분(餘分)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짧다고 그것을 흉으로 여기지 않는다. 장자는 이것을 물오리와 학의 다리로 비유하였다.“물오리는 비록 다리가 짧지만 그것을 이어주면 도리어 괴로워하고, 학의 다리는 길지만 그것을 잘라주면 오히려 슬퍼한다.”(鳧脛雖短 續之則憂 鶴脛雖長 斷之則悲) 본래부터 긴 것을 잘라서도 안 되지만, 본래부터 짧은 것을 이어주어도 안 된다. 태어난 대로, 생긴 대로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뜻이다. 

 장자에 의하면 하늘로부터 타고난 자연은 모든 사물 안에 깃들어 있으나, 사람이 억지로 꾸미는 일은 겉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맹자는 모든 인위적인 것을 거부한다. 가령, 소와 말에게 각기 네 개의 발이 있는 것은 자연의 섭리에 해당하고, 그 말머리에 고삐를 달고 쇠코에 구멍을 뚫는 일은 사람이 만들어낸 일이다. 


 장자는 우리가 자연적인 본분을 잃었을 때 고통과 비극이 찾아온다고 하며 이런 비유를 하였다. 옛날, 바닷새가 날아와 노나라 수도 근교에 멈췄다. 어느 제후가 이 새를 맞이하여 종묘(宗廟)안에서 술을 마시게 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게 하며, 고기 음식을 갖춰 극진히 대접했다. 그러나 이 새는 그만 눈이 아찔해져서 어찌할 줄 모르다가 걱정하고 슬퍼하면서 한 잔의 술도 마시지 않았고, 한 조각의 고기도 먹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불과 사흘 만에 그만 죽고 말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것은 제후가 자기 자신을 보양(保養)하던 방법으로 새를 돌봤을 뿐, 그 새 본래의 방법으로 보양하지 않았던 탓이다. 물고기는 물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지만, 사람은 물속에만 있으면 죽고 만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타고난 능력과 바탕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도 능력과 취미가 서로 다르다. 공부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 있고, 운동이나 예술에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다. 장자는 인간이 자기 본성과 능력에 따라 분수를 지켜나갈 때, 진정 평안하고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선교의 홍익인간사상에 의하면 힘들더라도 자신의 본성과 능력을 신성을 찾는데 사용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생긴대로 평안하고 자유롭게 사는 삶을 추구하는 장자의 윤리보다 홍익인간사상이 한 수 위라 할 것이다.


 20세기 한국에서 장자는 그동안 이데올로기화된 강력한 권위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과 해방의 철학, 자유와 평등의 옹호자, 미신적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난 합리적 자연관의 대명사로서 커다란 가치를 부여받았다. 우리의 기억 속에 아로 새겨진 장자는 무엇보다 기독교 밖의 기독교였던 다석(多夕) 유영모와 씨알사상의 함석헌의 이야기가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함석헌의 장자 해석은 박정희 정권의 서슬 퍼런 유신 체제 아래에서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 제발 건드리지 말라!"는 비판과 자유를 향한 외침을 준 자유와 해방의 철학이었고, 독재와 참혹한 현실에 찌든 사람에게는 마음의 위안이자 지혜의 보고가 되었다. 

 사실 장자의 사상에서 장자는 역사는 물론 자신이 속한 국가나 지역사회나 심지어는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도 초연하며, 유유자적하고 달관적인 삶을 사는 것을 도라고 정의하고 있다. 장자의 회피는 더러운 권력에 대한 조소보다는, 약자와 강자 모두에게 현실에 대한 달관을 통하여 새로운 비전을 주려한 것이었을 런지도 모른다.  

 20세기 한국 사회에서의 장자의 해석은 역사적이었지만, 정치적으로 해석될 때는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장자의 달관주의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인데, 역으로 정치란 것은 원래 국가나 사회 또는 자기가족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자의  지나치게 상대주의적이고 관점주의적인 사고는 듣기에는 솔깃하고 흥미진진하지만, 정치적으로 사용될 때는 자기 주장에 치우치는 오류를 벗어날 수 없다. 

