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세 <인정사정 볼 것 없다> (1999년작)
시간을 주무르는 마법
얼마 전, 유튜브에서 이동진 평론가가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강력히 추천하는 걸 봤다. 그리고 주말을 기다려 오늘 드디어 영화를 봤는데 역시 이동진's 픽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나도 이 영화에 매료됐다. 두 개의 장면을 되짚어보며 이 영화가 나를 어떻게 매료시켰나 살펴보려 한다.
우선 오프닝 씬이다. 좋은 영화가 흔히 그러하듯이 이 영화도 오프닝부터 관객을 압도한다. '한국의 유일한 비주얼리스트 감독'이라는 평을 듣는 이명세답게 감각적이었다. 흑백으로 찍힌 폐건물 부지가 아이리스 인(iris in)된다. 모래바람이 휘날리는 그곳은 마치 서부극의 사막 같다. 영구(박중훈 분)의 뒷모습이 프레임 인(frame in)된다. EDM 음악의 베이스가 페이드 인(fade in)되며 조금씩 볼륨이 커진다. 끝내주는 영화가 시작됐으니 안전벨트 단단히 매라. 음악이 시작될 때 누군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카메라가 영구를 따라가며 그를 중심으로 반 바퀴 돈다(아크 쇼트(arc shot)). 그의 얼굴 클로즈업. 왼쪽 눈의 상처에 밴드를 붙이고 인상을 한껏 쓰고 있다. 피고 있던 담배를 한 번 빤다. 이후 이어지는 쇼트들은 하나같이 모두 감각적이다. 어떤 쇼트 하나 상투적이지 않다.
두 번째 살펴볼 씬은 일명 '40계단 살인 씬'이라 불리는 씬이다. 이동진 평론가가 최고의 장면으로 뽑기도 한 장면이다. 나 또한 최고의 장면으로 뽑고 싶다. '장성민(안성기 분)이 살인을 저지른다'라는 한 문장이 내용의 전부인 이 장면에는 스토리를 초월한 영화만이 담을 수 있는 아름다움이 구석구석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동진 평론가는 타르코프스키의 격언을 빌려 '이 영화가 시간을 봉인하는 방식에서 감탄을 했다'고 한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거리의 모습을 보여주며 씬은 시작된다. "12:10:58 P.M."이라는 자막이 뜬다. 그 뒤로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연인이 있다. 동영상으로 시작된 그들의 모습은 스틸 컷으로 끝이 난다. 스틸 컷이 바뀔 때마다 58초, 59초, 다시 00초 이렇게 자막의 시간이 1초 간격으로 증가한다. 다음 컷에서 머리에 쟁반을 이고 음식을 배달하는 상인의 모습이 부감으로 나온다. 시간은 흐르고 있고 은행잎은 바람에 나부끼고 사람들은 평화롭다. 그리고 등장하는 장성민. 자동차 보조석에 앉아 어딘가를 주시하고 있다. 앞 유리 너머로 보이는 그의 모습. 끊김 없는 영상으로 시작된 쇼트의 초당 프레임 수가 점점 작아진다. 즉, 영상에 끊김이 조금씩 생긴다. 왕가위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익숙할 스텝 프린팅(step printing) 기법이다. 초당 프레임 수를 줄여서 움직임이 부드럽지 않고 분절되게 찍는 기법이다. 왕가위도 그렇고 이명세도 그렇고 스텝 프린팅을 이용하여 현실에서 놓치곤 찰나의 것들을 영화 안에 붙잡아 놓는다. 계단을 내려오는 유치원생, 빗방울이 떨어지고 번개가 한 번 치자 유치원생이 사라진다. 시간이 흐른 것이다. 편집 용어로 말하자면 시간의 점프 컷(jump cut)이다. 맑던 하늘에서 이제는 강한 비가 내린다. 여전히 장성민과 그 일당은 차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마약상(송영창 분)이 건물 현관으로 나온다. 장성민의 타겟이다. 그는 무기를 들고 다가간다. 마약상이 핀 우산이 장성민의 칼에 잘려 반으로 갈라진다. 갈라진 우산의 틈 사이로 칼에 맞기 직전 마약상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그 컷 또한 스텝 프린팅으로 찍혔다. 그 짧은 순간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영화는 포착해 낸다.
이 씬의 정수를 깨우친다면 이 영화 전체의 정수 또한 깨우칠 수 있다. 그것은 시간을 압축하고 늘리는 마법이다.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영화사상 가장 지독한 질문을 던졌을 때 어떤 이들은 '영화란 시간의 예술이다'라는 말을 한다. 시간의 예술? 감이 잘 안 올 수 있다. 이 영화에서 힌트를 얻어 그것이 무엇인지 얘기해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 역으로 이 영화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살펴보자. 그건 바로 스토리다. 스토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스토리가 빈약하다는 비판을 많이 받은 영화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흔히 말하는 탄탄한 스토리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는다. 고로 스토리란 영화의 한 요소일 뿐이지 존재 조건은 아니란 결론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관객을 매료시키는가? 관객으로 하여금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본질이자 영화라는 거대 담론의 핵심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 영화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앞서 말한 스텝 프린팅, 시간의 점프컷, 담배 연기, 주전자에서 나오는 수증기, 공기 중을 퍼져나가는 가루약, 살점을 파고드는 굵은 빗방울 등등... 그런 시간을 주무르는 마법의 요소들이 이 영화 고유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고유의 리듬을 갖고 있는 영화는 정말 별로 없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뛰어난 영화라 할 수 있다. 누군가 끝내주게 재밌으면서도 영화의 본질이란 무엇인지 말하는 영화를 보고 싶어 한다면 이 영화를 보라고 강력히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