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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야 Feb 09. 2021

드라마 <허쉬> 15, 16화 리뷰

가장 뜨거웠던 건 음식들

‘드라마의 힘은 각본에서 나온다.’

이 말의 설득력은 최근 마주하는 다양한 드라마 작품들과 함께 줄어드는 게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자본적인 측면에서 더 힘을 쓸 수 있는 방송국이나 제작사의 경우 좀 더 힘 있는 연출자를 데려와 같은 각본을 가지고도 더 많은 시청자를 만들어낼 수 있고, 자본을 통해 미술적인 부분을(물론 이것도 연출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겠지만) 더 화려하게 구축하여 실감나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모습이 점점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시 말해, 그러한 자본적이거나 연출적인 측면에서 대단한 돌파구가 있지 않는 이상 여전히 드라마의 가장 큰 힘은 각본에서부터 나온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같은 맥락에서 자본이 상대적으로 적게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일일 드라마나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는 듯한 50부작 정도의 주말 드라마 안에 좀 더 자극적인 설정이나 진행이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리라.


자극적인 이야기는 관계의 외적인 부분에서가 아닌, 그 관계 자체에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 출생의 비밀, 누군가의 죽음, 불치병 등으로부터 시작된 서사는 해당 설정의 이해 당사자들로 하여금 쉴새 없이 감정의 곁가지들과 함께 갈등을 만들어내며, 결국 감정에서 시작해 감정으로 끝나기에 상대적으로 작가의 중앙 통제가 효과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쉽기도 하다. 그러나 인물 관계의 외적인 부분에서부터 설정이나 갈등이 생길 경우 상황은 달라진다. 병원, 법정, 언론 등 대부분의 시청자의 실제 삶과 가깝지 않은 무대에서 단순히 공감할 수 있는 감정뿐 아니라, 다양한 갈등과 설득까지 포함하고 이를 통해 작품성적인 측면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인 시선으로 봐야 할 사건(들)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언급한 ‘감정과 관계’는 유기적인 이야기 진행을 자연스럽게 형성하지만, <허쉬>와 같은 서사의 경우 사건 자체에 대한 집중이 필요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에피소드 형식이 불가피한 게 사실이다. 그렇기에 하나의 중심축을 이루는 가장 큰 사건을 설정하여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극의 전체적인 긴장감을 높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허쉬>에서 그 축은 ‘오수연’이였다.(고수도 역시 포함되는 줄 알았지만, 이는 ‘정치’라는 키워드까지 가져오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출처 - JTBC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그 중심 사건의 존재는 기본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것은 드라마를 보는 두 달이라는 물리적인 시간을 버텨야 할 뿐 아니라, 등장하는 에피소드들 역시 연결고리를 (감정적인 측면에서라도)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허쉬>의 경우 각 회차의 제목을 통해 독립적인 정체성을 보여주지만 에피소드들은 인물의 관계를 위해서 소모되는 모습을 보이고, 그 제목의 필요성은 후반부로 가면서 거의 사라진다. 게다가 오수연의 죽음은 사회의 낯을 드러내기 위한 초석으로 그 존재가치를 지니는 것처럼 보였지만. ‘전부 다 밝혀질 때까지는 비밀로 하라’는 말과 함께 중심 인물은, 아니 작품은 그 진실에 접근하려는 의지 자체를 상실한 자세를 취했으며, 다른 여러 감정들과 함께 오수연을 포함한 익명의 오수연들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초석이나 의지, 질문을 던지지 않고 그저 사적인 복수로 마무리되는 느낌을 부여할 뿐이다. 때문에 마지막에 그들과 함께 특별법 제정을 외치는 것은 함께 한다는 소속감만 드러내고 정작 해결된 것은 없다. (게다가 ‘NO Gain, No Pain’의 싹을 자른 것은 한준혁 아닌가.) 이것은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이 아닌, 감정이 앞선 무기력한 태도로서 오히려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묵인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태도를 이끌어낸다는 우려까지 생긴다.(설마 그게 의도였을까.)