 한민족의 고유정신인 선교의 홍익인간이란 개념은 같은 사안이나 인물에 대하여 인정할 것은 받아들이고, 틀린것은 비판하는 복합적이고 실질적이고 관심어린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박정희는 서슬 시퍼런 독재정치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반면 기아에 세달리던 대한민국을 경제대국으로 이끈 주역이기도 히였다. 일제에 항거하였던 수많은 독립투사들도 한편으로는 애국자이지만, 한편으로는 살인자라 할 수도 있다. 세상 일이란 이처럼 정치적으로 보면 입장에 따라 판단이 뒤바뀌는 것으로, 상대적이고 관념적이고 달관적인 태도로 판단하여서는 안됀다.  인간이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는 살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현실을 무시한 것이 맹자의 사상의 한계일런지도 모른다. 




(9) 순자(B.C.298년? ~ B.C. 238년?)


 순자(荀子)의 이름은 황(況)이고 경칭으로는 순경(荀卿) 또는 손경자(孫卿子)로도 불리었던 전국시대(戰國時代) 후기의 철학자였다. 

 공자의 인(仁)사상을 뼈대로 하여 예(禮)와 의(義)를 외재적인 규정이라 하였고, 그것에 의한 인간 규제를 중시하는 예치주의를 강조하며 성악설(性惡說)을 주창하였다. 후에 한비자 등이 계승하여 법가(法家) 사상을 낳았다.      


 성악설을 바탕으로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한 순자의 사상은 권학편(勸學篇)에 나오는 청출어람이라는 사자성어에 집약되어 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은 면학을 계속하면 스승을 능가하는 학문의 깊이를 가진 제자도 나타날 수 있다는 의미이며, 푸른색이 쪽에서 나왔으나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학문이란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므로 중도에 그쳐서는 안 되며(學不可以已), 푸른색이 쪽빛보다 푸르듯이(靑取之於藍而靑於藍) 얼음이 물보다 차듯이(氷水爲之而寒於水)”에서 유래한 고사성어다. 순자는 이러한 재주 있는 사람을 '출람지재(出藍之才)'라고 하였는데, 비록 제자일지라도 열심히 하면 얼마든지 스승을 능가할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예를 들었다. 

 북조(北朝) 북위(北魏)의 이밀(李謐)은 어려서 공번(孔璠)을 스승으로 삼아 학문을 하였다. 그는 학문의 발전 속도가 매우 빨라 열심히 노력한 결과 몇 년이 지나자 스승의 학문을 능가하게 되었다. 공번은 이제 그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도리어 그를 스승으로 삼기를 청했다. 그러자, 친구들은 그의 용기를 높이 사고 또 훌륭한 제자를 두었다는 뜻에서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칭찬했다.      


 순자는 맹자와 공자의 제자로 공문10철의 사람이었던 자하를 비판하고 공자의 본래 뜻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사실 순자의 예(禮)는 공자보다 법적인 부분이 강하고 인식론상으로는 도가의 영향이 농후하였다. 하지만 동일한 이유로 제자백가의 여러 학설들을 비판적으로 계승했다고 평가를 받아서 선진(先秦)사상의 집대성자라 칭하기도 한다. 

 순자는 이후 한-당나라 시대 때 정통 유학자로 인정받으며 일정한 영향을 미쳐 왔으나, 당나라 말의 대유학자 한유(韓愈)가 순자의 학설에 결함이 있다고 말한 이후로 성리학에서까지 부정되어 왔으며, 청나라에 이르러 다시 재조명 받기도 했다.      

 순자의 사상은 공자(孔子)의 사상을 뼈대로 하였기에 인(仁)으로 백성을 감화시키면서도, 예(禮)에 따라 사회적 직분을 구분하여 다스릴 것을 강조하였다. 그의 왕도정치에서 주장한 예치(禮治)에 따르면, 왕(군자)은 어진 마음(仁)으로써 백성들을 살피고 예(禮)라는 사회질서를 통해 귀천을 나누어 능력 있는 자를 등용한다면 천자의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제자인 한비자와 이사 등은 왕이 굳이 어진(仁) 행동을 하지 않아도 능력 있는 신하를 등용해 엄격히 법을 집행하면 백성들이 따라와 부국강병 해진다는 패도정치를 주장하였으며, 왕도정치는 가식적이며 여유 있는 시대에서나 사용가능한 방법이라고 비판하게 되므로 따로 법가를 만들게 된다. 순자는 왕도를 최고로 보고 왕도를 행해야 한다고 말했으나, 그의 제자 한비자, 이사 등은 패도를 주장하고 왕도를 비판하여 법가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이 순자와 법가의 차이점이다.      


