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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이 대체 무엇이기에 우리는

[리뷰] 선진국 담론의 실체를 들여다보는 김종태의 '선진국의 탄생'

by 구황작물

먼저, 책에 실린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문 일부를 옮긴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민 여러분들에게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확실히 못하는 국민이다. 뒤떨어져 있는 국민이다. 후진국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멀지 않은 장래에 다른 선진 국가에 못지않게끔 우리도 자력으로써 자립해서 남과 같이 떳떳하게 잘살 수 있는 그런 국민이 되겠다는 그러한 꿈과 우리의 자신과 그러한 용기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진해제4비료공장 기공식 치사, 1965년 5월 2일)." (p169)


▲ <선진국의 탄생> 책표지 ⓒ 돌베개


정치인이며 언론이며 할 것 없이, 어디서나 선진국 담론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예컨대 5년 안에 선진국 진입, 선진국에선 상상할 수 없는 후진성 등등. 그러다보니 사담에서도 선진국 운운하는 이야기를 흔히 들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 사회의 선진국 개념이 모호하고 자의적으로 이용된다는 것에 저자는 주목한다. 대중적으로 쓰이면서도 합의된 개념이 없고, 지칭 대상 또한 화자의 의도와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선진국 담론은 오늘의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인식 체계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선진국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언제부터 선진국을 국가 목표와 정책 결정의 준거로 설정했을까? 한국 사회에서 선진국은 어떤 역할을 할까? 현재 우리는 선진국인가, 아닌가? 아니라면 어떻게 선진국이 될까?"(pp19-20)


저자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이 선진국 담론의 실체와 역사적 계보를 밝히기 위해, 19세기 말 개화기부터 현재까지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서구 중심 담론의 궤적을 샅샅이 추적한다. 서구를 향한 동경에서 비롯된 정체성 결핍의 역사적 기원은 물론, 그것이 한국의 변화와 발전에 끼친 영향 또한 사회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19세기 말은 한국이 유럽의 힘을 처음 인식하고 그들의 세계관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때라고 한다. 서구를 야만으로 규정했던 이전의 서구관이 서구가 문명이라는 새로운 인식으로 대체되는 추세였던 것이다. 이때 한국 사회에 개화·문명 담론이 부상했고, 개화와 미개화 또는 문명과 야만을 위계적으로 구분했다고 한다.


당시 한국 사회는 서구가 세계 질서를 주도한다고 인식하면서도, 이들을 정글의 법칙과 힘의 논리를 세계에 유포하는 주범으로 보았다고 한다. 즉, 서구의 힘을 인정하고 상업·기술의 문명국으로 인식했지만 새로운 세계 질서의 일방성과 폭력성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 개화·문명 담론의 인식은 서구에 대한 제한적 수용이었으며, 서구 중심성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독립신문>은 서구를 개화·문명의 전형으로,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동양을 반개화·반문명의 지위로 격하시키는 등 서양과 동양간의 위계를 명확히 하고, 1900년대에는 식민지라는 비참한 상황 때문에 한국 사회의 자학적 인식이 보이기도 했지만 이것이 사회의 지배적 분위기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또한 1920~1930년대는 제1차 대전의 참상으로 서구중심주의와 가치관의 권위가 크게 훼손되었고, 서구 문명의 보편성을 심각하게 의심한 시기라고 한다.


세계대전이 끝난 20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유럽 중심의 문명 담론 대신 미국 주도의 발전 담론이 주도권을 잡았다. 그전까지 문명과 야만 개념으로 국제적 지배·피지배 관계를 규정했다면, 이때부터는 발전과 저발전 개념으로 지배 관계를 정당화한 것이다. 한국도 문명 담론에서 발전 담론으로 전환하기 시작하고, 특히 선진국 담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 사회도 발전 담론을 수용하기 시작했으나 이승만 정부 때까지는 그것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다. 이승만은 문명·개명을 강조했고, 부강은 생존을 위한 실용적 차원에서만 제시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명 담론이 발전 담론으로 완전히 전환된 것은 박정희 정권 이후라고 한다. 저자는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문과 당시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 한국의 국가 정체성과 세계관의 형성 및 변화를 분석한다.