뉴스에 대한 태도


14화의 마지막과 15화의 시작에서 국장은 이지수에게 그녀의 아버지에 대해 얘기하며 가짜 뉴스를 언급한다. 자기에 입맛에 맞지 않으면 ‘가짜뉴스’라는 국장의 말은 일반적인 접근에서는 좀 의문스러울 수 있지만, 아버지에게 무조건적인 신뢰를 가진 그녀의 기반을 흔든다는 측면에서는 흥미로운 접근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 장면은 한준혁의 의도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국장의 대사와 함께 서로의 정보력이 어디까지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긴장감이 포함된 장면이라 적잖은 힘을 갖고 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아버지에 대한 이지수의 의심’이라는 키워드는 한 회차를 만들어 낼 정도의 힘이 있으며, 사실을 기반으로 한 믿음을 어느 범위까지 한정 짓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사람이나 상황에 대해 얼마나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느냐’를 시사하는 질문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더 나아가 ‘가짜뉴스’를 주장의 무기로 삼는 이에게 그것이 되려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것 역시 흥미로운 대사를 만들어 낸다.(그럼에도 그녀의 의심은 해당 회차의 중간도 가지 않아 또 한 번 감정과 함께 막을 내리고, 그 질문의 힘은 눈 녹듯 사라져 버린다.)

출처 - JTBC

강주안이 보던 유튜버인 ‘마스크 맨’의 존재 역시 뉴스와 관련된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언론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때 사실에 대한 요점을 정확히 집어내고 그 자세를 묻는 것은 결국 익명성을 가진 우리라고 얘기하는 듯한 모습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그가 정세준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외적인 모습은 좀 달라도 사명감을 가진 언론인의 태도가 이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가짜 뉴스로 보이는 정보들을 가장 자주 마주할 수 있는 것이 그 공간인 것도 사실이고, 부자(父子)의 재회를 단순히 좀 더 입체적으로 보여주려는 시도에서 그 기인했을 거라는 의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길 잃은 악역


그간 <허쉬>는 악역을 구축하는 것에 비교적 많은 노력을 쏟은 것처럼 보인다. 욕망과 빈틈이 정비례하는 윤상규 캐릭터를 제외하고, 국장, 사장 그리고 안지윤의 행동은 속을 알기 힘든 모습을 계속 보이며 소모되지 않는 악역의 입체적인 면모를 드러내 왔다.(안지윤의 경우 특히 고기와 관련된 장면들이 인상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15화에서 신라일보로 내부고발을 위해 들어간 한준혁에게 다 알고 있었다고 말하는 안지윤의 모습 이후로, <허쉬>의 악역은 전부 힘을 잃는다. 장르적인 서사의 막바지에서 악역과 주인공의 능력 차이를 통해 쾌감을 선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맹목적으로 그 차이만을 보여주기 위해 악역이 급작스러운 인자함을 보이거나 한 치 앞을 보지 못하게 되면 쾌감은 물론이고 긴장감마저 떨어지게 된다.     

출처 - JTBC

어차피 관객은 기자회견에 선 한준혁의 모습 전까지 그의 모든 행동이 연기인 것을 안다. 때문에 각본은 악역과의 대립 속에서 지속적으로 그 정보의 차이를 재역전시키며 긴장감을 유지시켜야 한다. 그러나 15화의 후반부에서 국장은 한준혁이 신라일보를 찾아간 것을 그에게 보내는 일종의 SOS 신호로 착각하고, 늘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 같은(의심해야 하는) 사장은 뜬금없이 한준혁에게 기자회견을 시킨다. 이는 16화의 마지막에서 한준혁의 나래이션을 통해 모든 게 국장의 의도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시사하거나, 기자회견을 시키지 않으면 책을 냈을 것이라는 말을 통해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지만(책 또한 너무 단순한 대비책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해당 악역들의 선택은 작품이 의도한 마지막 장면을 위해 상황에 끼워 맞춰진 행동으로 보일 뿐이다. 게다가 제대로 된 기사 하나도 보여주지 않고 한준혁의 글솜씨를 칭찬하며 기자회견을 시키는 것은 그간 이지수의 능력을 대사로만 띄워주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결국 구축해온 악역들의 행동은 그렇게 일관성이 끊기며 길을 잃고 만다.(사장과 국장이 처벌을 피해간 사실을 보여주는 것 역시 이를 방어하지 못한다.)