 순자는 또 법이라는 시스템보다 그 시스템을 굴리는 사람의 중요성에 대해 매우 강조하였는데, 법가 역시 시스템 보다는 그 시스템을 굴리는 사람이 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맹자의 성선설에 비판을 가하며 인간의 성(性)이 추악하다는 성악설(性惡說)을 말하고, 본성으로부터의 선이 아닌 후천적인 교육과 학문으로부터의 선이 유학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며, 진실됨과 태도를 성(誠)이라 하여 배움을 강조하였다. 

 반면, 순자와는 달리 맹자는 성(性)을 선(善)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학문이나 교육을 성(性)의 연장선으로 보았다. 순자의 저술이라 전해지는 서적인 순자를 보면 "맹자는 '사람이 학문을 하는 것은 그 성(性)이 선(善)하기 때문이다' 했으나, 나는 '그렇지가 않다' 하겠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즉 사람은 천성이 악(惡)하기 때문에 학문을 통하여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론은 인간의 본성은 배고프면 먹으려고 하고, 힘들면 쉬려고 하고, 추우면 따뜻해지려고 하는 것이므로 배고파도 가족과 나누어 먹고, 힘들어도 꾹 참고 일하는 등의 행위는 인위적인 결과이지 자연적인 본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의 세계에서는 상관없지만, 문명의 세계에서는 그러한 본성으로 살아서는 안 되는데, 낙후된 환경 속에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인위적 윤리를 얻지 못하고 혐오스러운 본성에 따라 사는 바람에 춘추 전국 시대와 같은 난세가 왔다는 것이다. 맹자는 '인의(仁義)란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양능(良能:인간이 선천적으로 지니는 도덕적 실천 능력)'이라 보았지만, 순자는 배워야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는 데서 차이가 있다. 

 순자와는 달리 맹자는 선한 행위란 단순히 그 '선함'을 배운다고 행하는 것은 아니며, 사람의 선한 행위는 사람의 감정에서 출발해야 보다 더 자발적이게 되고 그 동기가 더욱 강해진다고 보았다. 하지만 순자가 볼 때에는 젖먹이 아이가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은 다만 동물적 가족애일 뿐 인(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으며, 장성하여 형을 존경하는 것은 분명 의(義)이지만 그것도 자연적인 순종성의 발로가 아니라, 장성하는 과정 중에 이미 가정교육을 거쳤으므로 도출된 인위의 결과이다. 즉, 순자가 주장하는 것은 선(善)이란 배우지 않으면 할 수 없고, 배워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떄문에 맹자의 성선설은 배울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 처한 백성이라도 자신의 타고난 선한 본성을 갈고 닦으면 선함을 이룰 수 있다는 데서 희망을 주며, 순자의 성악설은 그 본성이 나쁜 군주나 정치인이라도 교육을 통해 인위적으로 배운다면 선함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는 데서 그 의의가 있다.    

  

 현대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남을 도우려는 선한 행동을 이끌어내는 강력한 요인인 공감 능력은 타고나는 것으로써 우리가 남을 돕는 것 역시 본능이라는 것이 사실로 밝혀졌다. 진화생물학적인 측면에서도 '공감을 잘하고 남을 잘 돕는 자'가 공동체 내에서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더 많이 살아남고 선택되었다는 것이 주된 이론이며, 뇌 과학에서도 공감능력을 담당하는 뉴런다발이 발견되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선한 본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감 능력이 대다수의 인간 개체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결과적으로'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점이 주목할 점이다. 즉 공감 능력이 대다수의 인간 개체에 존재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생존을 위해 자신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 즉 '이기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공감능력이 선한 행동을 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임은 맞지만, 공감능력이 곧 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악행을 저지르는 범죄자들에게서도 공감능력은 발견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인간에겐 공감 능력도 존재하지만, 자신의 생존을 위하려는 이기적 본성 역시 존재하며, 그러한 본성의 발현으로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면 때로는 서슴없이 악행을 행하기도 하며, 이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범죄의 원인에 대한 설명이 되기도 한다. 즉 순자의 사람의 본성 악하기에 본능적으로 이로움을 추구한다는 선악설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뇌 과학에서도 대부분의 인간이 CT상에서 공감 뉴런 다발을 지니고 있었지만, 약 10%에서는 뉴런의 활동이 적게 발견되는데 이를 사이코패스라고 부르며, 사이코패스의 존재만 본다면 순자의 생각은 더더욱 호소력을 갖는다. 선함을 타고 나지 않는다는 순자의 주장에는 결함이 분명히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 능력을 타고 난다고 해서 그들의 본성이 선하다고 간단하게 결론짓는 것 역시 부족한 결론이다. 따라서 순자의 견해와 맹자의 견해는 모두 일리가 있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한데, 이것은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의미가 되어 둘 다 틀린다는 해석도 된다. 이것은 선교의 홍익인간사상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홍익인간사상에 의하면 인간은 선천적인 신이 준 공감능력에 의한 선한 영성(神性)과 함께 후천적인 지식과 지혜에 의해 쌓인 악업이 이기적 본능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태어날 때에는 자신이 만든 인과에 따라 악한 성품과 선한 성품의 비율이 결정된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배움과 실천에 따라 얼마던지 그 비율이 달라질 수 있다. 때문에 인간에게는 산괴 악이 공존하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결과인 것이다.  


