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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슬기 Dec 25. 2023

야구팬이 비시즌을 보내는 방법

야구라는 기쁨과 고통 21

'야구 타로'의 카드. 전통 타로 카드들에서 '연인'으로 표현되는 카드가 이 타로에서는 '더 팬'이다.


2023 플레이오프를 마지막으로 NC의 야구가 끝났고, 나의 야구가 끝났다. 주말이면 아빠가 TV 채널 독점권을 쥐고, 하염없이 배영수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내 10대 시절에 야구 시즌은 지독히도 길었다. 그러나 20여년 을 건너 서른 여섯이 된 지금, 야구 시즌 왜 이토록 지독히 짧은 것인지, 야구 비시즌은 지독히도 긴 것인지 가슴이 도통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나름으로는, 비시즌을 보내는 방법을 치밀하게 계획했는데도 그랬다.


내가 운영하는 NC의 인스타그램 팬계정(@nc_yagulife) 스토리에 가끔 '무물'(무엇이든 물어보세요)을 올리면 팔로워들이 자주 묻는 질문 중에 하나도 그것이었다. "비시즌엔 뭐하실 계획이세요?" 나의 계획은 이러했다.


1. 팬계정 운영

2. 야구 책 읽기

3. 야구 행사 참여

4. 관람기 정리

5. 유니폼 입고 기념 사진촬영

6. 다이노스마스 개최

(이럴 땐 파워 J 같아 보이지만 나는 철저히 P이다.)



1. 팬계정 운영

시즌 때 직관을 가서 야구장의 이모저모, 선수들의 별별 모습(이보다 표현이 올드할 수 없다)을 '짤'로 찍어 올리던 계정이다. 나는 비시즌이라고 해서, 이 계정을 조용한 상태로 두고 싶지 않았다. 뭐든 올리고 싶었다.

그래서 첫번째로는 '냉장고 파먹기' 하듯 기존에 찍었던 영상들을 죄다 훑어서, 내가 업로드하진 않았지만 나름 얘기되는(?) 영상을 찾는데 매진했다. 혹은 기존의 영상 여러개서 특정 부분들을 오려 붙여 새로운 타이틀을 붙여 올렸다. NC 공식 유튜브나 여타 유튜브에서 NC 선수들의 근황이 올라있는 영상들을 집요하게 뒤져, 1분 내외의 짤막한 릴스로 만들어 올리기도 했다. 그렇게 오려붙인 '손아섭 서울말 모먼트' 영상은 조회수가 약 20만회에 육박하기도 했다. 아니, 내가 지금껏 10여년 간 써왔던 기사도 이 정도 조회수를 기록한 일은 없는 거 같은데...? 뜻밖의 메가히트였다. 사실 그간은 나의 감상을 아카이빙하는 용도의 계정이었는데, 이 즈음부터는 계정의 목적이 좀 달라졌다. 사람들은 어떤 콘텐츠에 반응하는가를 실험하는 대상으로서의 용도가 더 짙어진 것이다.

나에게는 NC 팬계정 운영이, 여러가지로 흥밋거리를 제공했다. 한 번은 한 선수가 경기 후 구단 버스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는 영상을 올린 적이 있다. 그 날은 그 선수의 특출난 활약에도 불구하고 팀이 패배한 날이었고, 핸드폰을 보고 있는 그의 심란한 표정이 주는 묘한 울림이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달린 사람들의 반응은 '댓망진창'이었다. '저 놈은 팬들이 밖에서 기다리는데 왜 팬서비스를 안 하냐'고 누군가 댓글을 달았더니 거기에 '아줌마한테 팬서비스를 왜 하냐'부터 난리부르쓰가 났다. 여러 또 누리꾼들이 참전해 서로 욕설을 주고 받았다.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프로 선수는 매번 다 팬서비스를 해야할까? 심지어 경기에 진 날에도? 팬이 없으면 야구는 단순 공놀이라는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렇다하더라도 '내돈내산'한 경기 내지는 '프로선수는 매번 팬서비스를 해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거기다 나는 또 한가지, 카메라 세례에 시달리는 프로 선수가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인 구단 버스를 찍어 올린 내 행위에 대한 반성도 뒤따랐다.