   

오수연의 비밀 


결국 오수연이 자살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이 아무나도 되지 못한다’라는 문장은 충분한 당위성과 설득력을 지닌 듯하다. 단순히 이제는 마지막 도전이라 생각한 회사에서 짤리는 것이 아닌, 어디를 가든 ‘아무나’이거나 그것도 되지 못한다는 상념에 빠진 것이기에 그녀의 선택은 설정을 위한 설정이라는 시선에서는 벗어난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작품의 태도 때문에 이 역시 힘을 잃기는 마찬가지이다.

출처 - JTBC

아버지의 죽음이 한준혁에게 있다는 생각을 눈물과 함께 씻어버리고 진짜 기자가 되려는 이지수의 의지가 중요했던 것처럼, 과거의 일을 감정적으로만 생각하며 후회하는 것은 이 작품이 그간 보여주던 문제 해결의 방식과는 다른 지점이(어야 한)다.(물론 그 이외의 감정이 너무 많은 것이 사실이고, 이에 대한 태도는 고인에 대한 추모의 그것과는 결이 다르다.) 그러나 이후 한준혁의 나래이션을 통해 과거 그녀의 자살을 막을 수 있던 것이 따뜻한 말 한마디나 작은 손길 뿐이었다는 감정적인 설명이 이어지며, 인식이 바뀌기 힘든 사회적인 ‘계급의 존재’나 ‘이기적인 태도’라는 깊이 있는 시각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이는 결국 마지막에 이지수의 핸드폰 화면에 뜬 ‘감성팔이 법안은 이제 그만!’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끝까지 감정들


<허쉬>에 대한 다른 리뷰들에서 원작에 대한 내용을 심심찮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침묵주의보>라는 소설 자체가 16부작이라는 드라마를 다 채우기엔 그 분량 자체가 짧다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그 빈 곳을 채워야 할 요소들이 필요했을 것이고, 새로 만들어진 캐릭터 뿐 아니라, 그들의 관계나 당위성이 필요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허쉬>는 ‘감정’을 그 틈을 채우는 요소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매 리뷰에서 언급했듯 ‘음식’이 그 감정의 촉발제가 되기도 했고, ‘밥은 펜보다 강하다’라는 문장 역시 ‘가족과 밥’이라는 감정적인 울타리를 세우기도 했다. 즉 서사의 공간을 감정이라는 상대적으로 비서사적인 부분으로 채운 덕분에 그 공간은 틈을 메우지 못하고 서사는 서사대로 문제를 갖는다.

출처 - JTBC

마지막까지 허쉬는 가족과 밥의 손을 놓지 않는다. 그간 가족을 위해서 일을 그만두지 못한 <허쉬>의 인물들은 가족의 말에 힘입어 그대로 회사를 그만둔다. 이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방법은 상처 입은 누군가의 밥에 김치 하나를 올려주는 것이라 말하는데, 그 밥과 가족을 위해서 회사를 다니던 그들이 사표를 쓰고 결국 신념이 가장 중요하다 말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그간 음식을 가지고 구축해온 감정을 전부 무너뜨리는 모습으로까지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몇 가지