    

(10) 한비자(BC 280?~233?)


  한비자(韓非子)는 본명이 한비(韓非)로서 전국시대 말기 한(韓)나라에서 한왕(韓王) 안(安)의 서자, 즉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났다. 전국시대의 철학자로서 법치주의를 주장하여 법가를 집대성한 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순자(荀子)에게 배운 중국 고대의 이름난 사상가이자 법가 학파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비자는 젊어서 진(秦)의 이사(李斯)와 함께 순자(荀子)의 밑에서 동문수학했는데, 법가뿐만 아니라 도가·유가·묵가 등 여러 학문을 두루 섭렵하고 법에 의한 부국강병의 논리를 정립했다. 그는 겉보기엔 냉철하고 달변가처럼 보이지만 언변이 뛰어난 이사와는 대조적으로 말더듬이였다고 한다. 허나 이사가 학문에 있어서 한비자에 미치지 못하여, 한비자는 늘 시기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한나라는 전국칠웅 중에서도 문화가 떨어지고 당시에는 세가 기우는 형국이어서 한비자는 이를 걱정하여 한왕에게 부국강병의 계책을 간하였으나 별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한왕이 권력을 가지고도 신하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고, 재능 있는 인재를 기용하여 국가를 강성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이에 울분을 품고 고분(孤憤)˙오두(五蠹)˙내외저(內外儲)˙설림(說林)˙세난(說難) 등의 십만여 자에 이르는 저작을 써서 역사상 득실의 변화를 종합했다.      


 한비자는 진나라의 재상이 된 이사의 간언에 의한 한나라와 진나라의 전쟁으로 한나라가 망한 후, 진시황의 책사가 되었다가 그를 시기한 이사와 요가(姚賈)의 모함으로 투옥되었는데, 이어 이사는 다시 한비자에게 독약을 주어 자살케 하였다.    

 얼마 뒤 진왕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면서 한비자를 사면하려 했으나, 한비자의 자살 소식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진왕은 법·술·세를 결합한 한비자의 정치모략을 모두 접수했고, 실질적인 정책으로 실행해 전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이로써 한비자의 학설이 후세에 남게 되었다. 한비자가 최후의 법가이자 동시에 법가를 집대성한 법가의 거두로 불리는 이유이다. 

 진시황 영정이 후회막심의 마음으로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위나라 사람 요(繚)가 진나라로 왔다. 영정은 요가 한비자를 대신할 수 있는 얻기 어려운 인재라고 생각하였으며, 한비자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대신하여 위(尉)라는 요직을 만들어 주었는데, 위(尉)에는 벼슬 위와 위로할 위의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은 그를 위료(尉繚)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위로의 유래가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한비자의 사상은 상앙(商鞅:? ~ BC 338)의 법(法)과 신불해(申不害:? ~ BC 337 ?)의 술(術)과 신도(慎到: BC 337년경 ?)의 세(勢)를 중시했으며,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빼놓을 수 없다고 여겼다. 한비자는 이 법(法)과 술(術)과 세(勢)를 바탕으로 군주의 용인기술을 설명하였다. 

