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618
여행에 나만큼 돈 쓴 사람 몇 없을 거다.
살면서 가본 나라가 총 31개국. 유럽도 동남아도 남미도 한 바퀴 돌았다. 어렸을 때, 난 당연히 여행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중학교 시절 한비야의 책을 읽으며 막연히 해외여행을 꿈꿔왔고, 고등학교 때 처음 가본 일본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새로운 것을 맛보고, 티비에서 보던 곳을 가고. 다녀와서는 여행의 놀라운 효능, 효험을 친구들에게 자랑도 하고.
난 당연히 여행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여행을 가면, 숙소 침대에 콕 박혀 나가기 싫어했다. 점심 먹을 때서야 느지막이 침대 밖으로 기어 나왔다. 점심을 먹고 나선 왠지 해야 할 것 같은 의무적인 관광지 구경을 했다. 그리고 관광지 이쁜 카페 하나 찾아서 커피 마시며 책 읽거나 유튜브를 봤다. 그리고 해가 지기 전, 숙소로 들어와서 침대와 다시 하나가 되었다. 늦은 밤, 게스트하우스에서는 여행자들끼리 술 마시고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내성적인 나는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 늦게까지 게임하다 스르르 잠들었다.
이따구 돈 낭비 침대 여행에 3천만 원을 넘게 쏟아붓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여행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고, 그다지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난 여행을 좋아한다고 단단히 착각했었다. 아니, 난 여행을 좋아했어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여행을 꿈꿔왔기 때문이고 또 그래야 폼나기 때문이었다. 여행 좋아한다고 하면 다들 부러워했었다. 나는 별거 아닌 평범한 사람이지만, 여행 이야기를 하면 대단한 사람으로 봐주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여행을 갔다. 하다 하다 지구 반대편 우루과이까지도 여행했고 도합 2년은 여행했다. 지금 돌아보면 가성비 떨어지는 허세였다. 그렇게 황새를 따라 하던 뱁새는 가랑이가 아니 통장잔고가 다 찢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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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까지 나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평소 말은 겸손하게 했지만 미움받기 싫었을 뿐, 마음만은 늘 그랬다. 그렇기에 나는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한 노동보다는 멋있는 지적 노동에 어울리는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폼 나는 UX 디자이너가 천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 만들어진 나였다. ‘진짜 내’가 아닌 ‘되고 싶은 나’, ‘보이고 싶은 나’였다. 여행을 하면서 숙소에서 머무는 건 그래도 참을만했다. 하지만 UX 디자이너로 일하는 건 죽을 맛이었다. 뭔지 모를 추상적인 내용은 늘 이해가 안 되었다. 매번 퇴근길,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 일이 내 천직인데. 오랫동안 꿈꿔온 일인데 왜 이렇게 힘들고 지칠까?’ 결국 힘들어서 도망쳤다. 지금 돌고 돌아, 드릴 들고 뚝딱거리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이 일이 내 천직이었다.
계속 외면했었다. 진짜 내가 아닌 바라던 나를 쫓았다. 그게 나라고 여겼다. 20대 때는 그래도 무리해서라도 쫓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리하면 몸져눕는다. 게다가 돌아보면 그리 행복하지도 않았다. 이상적인 나, 바라던 나를 포기하고 ‘그냥’ 나를 받아들이려는 요즘. 더 편하다. 난 생각보다 멋진 사람, 대단한 사람,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고, 아니다.
하지만, 더 좋다. 남들 눈, 나의 이상을 무시한 ‘그냥 삶’은 편하다. 이제는 더 이상 멋진 해외여행은 아닐지 언정, 그냥 마냥 걷는 동네 근처 트레킹 여행이 더 좋다. 멋지고 돈 많이 주는 일보다는 마음 편한 단순 노동이 더 좋다.
뱁새가 황새보다 나쁠게 뭐야, 더 귀엽기만 한데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