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라는 건 상대적인 걸까 아니면 절대적인 걸까
성인이 되어서야 어린 시절 우리 집은 꽤 가난했던가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가정을 꾸리게 된 우리 부모님은, 지금도 여전히 여유는 있지만 여유는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있다.
어느 시절이나 먹고사는 문제는 늘 힘들고 어렵다지만, 20대 초반 부모의 지원도 없이 생계를 꾸리고 어린 자녀들을 그것도 세 딸을 키우기란 여간 벅찼을 것이다.
어릴 때는 그게 가난인지도 몰랐던 것 같은데 지금에서야 돌아보면 참 결핍이 많았던 시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찌 보면 하찮을 수도 있는 작은 물건들. 그것들은 늘 내 심기를 건드리고 위축되게 만들었었다. 예를 들면 필통이라던가 우산 실내화 같은.
1990년대 후반에 초등학생이었던 나. 으레 그 나이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물건들이 있기 마련이다. 책상 위에 늘 꺼내놓는 필통도 그중 하나였다. 얇은 직사각형 모형으로 윗면과 아랫면에 각각 자석으로 여닫을 수 있는 뚜껑이 달려있던 필통. 에나멜이나 비닐 같은 느낌이 나면서도 도톰한 뚜껑이 위아래면에 달려있어서 뚜껑을 열면 연필을 꽂아서 고정시킬 수 있는 연필꽂이, 지우개를 딱 맞게 넣을 수 있는 지우개 칸이 달려있었다. 조금 고급버전은 필통의 끝부분에 연필깎이가 내장되어 있기도 했다. 그 필통을 여닫을 때 자석이 맞물리며 나던 착착 착착하는 소리의 찰짐.. 수업시간 전후마다 아이들은 필통을 여닫으며 착착 소리를 내고 굳이 칸이 나눠져 있는 연필꽂이 부분에 연필을 고정해서 넣고 다녔다. 그 연필꽂이 부분은 마치 대포를 조준하듯이 위로 들리는 구조로 되어있어서 뾰족하게 깎은 연필을 고정시킨 후 세워놓는 모양새란.. 위풍당당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 필통을 가질 수가 없었다. 아마 그때 가격으로 만원이 채 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당시의 내 용돈으로는 살 수 없는 거금이었으며 또한 엄마에게 조른다고 해도 절대 사줄 리 없는 물건이었다. 어디 공제회라던가 농협이라던가,, 하는 홍보 문구가 새겨진 칙칙한 색깔의 작은 봉제필통만을 가지고 다녔던 나로서는 친구들이 부럽고 내 필통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필통은 백번 양보해서 현명한 소비습관이라던가 낭비 금지라든가 이런 걸로 포장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진짜 내가 힘들고 창피했던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저축시간. 초등학생 내내 6년 동안 주에 1번씩 학교에서 단체로 저축을 하는 제도가 운영되고 있었다. 매주 수요일 각자의 통장과 저금 금액을 가지고 와서 담임선생님에게 제출하면 은행에서 한꺼번에 입금 후 다시 통장을 돌려주는 식으로 운영되던 제도다. 저축 날이면 엄마는 늘 내 통장 사이에 천 원 또는 3천 원 정도를 끼워주셨다. 무엇보다도 꾸준히 저축하는 습관이 중요하다고 그날그날 여유가 있는 대로 챙겨주는 돈이었는데 아마 우리 반에서 내 저축금액이 제일 적었지 싶다. 딱히 한도액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6년 동안 좋은 이율로 들 수 있는 상품이라 친구들의 통장 사이에는 늘 만 원짜리들이 끼워져 있었다. 오천 원도 아닌 천 원 이천 원 삼천원인 사람은 나뿐이었던 것. 교실 중앙의 교탁에 저축부장이 이름과 번호 순서대로 써진 대장을 펼쳐두고, 차례차례 줄 서서 통장과 돈을 제출하는 친구들의 저축 내역을 받아 적었다. 아 나는 주마다 그 시간이 너무 싫었다. 왜 엄마는 이렇게 작은 돈을 주는 거지? 싶었던 시간들. 장난스러운 남학생 한두 명이 야 너 천 원이냐? 삼천 원이냐? 할 때마다 당당한 척하려고 했지만 어찌나 창피하던지.