전술한 대목을 비롯한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문은 좀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낼 수 없다. 이것이 한국의 특정 세대에게 고착화되진 않았나, 그리하여 다수의 국민들이 자신이 이룩한 성취와 공은 폄하하고, 소수의 지도자의 성공 신화를 추앙하게 만들진 않았나 의문을 갖게 된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면, 박정희는 한국을 문명국으로 보는 것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자기도취에 빠진 것이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그는 한국을 빈곤과 후진의 굴레에 빠진 나라로 보았고, 국민 모두가 "인간 개조"(p165) 수준의 변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의 선진국 담론의 특징으로 저자는 단선적 발전론, 경제주의(economism), 서구 중심 담론, 내면화한 오리엔탈리즘, 마지막으로 민족주의를 꼽는다. "박정희의 민족주의는 민족의 과거를 부정하는데서 출발하는 역설적이고 이중적인 면"(p165)을 지닌 것이었으며 한국을 후진국으로 규정하면서 각 사회 분야에 자학적 인식이 확대되었다는 지적은 뼈아프게 들린다.


이러한 선진국 담론은 이명박 정부까지 이어진다. 박정희 정권의 구호가 근대화였다면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이명박 정부의 선진화는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인의 선진국에 대한 결핍 정체성과 여전히 박정희 시대의 선진국 담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식 틀에 주목한다.


이러한 선진국 담론은 발전에 대한 상상력을 제한하고, 세계를 위계적으로 생각하게 함을 저자는 설명한다. 선진국을 향한 열등감은 후진국에 대한 우월감을 의미하기도 하며, 다양한 지구촌에 대한 맥락적 이해를 방해하고, 선진국의 제도·사회 현상· 행동 양식이 한국이나 다른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착각을 만든다는 것이다. 고로, 우리에게는 새로운 담론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가 주장하는 핵심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그동안 한국 사회는 항상 미래 혹은 서구에 존재하는,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 선진국을 구성했다. 그러나 이제 한국 사회는 밖의 선진국을 좇는 대신 안의 선진국을 상상하며 이것에 천착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동안 주변화했던 것들에 보다 따뜻한 관심을 보낼 여유와 역량이 있는 각자가 행복한 선진국의 가능성은 결국 한국 안에 있는 까닭이다."(p251)


책을 읽으며 나 역시 이러한 선진국 담론의 틀에 매몰되어 있지는 않았나 자문하고는 낯이 뜨거워졌다. 다른 나라를 인식할 때 국민소득이나 경제수준에 먼저 호기심을 느꼈던 적도 있음을 인정한다. 사람을 볼 때 무엇보다 먼저 빈부를 확인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와 조금도 가까워지고 싶지 않다. 그런데 나라를 인식하는 나의 틀은 별반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이 역시 발전 담론의 형태임이 분명하다.


선진국 담론의 폭력성을 재인식하게 됐고, 모든 나라의 역사가 결코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 다양성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각성했다. 단선적인 위계와 서열을 정해 우월감을 갖고 싶지도, 열등감에 허덕이고 싶지도 않다. 우리의 전통과 가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타 문화의 아름다움 또한 존중해야 할 것이다. 또한 모호한 선진국이라는 대상을 향한 끊임없는 채찍질도 이제 그만 듣고 싶다. 타자를 욕망하기보다 우리 자신으로서 더 만족스러워질 수 있었으면 한다. 이제 우리는 각자가 행복한 국가를 상상하고 실현해야 할 때임이 분명하다.


책은 담론 전환의 필요성을 분명하고 강하게 역설하고 있다. 다소 늘어지는 면은 있지만, 조금의 인내심과 호기심으로 끝까지 읽어내면 재미와 유익함이 한가득인 책이다. 나를 일깨우는 이런 '도끼'는 반갑고, 고마울 따름이다.


(오마이뉴스 기고글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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