 통치에서 '법'과 '술'이 갖는 중요성은 "군주에게 '술'이 없으면 바보처럼 멍청하게 윗자리를 차지하는 꼴이 되고, 신하에게 '법'이 없으면 밑에서 난리를 피우게 된다. 따라서 이 두 가지는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제왕이 천하를 다스리는 도구"인 것이다. 그는 또 "법은 드러내는 것이 낫고, 술은 드러내지 않는 것이 낫다"라는 책략적 사상을 강조한다. 이 말의 뜻은 '법'은 널리 선전하여 집집마다 다 알게 해야 하고, '술'는 마음속에 꼭 감추어 드러내지 않으면서 백성을 통치하고 신하들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① 법(法)이란 먼저 관부에서 공포하여, 지키면 상을 받고 명령을 어기면 처벌받아 상과 벌이 분명하게 시행된다는 사실을 백성들이 마음으로 믿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법'이란 백성들이 반드시 따라야 할 조령(條令) 같은 것으로 각종 상벌 조건을 상세하면서도 구체적으로 규정하여 군주에 복종하면 상을 받고 저항하면 벌을 받도록 한다는 것이다. 

 ② 술(術)이란 재능에 따라 관직을 주되 그 관직에 따른 직책을 맡긴 다음 생사여탈의 권한을 가지고 신하들의 능력을 평가하는 것으로 이는 군주가 장악해야 마땅하다"라고 말한다. 이는 군주가 관직 임명과 일처리에 대한 검사, 공을 세운 자에게는 상을 주고 잘못을 한 자에게는 벌을 주는 일, 신하들을 심사하는 일 등에 대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비자는 “영리하고 지혜로운 군주가 '법'과 '술'을 장악함으로써 백성들이 땀을 흘려 일해서 부를 쌓고, 직무를 잘 처리하여 귀한 지위에 오르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고 공적을 세우면 상을 받아 군주의 인자한 은혜만을 바라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道)다"라고 지적한다. 

 ③ 세(勢) 란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킨다. 통치자는 말과 행동을 떠나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영향력도 커진다. '세'를 탈 줄 알면 좋은 사람도 나쁜 자도 모두 이용할 수 있다. 다만 유능한 자를 기용하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지만, 못난 자를 기용하면 천하를 어지럽히게 된다.      


 통치자로서 현명한 군신은 자신의 권력으로 국가를 다스리지만, 간사한 군신은 권력으로 백성과 어진 사람을 해친다. 군왕이라면 권세를 잘 이용해야 한다. 즉 한 나라의 군주에 있어서 국가는 수레에 비유할 수 있고, 군주의 '세(권력)'는 말에 비유할 수 있다. 나라를 다스리는 기술이 없다는 것은 말을 다루는 기술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몸이 피로하면 국가는 환란을 면하기 어렵고, 몸을 편안한 곳에 두면 국가도 다스려져 부강해질 것이다. 