중학생 때는 또 어땠던가 나는 장녀이다. 그 말은 교복을 물려받을 언니가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교복을 물려받았다. 중학교 1학년 입학식날. 제법 엄하던 부모님이기에 거스를 용기도 없었던 나는 순순히 엄마가 구해온 교복을 입고 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교복의 치마 컬러가 미묘하게 다른 것이다. 왜 해마다 교복은 디자인이 같다고는 하지만 교복 업체가 바뀌기도 하고 원단이 달라지기도 하면서 같은 디자인임에도 미묘하게 그 컬러의 진함 등이 달라지기 마련인데 하필 나는 꽤 나이터울이 나는 엄마 지인의 딸의 교복을 물려받았던 것이다. 매번 언니 거 물려받았냐는 친구들의 질문에 내가 장녀임을 밝혀야 할 때 자꾸만 오그라드는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런 경험들은 학창 시절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때로는 우산으로 다이어리로 그리고 슬리퍼로. 우산이나 다이어리는 해마다 어디서 그렇게 선물로 자주 들어오는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내 내 소원은 맘에 드는 우산을 갖는 거였다. 친구들은 문구점에 갈 때마다 넘치는 용돈으로 혹은 부모님을 조르고 졸라서 온갖 색색의 예쁜 우산들을 사서 들고 다녔다. 하지만 나는 3단으로 접히는, 칙칙한 색이 마치 나방을 떠올리게 하는, 갈색과 검은색이 오묘하게 섞인, 심지어 손잡이에는 온갖 기념 문구가 새겨져 있는 우산을 들고 다녀야만 했다. 용돈 자체도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돈을 모아도 아 이 돈을 우산에? 라며 망설여지는 일이 잦았고, 엄마한테 우산을 갖고 싶다고 할 때면 우산이 없니? 라며 타박을 받기 일쑤였다. 다이어리도 같은 예다. 피자집 치킨집 하다못해 보험사에서도 어찌나 다이어리를 많이 제공하던지. 매해 부모님 앞으로 들어오는 그 판촉용 상품들은 고스란히 내 몫이 되어 학교에서 가방 밖으로 빼낼 수 없는 부끄러움이 되었다.
대학생이 되고나서부터는 그래도 전보다 살림이 조금 나아지기도 했고, 아르바이트나 장학금 등 유용할 수 있는 돈들이 생겨나서 아무래도 어린 학창 시절 때보다는 위축되는 일들을 겪는 빈도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또 성인이 되다 보니 요령껏 내 용돈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일들을 피할 수도 있게 되었고, 초중고 때처럼 단체 생활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격차를 느낄 일들도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굵직굵직한 인생의 단계마다 늘 우리 집이 아직은 가난하다는 현실을 갑작스레 마주하게 되곤 했다. 자취하던 원룸의 보증금을 갑작스럽게 올려줘야 했을 때, 좋은 자리로의 이직 기회가 생겨 대도시로 나가게 되었을 때,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을 때 등등.. 버팀목일 거라고 생각했던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숨길 수 없는 난색이 돌아오곤 했었다.
사실 아무리 가난하다 한들 필통이며 우산 이런 자잘한 것을 살 돈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집은 춥지도 않았고 덥지도 않았고 밥을 못 먹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던 것이다. 취향이라는 것을 추구하고 호불호를 주장할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오천 원은 만원은 그 액수가 적어서 쉽게 쓸 수 있거나 액수가 커서 쉽게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 돈을 사용함에 있어 마음의 거리낌이나 기회비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있을 때. 그때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늘 근면성실하게 살아오신 부모님 덕에 우리는 지금 제법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각자의 자리에서 이제 조금씩은 취향이라는 걸 꺼내볼까 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어릴 때의 그런 환경 덕분에 돈관리도 제법 책임감 있게 할 수 있게 되었고 말이다.
아마 어린 시절에 이게 가난이구나, 우리 집은 이런 여유가 없구나 라는 걸 자각하고 좌절했다면 지금처럼 그 시절을 돌아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좋은 힘이 되었다고 웃을 수만은 없었을 것 같다. 그 이면에는 경제적으로 부족함에도 그게 조금 불편하고 서운하더라도 잘못이라거나 자존감을 갉아먹을 일은 아니라고 적절하게 균형을 잡아줄 수 있었던 우리 부모님의 사랑이 있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