2. 야구 공부하기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야구라는데, 사실 나처럼 '직관주의자' 같은 경우에는 야구 지식이 쌓일 틈이 없었다. 야구를 직관할 때는, 집에서 TV 해설을 듣는 것처럼 누군가 코멘트를 해주는 일이 없으니까. 물론 틈틈이 신문 기사도 읽고 관련 책도 읽긴 했지만, 사실은 야구라는 'Win or nothing'의 세계에 취해서 그런 지식적인 것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비시즌엔, 좀 더 차분하게, 배경 지식을 잘 쌓아서 다음 시즌 더 야구를 풍성하게 즐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야구 입문 초창기에 샀으나 한동안 꺼내 보지 않던 <야구 교과서>와 <야구 룰 교과서>라는 책을 다시 꺼내들었다. 집에 있는 기념구를 직접 손으로 쥐어보며 구종(포심, 투심, 체인지업, 슬라이더, 스플리터)에 따라 다른 그립감을 익혔다. 그랬더니 달리 보이는 게 있었다. 내가 찍었던 불펜 투수들의 연습 피칭 영상에서, 무슨 구종의 공을 던지는 지가 이제사 보이는 것이다. 어떤 공을 던질 것인가에 따라, 그들은 불펜 포수에게 다른 손짓(직구의 경우 글러브를 앞으로 내고, 포크볼의 경우 엄지와 검지로 포크 모양을 만드는)을 하는 게 보이기도 했다. 불펜 피칭 때 와인드업과 세트포지션을 고루 섞어 연습하는 것도, 이제사 눈에 들어왔다. 내가 찍어둔 그 많은 영상들은, 나에게 훌륭한 시청각 교보재였다.

꼭 야구 지식에 관한 책이 아니더라도, 야구 관련 소설이나 영상도 꾸준히 봤다. 어느덧 모든 것을 야구에 빗대 설명하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는 심각한 병에 걸렸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고등학생 때 봤던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다시 읽었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마구>도 읽었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야구를 하나도 모르던 고등학생 때도 재밌었는데, 야구를 알고 나니 더욱 풍성한 의미로 다가왔다. (꼭 일독을 권한다.)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기를 돌릴 때, 분리수거를 할 때는 유튜브로 <스톡킹>을 봤다. 전현직 선수들 삶의 히스토리나, 선수 시절 했던 고민 같은 것을 들으면 야구의 디테일이 보였다. 물론 가장 자주 재생했던 편은 손아섭·임찬규 편이다.


3. 야구 행사 참여

비시즌에 NC에서는 '타운홀미팅'이라는 이름의 팬미팅을 연다. 올해는 규모를 키워 NC파크에서 열기로 돼 있었고, 시즌권자와 비시즌권자를 나눠 연이틀 티켓팅이 열렸다. 사실 나는 기대도 안했고, 개인적으로는 야구선수들이 춤추고 하는 것들에 관심이 없어서 티켓팅을 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연이어 패전보를 울려왔다. 나중에 엔튜브에 올라온 비하인드를 보니, 약간 아쉽기는 했다. 그래도 시도는 해봤어야 했나…

그 외에 KBO 시상식이나 골든글러브 시상식 등은 꼬박꼬박 티켓팅에 참전했다. 그것들은 실시간 티켓팅이 아니라, 참가 신청을 하면 KBO가 추첨을 통해 뽑는 형식이었다. '20승 투수' 페디나 타격왕에 빛나는 '오빠' 등은 시상식에서 무슨 상이라도 받겠거니 싶었기 때문에 꼭 가서 한 번 보고 싶었다. 그러나 모조리 다 '광탈'이었다. 


4. 관람기 정리

다 세어보니 나는 2023 시즌 동안 총 9개 구장에서 마흔 번 직관을 했더랬다. 그걸 다 정리할 수는 없고, 임팩트 있던 경기로 스무 경기 내외로만 요약해보기로 했다. 그 날의 경기 기록과 기사들, 내가 찍은 영상과 사진들을 봐가며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일이 꽤 재밌다. 정말 나의 유희에서만 비롯된, 오랜만의 글쓰기였다.