<허쉬>의 첫 장면이 여전히 기억에 잘 남아있다고 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 장면은 고수도 의원을 취채하려는 최경우의 모습이었다. 다른 것은 그렇다 치고, 일단 뿌린 떡밥은 전부 회수하는 게 이야기에 대한 예의이자 애정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허쉬>는 고수도 의원으로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이야기에서 그는 잠깐씩만 언급될 뿐, 그리고 최종화의 마지막에 신문으로 또 다시 무혐의 처리되었다는 것으로만 등장하며 마무리된다. 나름 사회부의 이야기라 정치까지 서사를 뻗어 보려는 시도가 무리한 과제를 남기고 결국 소모적인 인물들만 늘어나게 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또한 과거 한준혁이 15층을 계단으로 뛰어 올라간 뒤 벌어지는 중요한 일은 분명 그의 딸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마침내 등장한 딸은 휠체어에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단지 한준혁에게 용기만 심어준 채 퇴장해버린다. 결국 그에게 가족은 무기력해지는 순간 힘을 받기만 하는 감정적인 존재로만 남아버린다.(아내는 어디 있나.) 그 연장선상에서 <허쉬> 속 어른, 또는 연장자들의 역할이 중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지수의 어머니와 한준혁의 아버지가 바로 그들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이들 역시 단순히 무기력해진 자식들에게 삶의 지혜가 될만한 말들이나 위로만 건네는 소모적인 인물로만 남고 마무리된다.

출처 - JTBC

물론 디지털 부서의 네 사람이 호프집에서 제3의 벽을 무너뜨리며 자신들이 역할이 끝났음을 유쾌하게 마무리하는 것은 분명 장르적인 재미를 보여주는 장면이고 마지막에 “미안하지도 않냐”라는 대사까지도 문제없어 보인다. 그러나 각본가에게 던지는 이 말은 사실 이들이 아닌 앞서 언급한, 에피소드나 감정을 위해 소모적으로 사라진 인물들에게 더 어울리는 대사라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다.


이 외에도 사회적인 사건과 관련해 경찰의 도움이 분명 필요할 텐데, 브리핑을 하는 경찰의 모습이 당당하지 못하고 늘 뭔가 빠진 듯한 모습을 보이며 상당히 단순한 비판을 보여주고,(경찰이라는 집단까지 사용하는 게 서사적으로 부담스러웠을 가능성도 보인다.) 역시 문제가 있는 신라일보는 그저 매일 한국을 돕는 기능적인 언론사로만 작동하고 끝난다.




‘왜 뜨거워야 하는가. 그 뜨거움이 생각한 행동을 한 이후에도 지속될 수 있는가. 그 뜨거움이 다른 문제를 만들어내지 않는가. 그저 사적인 복수에 지나지 않는가.'

사회적인 문제에 직면한 누군가가 변화하고 그 변화가 주변의 누군가를 변화시키며 사회적인 인식을 만들어내고 결국 진짜 변화의 초석을 만들어내는 것이 언론 이야기가 갖는 힘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계속 생각해야 한다. 한 치 앞을 보지 못해 감정적인 행동이 나뿐 아닌 다른 이들에게 피해가 갈지를 고려해야 하고, 권력을 가진 누군가가 단죄를 받길 원한다면 그보다 더 먼 앞을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이 사직서가 지금은 주변을 활활 타오르게 만들만큼의 온도를 갖고 있어도 그것이 얼마나 유지될지도 예상해야 한다.     

거대 권력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현실은 반영하면서, 그들 앞에서 감정적인 선택을 통해 모든 것을 다 놓고 나와버리는 게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은 모르는 듯한 마무리 덕분에, 오히려 그 부조화는 이 작품이 의도한(의도 했는지는 점점 회의적이지만) 그 뜨거움에 반대되는 입장에 좀 더 의지하도록 만든다. 재미는 단순히 ‘악의 처단’과 ‘정의 실현’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다수를 공감시키고 왜 뜨거워질 수밖에 없는지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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