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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준원 Oct 03. 2019

아이의 요구에 조건을 붙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이를 키우는 분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집에 아이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얼마나 있습니까?” 10살 아들이 거주하는 우리 집에는 레고 블록방 보다 많은 레고와 베이블레이드, 또봇, 카봇, 터닝메카드, 보드게임 6종, 건프라 HR급 7개, 1000피스 퍼즐이 약 20개 정도 있다.


1000피스 퍼즐은 어린이 전용 장난감은 아니니 제외한다 해도 정말 많은 장난감이 있다. 레고와 베이블레이드를 제외한 장난감은 중고로 팔거나 다른 집 아이에게 선물해서 집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아들에 비해 나는 장난감을 거의 갖고 놀지 못했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장난감을 거의 사주지 않으셨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장난감은 미니카뿐이다. 뒤로 잡아당기면 태엽이 감겨 손을 놓는 순가 앞으로 쏜살같이 나가는 조그마한 자동차 장난감이다. 다양한 미니카를 갖고 싶어서 어머니에게 칭얼거리며 끈덕지게 달라붙어서 그나마 어머니가 한두 개 더 사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에 문구점에서는 아주 멋진 변신 로봇 장난감이 있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시장에 가는 길에 로봇을 보면 갖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졌다. 너무나 로봇을 갖고 놀고 싶은 마음에 아주 어렵게 아버지에게 로봇 장난감을 사달라고 말했다. 평소 대화가 없었던 아버지에게 부탁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정도로 로봇 장난감이 갖고 싶었다. 어렵게 꺼낸 나의 부탁에 아버지는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학교에서 반장에 당선이 되면 사주시겠다고 하셨다.(대학생이 되는 그날까지 아버지는 조건을 제시하셨다.) 반장은 어떻게 하면 되는 걸까. 생각해도 잘 모르겠지만, 나는 장난감을 얻기 위해 기필코 반장을 해야만 했다.

초등학교 2학년. 학교에서 반장 선거를 하는 날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에는 반장이 없어서 인생에서 처음 하는 선거였고 투표였다. 반장을 하고 싶은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는 선생님의 지시가 있었다. 내향 성격인 나는 정말 많이 망설였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고개를 떨구며 안절부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장난감은 갖고 싶었지만, 교탁 앞에 서서 아이들을 쳐다볼 용기가 전혀 생기지 않았다. 한 명 두 명 아이들이 교탁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마감을 알리는 행동을 하시기 직전 벌떡 일어나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마음으로 교탁으로 걸어갔다.


왜 반장을 해야 하는지 주장하는 선거 유세를 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앞에 나간 순서대로 한 명씩 반장을 시켜달라는 애원과 부탁을 적절히 섞어가며 선거 유세를 했다.


"저를 반장으로 뽑아주시면 신발이 닳도록 열심히 뛰어다니겠습니다."


무엇을 위해 뛰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앞서 유세를 하던 친구들의 말을 짜깁기해서 말했다. 결과는 뻔했다. 수업시간에 산만하고 다른 아이를 괴롭히는 아이를 다른 아이들이 반장으로 선출 할리가 없다. 반장에는 다른 아이가 선출되었다.


방과 후 집에 가는 길에 아버지의 조건이 자꾸 생각났다. 그리고 갖고 싶었던 로봇 장난감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때 스스로 난 반장이 되었다는 이상한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상상은 점점 환상으로 변했고 급기야 반장이라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래 맞아. 난 반장이 되었어.'


집에 오자마자 부엌에서 일하시는 어머니에게 소리를 질렀다. "엄마, 저 반장이 되었어요." 어머니는 깜짝 놀라셨고, 진짜 반장이 되었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자랑스럽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날 저녁 아버지에게 가짜 반장의 소식이 전해졌고, 주말에 장난감을 사러 문구점으로 향했다. 다행히 다른 구매자가 나타나지 않아서 그 로봇 장난감은 남아 있었다. 장난감을 획득하고 세상을 다 가진 것 마냥 정말 기뻤다. 가짜 반장의 후폭풍이 어떤지도 모른 채 마냥 좋았다. 하루 이틀 시간이 흘렀다. 나는 아무 문제없이 학교를 다녔고 완벽한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지인 분들에게 아들의 반장 소식을 전하셨다. 다행스러운 건지 모르겠지만 사방팔방 자랑하진 않으셨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는 반장이 되었는데 학교에서 임명장을 왜 안 받아오냐고 물어보셨다. ‘임명장이 뭐지.’ 어머니의 질문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당황해 또 다른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 달간 지속하던 새빨간 거짓말은 결국 만천하에 드러났다. 반장 임명장이라는 변수를 생각하지 못한 죄일까. 그날 밤은 정말 기억에서 없어졌으면 하는 날이다. 아버지가 퇴근하고 오신 밤에 심한 체벌로 허벅지는 온통 멍으로 물들었다.


다음날에도 가짜 반장의 여파는 지속되었다. 동네 시장에서 돌아다닐 때도 반장 당선을 축하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가짜 반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 어머니는 대충 넘기셨지만,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시무룩하게 어머니 곁에 서있었다. 그 사건의 경험으로 앞으로 부모님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하지 말자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모든 잘못은 내가 저지른 것이기에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그날의 기억을 치유하고 자아존중감을 회복하고 싶다.

어린아이들이 장난감이든 뭐든 소유하려는 모습이 강한 것은 대상뿐 아니라 대인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부모뿐만 아니라 친구 관계에서 적절한 심리적 거리를 두지 못하고 소유하려 한다. 어떤 경우는 자신이 소유하는데 방해하는 타인이 존재하면 따돌림을 통해 합리화하고 집착할 수 있다. 발달과정에서 자기중심적인 행동이 나타나는 것 자체가 아이의 특성이다. 이상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발달 현상이다. 어린 시절은 맹목적인 사랑과 신뢰를 받고 자라야 하는 시기다. 그런데 부모가 어떤 조건을 달성해야 장난감을 사주고 사랑을 준다면 아이들이 성장하는데 장애가 발생한다. 부모의 조건을 달성해야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아이들은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렇듯 많은 걸 기대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제대로 된 인성을 갖기 어렵다.


자아존중감은 자신의 가치를 깨닫고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것이다. 단지 아이의 존재만으로도 부모가 행복하다는 믿음을 아이에게 주면 아이는 자신이 소중하다고 느낀다. 부모의 믿음을 받지 못한 아이는 자신의 가치를 타인에게 의존해서 판단한다. 이런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모르고 타인의 눈치만 살피게 된다. 반장이라는 조건을 달성할 때 비로소 장난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반대로 조건 달성을 하지 못하면 장난감을 얻을 수 없고, 불행할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외적 동기부여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 하지만 무엇을 달성해야만 사랑을 받는다는 조건은 아이들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적절한 외적 동기를 이용하여 아이들의 내적 동기가 발생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부모는 아이의 존재를 항상 인정해주고 지지해주어야 한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른 채 늘 어떤 조건을 위해 살아왔다. 이제는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지지해주는 아내와 아들을 보며 존재로서의 가치를 깨닫고 있다. 어린 시절의 모습은 이제 하나의 허상에 지나지 않다. 그 시절 못 받은 사랑을 이제 하나씩 채우고 있다. 그리고 내면 아이에게 그 사랑을 듬뿍 주고 싶다. 반장과 같은 사회적 지위가 있지 않더라도 정말 괜찮고, 남에게 도움을 주는 걸 좋아하고, 언제나 웃음이 가득한 해맑은 아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자아존중감 #아이의소유욕 #조건부사랑은아이를망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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