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12월 24일
남자는 세 번 죽는다.
먼저 육체적 죽음. 심장이 멈춰서 사랑하는 사람들 곁으로 가는 것. 그리고 사회적 죽음. '치매'라는 잔인한 병으로 나 자신과 주변을 서서히 잊는 것. 그리고 탈모라는 무시무시한 외모적 그리고 인격적 죽음이다.
처음 내가 혹시 탈모일지도?라고 생각한 건, 20대 중반이었다. 문뜩, 방 청소를 하는데 머리카락이 많았다. 머리를 말릴 때, 머리가 우수수 떨어지는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마의 양쪽이 폭삭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설마 탈모겠어? 하면서 현실을 부정했다. 안타깝게도 이 단계는 대부분의 예비 탈모인이 겪는 첫 실수이다.
그러다 콜롬비아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서서히 느꼈다. 머리가 얼마나 빠지는지, 머리카락들이 꼭 미국 서부에 카우보이들 사이를 굴러다닐 것 같은 덩굴, 회전초처럼 뭉쳐있었다. 이 집에 나 혼자 사는데 이 정도 양이라는 게 믿을 수 없었다. 불안했다. 하지만 콜롬비아에서 탈모 병원을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수치스러웠다. 한국인 젊은 남자는 이 근방 나 혼자인 데다, 그 콜롬비아 동네 가장 큰 학교의 한국인 선생님이라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내가 탈모 병원을 들락거린다면 아마 지역 조간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했었을 거다. "충격! 다마소 사빠따에 있는 한국어 선생님 싼티아고 알고 보니 문어 대머리".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스페인어로 탈모라고 말하기도 어떤 증상이 있는지도 설명하기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한국으로 간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리스트가 마라탕 먹기, 그다음이 탈모 병원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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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성지는 양화진, 핸드폰 구매의 성지는 신도림이라면 한국 탈모인들의 성지는 종로구에 있다.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한 번쯤 갈지 고민한다는 그곳 '보람 의원'이다. 나의 탈모인 인생을 시작한 곳이다. (정확하게는 탈모는 시작'당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보람 의원은 기이한 곳이다. 그 성지가 여기 맞나 싶을 정도로 낡은 건물에 성인 2명 겨우 들어가는 작고 냄새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그리고 올라가면 나 같은 '탈모 꿈나무'부터 '내 가깝고도 먼 미래'들이 모여있다. 좁고 낡은 00년대 스타일의 대기실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왠지 눈부시게 환하다.
하지만 이 곳이 한국에서 가장 우울한 장소일 것이다. 모두가 슬픈 얼굴로 핸드폰만 보고 있다. 간호사 선생님들도 미소 한 조각도 없이 무표정이다. 홀로, 의사 선생님만 기묘하게 신나셨다. 2-3분마다 새로운 사람의 정수리를 만나야 하니 마음의 한 구석이 무너져 내린 것이 아닐까? 아니면 통장잔고의 힘일까? 하여튼 기묘하다 기묘해.
재미있는 점은 의사 선생님도 탈모인이다. 이미 많이 벗겨지셨는데, 하시는 말씀이 자기는 딱 60까지는 약을 먹어서 '풍성'했다고 하셨다. 이제는 늙어서 머리 욕심이 없어서 약을 끊으셨고 이렇게 되었다면서, 나 보고도 먹으면 충분히 선방할 수 있다고 격려하셨다. 그런 무소유의 마음이 부러우면서도 두려웠다. 탈모란 건 무소유를 득도하는 과정인 것일까? 머리카락은 다 허망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다 헛되고 헛된 건 아닐까?
진료 절차는 간단하다. 의사 선생님께 이마를 까서 이마를 보여드린다. 2초도 안 걸린다. 바로 몇 기다 말씀해 주신다. 나는 다행히도 이제 1기에 들어가는 단계라고 하셨다. 그래서 다들 먹는 약을 추천해 주시면서, 24시간마다 먹어야 한다고 안 그런다면 '엄중한 결과'를 받아 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렇게 2-3분 떠들고 약 처방전 받고 가라고 하셨다. 5000원을 주고 처방전을 받았다.