5. 유니폼 입고 기념 촬영

때는 바야흐로 나와 Y가 한화이글스파크를 처음 찾던, 지난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찍 도착해 대전역 근처를 서성이다가, 샘플 사진들이 예쁜 사진관을 발견했다. 휘릭 지나쳤지만, 대전에도 온 겸, 저기서 Y와 NC 유니폼 입고 기념 촬영이라도 하는 게 어떨까 싶었는데 한참을 지나고나서야 Y도 나와 같은 맘이었던 걸 알게 됐다. 우리는 그 날을 서로 아쉬워했다.


그리고 비시즌이 되어, 나는 팔로우하던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친구들끼리 NC 유니폼을 입고 찍은 스튜디오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 색감이 내 취향이어서, 급히 검색한 끝에 어느 스튜디오인지 알게 됐다. 가격도 비교적 저렴했다. 즉시 Y에게 공유했고, Y도 반색을 해서 스튜디오 예약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렇게 11월 19일 일요일 오후, Y와 나는 예약한 스튜디오로 향했다. 홍대에 있는 '비코즈프렌즈'라는 곳이었다. 예약 시간 20분 전쯤 도착해, 화장실에서 옷부터 갈아입었다. 당연히 유니폼으로. 짐작했던 대로 Y와 나는 갖고 온 유니폼이 달랐다. 나는 '이용찬'이 마킹된 홈 유니폼을, Y는 '손아섭'이 마킹된 원정 유니폼을 들고 왔다. 그것은 각각 우리의 '최애 유니폼'이었다. 미리 말을 맞춘대로, 비시즌 내 고이 잠자고 있던 여러 응원용품도 바리바리 챙겨왔다. '쫌' 부채, 민트색 응원배트, Y의 경우는 NC의 마스코트인 단디 캐릭터가 있는 머리띠까지.  


예약한 시간인 2시가 되어, 우리는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셀프'이기 때문에, 정해진 20분 동안 자유롭게 찍으면 되는 곳이었다. 다양한 응원도구를 번갈아 돌려가며, 둘이 같이 찍었다 한 명씩 찍었다 하며 분주하게 리모컨으로 셔터를 눌렀다. 결과물은? 매우 맘에 들었다. 나는 한동안 그 사진을 내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썼다.



그 사진을 보고, 전에 다니던 회사 후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선배도 NC를 좋아하시는 거냐며… 나와 동향인 그 후배도, 올해 NC에 입덕해 비시즌 내내 NC 앓이를 하고 있다고 했다. 간만에 만나 회포룰 풀었다. 당연히 NC 얘기가 반 이상이었다. 다음 시즌에 고척으로 직관가자는 약속을 하고서 헤어졌다.


6. 다이노스마스 개최

기념 촬영까지 한 와중에도, 야구에 관한 갈증은 달랠 길이 없었다. 그 기간에 나와 Y는 누굴 만나든 야구 얘길 하고 싶어 입이 달싹거리는 지경에 봉착해 야구에 관심 없는 자들을 만나서는 그 시간 자체가 무의미한 듯한 수준이 되었다. 지독한 병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고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고, 야구를 모르는 누군가를 만나느니 집에서 야구 콘텐츠를 보는 나날들이 계속 됐다. 텅빈 엔팍이라도 보러, 마산에 한 번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던 찰나, 아예 대놓고 NC 얘기만 하는 파티를 개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BGM으로 NC 선수들 등장곡 및 응원가만 틀고, 야구 관련 선물도 나누는. Y와의 단톡방에 불이 붙었다. 그 자리에서 식순이 정리됐고, 날짜까지 정했다. 그렇게 12월 17일, 우리들의 다이노스마스(천상 카피라이터인 Y가 이름 붙였다)가 열렸다.


장소는 우리집이었고, 오후 2시쯤 Y가 왔다. Y 맞춤형으로, 손아섭의 등장곡과 응원가를 틀어놓았다. 조악하나마, 벽에는 테이프로 NC의 응원 수건을 붙여 놓았고 그 밑에는 사인 야구공 3개로 나름의 데코를 했다. 근처 태국음식점에서 시킨 쿵팟퐁커리와 공심채볶음을 먹는 것으로, 제1회 다이노스마스는 시작됐다.