 이에 따라 한비자는 군주가 나라와 백성을 통치하는 데는 효과적인 길이 있다고 주장한다. 즉 자신이 직접 백성을 다스릴 필요가 없고 각급 관리들을 통하여 다스린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나무줄기를 흔드는 것과 같아, 나무 전체가 흔들리면 나뭇잎이 떨어진다. 연못 주변 나무에 둥지를 틀고 사는 새들도 놀라 하늘로 날아가고, 연못 속의 물고기들은 바닥으로 숨는다. 또 그물을 잘 던지는 사람은 그물의 벼리만을 쥐면 되지, 그 많은 그물코를 일일이 건드리는 것은 헛수고일 뿐이다. 따라서 관리는 나무줄기와 그물의 벼리에 비유할 수 있고, 군주는 이 관리들만 잘 다스리면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한비자는 또 백성들을 너무 사납게 압박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백성들의 반란을 자극하게 된다는 것이다. 백성의 생존을 위협하는 방식으로 백성들을 길들이려 해서는 되레 반발만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한비자는 사람을 기용하는 용인(用人)에 대해서도 “통치자의 이익을 위해서는 유능한 인재를 반드시 기용해야 한다. 그리고 유능한 인재는 반드시 군주를 위해 활용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 자를 제거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기했다. 또 인재들을 기용하고 추천하는 용인의 원칙으로 "안으로는 친척이라 해서 피하지 않고, 밖으로는 원수라 해서 피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법'과 '술'의 요구에 부합하고 재능이 있으며 군주에게 소용이 있다면, 사회적 지위가 아무리 낮아도, 또 친척이나 원수라도 추천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비자의 이런 '용인' 철학은 지금 보아도 진보적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한비자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진(晉)의 중모현(中牟縣)에 현령 자리가 비어있었다. 진 평공(平公)이 조무(趙武)에게 "중모는 진나라의 요충지이며, 한단으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오. 과인은 우수한 관리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누가 가장 적당하겠소?"라고 물었다. 조무는 형백의 아들이 적당하다고 대답했다. 평공은 깜짝 놀라면서 "형백이라면 그대와 원수처럼 지내는 집안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에 조무는 "군주를 위해 국사를 말하는 데 사적인 은혜나 원한 같은 감정이 끼어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진 평공은 또 "중부(中府) 담당관으로는 누구를 임명하면 좋겠소?"라고 조무에게 자문을 구했다. 조무는 자기 아들을 추천했다. 이처럼 인재를 추천할 때는 원수나 아들이라고 피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러나 한비자의 법·술·세에 대한 이런 평가도 있다. 사마천은 한비자를 두고 일을 단호하게 잘 처리했으며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명쾌했지만, 그의 사상은 너무 가혹하고 각박하여 은덕이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유세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한비자가 세난편을 상세하게 저술했음에도 결국은 진에서 죽음을 당해 그 자신이 유세에 따른 재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며 몹시 비탄해 했다. 선교의 홍익인간사상에 의하면 사마천의 평가는 지극히 적절하다 할 수 있다. 현대 자본주의와 과학문명은 인류를 부유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명확하지만, 결국 인류는 그 혜택이 주는 반작용으로 재난에서 처해있다. 홍익인간사상에 의하면 때론 몇몇 뛰어난 사람들이 만드는 역사가 법·술·세에 합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인류사회는 그들의 그들에 의한 그들을 위한 법·술·세의 가혹한 적용으로 위기를 맞는 것이다. 


 

 제자백가시대의 수많은 철학사상들 중에서 왜 유독 한민족의 신교나 선교에 대한 역가기록이 일천한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 이유가 없다. 

 역사를 살펴보면 히브리인들은 신앙을 중시하는 그들의 민족의 성향에 따라 9백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신화와 역사를 종교로 만들어 기록하였고, 중국인들은 기록을 중시하는 그들의 민족적 성향에 따라 사서(史書)라는 이름 아래 신화는 신화대로 역사는 역사대로 차곡차곡 기록하였으며,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기원전 8세기경의 일리아드(Iliad)와 오디세(Odyssey)의 저자 호메로스(Homeros)와 신통기의 저자 헤시오도스(Hesiodos)를 중심으로 그리스 신들의 이름이 확인된 기원전 15세기경의 미케네 문명 문자판에서부터 1500여년에 이르는 기나긴 세월동안 신들의 구체적인 계보와 신성, 행적 등을 기록하였다. 그들은 이런 기록들을 근거로 역사를 만들고 종교를 만들고 신화와 문화를 만들었다. 한민족의 반만년의 역사라는 긴 세월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다. 


 한국에도 신교와 선교에 관한 내용이 담긴 한국고기와 다른 서적들의 기록이 있고, 신교와 선교의 맥을 잇는 대종교와 천도교와 그 철학사상이 있으며, 선도수련법의 맥을 잇는 수많은 심심치유법과 신교의 전통을 전하는 개천절' 환구단' 참성단 등의 문화유습과 유물유적들도 있을 뿐만아니라, 심지어는 선교 철학사상의 핵심정신인 홍익인간사상이 교육법으로까지 정해져 있다. 

 한국인의 비극은 어쩌면 자신들의 것은 헌신짝 취급하면서, 반면 유교와 불교와 도교 등의 다른 나라 종교와 철학사상을 마치 자신들의 것인양 착각하고 살아가는 현실일런지도 모른다. 자기 것은 없고 온통 남의 것 만으로 치장하고 살아가고 있으니, 민족 정체성이나 애국심이 있기 힘든 것이다. 최소한 홍익인간사상에 대한 의미와 전통에 대한 연구만이라도 제대로 하여야 할 것이다. 




- 해설 단군신화(52) " 고조선시대 말기(삼한춘추전국시대 4 ): 제자백가의 서양의 철학사상" 편에서 계속됩니다. -

작가의 이전글 해설 단군신화(50. 교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