그 날 이후로 아침에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하고 약부터 먹는다. 그 약을 먹으면 마음에 위안이 생긴다. 예전처럼 머리가 빠지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은 들지만 그래도 이 약이 내 머리를 더 나오게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플라시보 효과만은 아닐 거다. 이마가 전진하는 속도가 확실히 줄었다.
하지만 탈모 약도 능사가 아니다. 탈모약은 치명적인 부작용이 많다고 한다. 우울증을 유발한다는 이야기, 성기능이 저하된다는 이야기, 여드름 같은 피부 트러블에 대한 이야기도 많다. 이런 것들은 다 약을 끊으면 없어진다고는 하지만 그럼 이제 탈모는 다시 찾아온다. 건조한 숲 속에 붙은 불처럼 삽시간에 머리카락이 다 사라져 버릴 거다. 그럼 더 큰 우울증이 생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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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에는 특히, 대학원생들 중에 이런 가여운 인생을 가진 친구들이 많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빠지는 머리를 막을 길이 없어서, 금단의 흑마법을 찾아간 사람도 있다. 그 친구는 유전적으로 가는 모발에 20대 초반부터 빠지기 시작해서 고민이 많았는데, 대학원에 들어가니 머리카락들이 눈에 띄게 생기를 잃고, 가뭄이 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수소문 끝에 울산 어딘가에서 탈모를 오랫동안 연구한 흑마술사를 찾아갔다고 한다.
그 흑마법의 비기는 바로, 약의 부작용을 이용하는 거라고 한다. 어떤 약과 어떤 약, 탈모랑은 아무 상관없는 약이지만 같이 먹으면 일종의 부작용이 생겨서 머리카락이 난다고 한다. 그런 비기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이것이 현대 의학으로 밝혀내지 못한 일종의 부작용이기 때문에 불법적으로 약의 처방전을 내준다고 한다. 이 방법을 이용하고 나서 그 친구를 봤더니 다른 사람 같았다. 전에 보았을 때는 머리카락이 가느다란 거미줄 같았는데, 지금은 콩나물처럼 자라 있었다. 얼마나 머리카락이 생기가 넘치는지 꼭 머리카락이 몸의 본체고 몸은 머리카락에 달린 것 같았다.
이 흑마술의 문제는 약을 끊었을 때라고 한다. 일반 탈모 약도 중간에 끊으면 탈모가 다시 진행된다고 하는데, 이 흑마술은 탈모 진행이 아니라 한 여름밤의 꿈처럼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녹아내린다고 한다. 흑마술의 무서움이란, 아무리 머리카락이 소중해도 영혼을 팔아선 안된다. 그 친구는 이제 그 비싼 약의 노예, 흑마법의 노예로 평생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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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나도 이제 탈모의 문을 열었다. 남은 인생을 숨 쉴 듯, 밥 먹듯, 탈모약을 먹는 인생이 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 탈모약은 건강보험에서 빠져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격이 만만치 않다. 3달에 내 머리카락을 위해 거금 6만 원을 들여야 한다. 심지어 처방전 없이 구매할 수도 없어서, 약 처방받으러 종로로도 정기적으로 가야 한다.
이제 나는 평생 '탈모약이 혹시나 떨어질까? 탈모약 가격이 오르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탈모는 단순히 머리가 빠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외모적 죽음, 거대한 편견, 대머리, 문어 대가리, 타코야끼, 말하는 칸쵸,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 등의 놀림거리를 당하는 인격적 죽음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2500만 탈모인, 예비 탈모인들을 위해 이제 나라가 나서야 할 때가 아닐까? 하루빨리 탈모인들의 인권이 신장되는 그 날이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