후식으로 야구장에서 늘 먹던 아이스 카페라떼를 마시며, 우리는 선물 교환식을 열었다. 룰은 배송비 포함 2만원 아래의 NC 혹은 야구 관련 선물을 주는 것이었다. 나는 NC의 포스트시즌 진출 기념 뱃지와 야구 방망이를 캐릭터화 한 '배티 아크릴 키링'을 선물했다. Y가 준비한 것은 뜻밖에 '야구 타로 카드'였다. 야구를 베이스로 타로 카드였는데, 현직 타로 리더이기도 한 나에게 맞춤한 선물이었다. 역시 Y다운, 사려깊은 선물에 나는 연신 놀라워했다.



다음으로는, 타로로 예측하는 내년 시즌 전망이 있었다. 야구 타로는 아직 숙지가 안된 탓에, 내가 갖고 있는 전통적인 타로 덱으로 NC의 내년 시즌을 전망했다. 질문은 여러가지로 터져 나왔다. 정규시즌 순위, 가을야구 진출 여부, 손아섭의 2년 연속 타격왕 달성은 가능할 것인가, 이용찬 30세이브 달성 여부 등등등… 타로는 희망 회로를 돌리지 않고, 굉장히 핍진한 답변들을 내놓아 우리를 당황스럽게 했다. 우리가 생각한 전망치와도 별로 다르지 않은 결과였기에, 더욱 그랬다. 배경음악으로 NC의 응원가가 몇 순배 돌자, 기아나 한화 같은 타팀의 응원가도 틀어놓았다. 듣자마자 원정 구장에서 그 노래를 들었을 때의 기억이 순식간에 팝업됐다. 광주 챔피언스필드에서 다 잡은 경기에서 역전 당했을 때 흘러나오던 '타이거즈 이우성~' 이나 '기아 박찬호~' 같은 것들. 내가 타팀 응원가 중에서는 가장 좋아하는 '한화의 이진영 오오오오~'. (개인적으로 한화 응원가의 서정성을 좋아한다. '이순간 너의 모든 것을 보여줘~' 이런 가사는 NC에는 없는 서정성이 있다.)


저녁으로 샌드위치를 먹으면서는, 엔튜브(NC 다이노스의 공식 유튜브 채널)를 정주행했다. 이미 질리도록 본 것이지만, 타인과 함께 보면 재미는 배가 된다. 특히나 최애가 다른 나와 Y가 함께 보니, 혼자서는 보이지 않았던 부분이 새롭게 보였다. 나는 모르던 아섭이의 타격 루틴 같은 것들, Y는 모르던 용찬의 구종별 그립 같은 것들… 올해 야구장만 함께 스무 번 이상 갔는데, 우리의 눈에 담긴 세상은 전혀 다른 것이었겠거니 생각하니 나와 타인이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가 절감이 됐다. 나쁜 뜻으로만은 말고, 꽤 좋은 뜻으로.


다이노스마스는 그날 밤이 되어서야 막을 내렸다. 다른 이들 앞에서는 할 수 없었던 갖가지 욕과 마음속 깊숙한 곳에 도사리고 있는 편견까지 마구 토해낼 수 있던 시간이었다. 생각해보면, 야구를 같이 보는 이들끼리의 전우애라는 것은 야구로부터 도출되는 날 것의 감정을 서로 가면 없이 드러내도 된다는, 친밀함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우리는 그토록 다이노스마스를 기다렸고, 야구 시즌을 기다리고 있는 것 아닐는지.


Y가 가고 다이노스마스도 끝났다. 나는 이후로 Y가 주고 간 '야구 타로'를 공부하는 일에 많은 겨울을 쏟아 붓고 있다. 간간이 기사나 인스타그램으로 선수들 소식을 살펴가면서.


'야구 타로'로 뽑아본 내년의 나. 외야에서 맥주 마시는 고주망태인 거 어찌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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