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기의 기억은 남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그럼에도 아주 단편적으로, 순간 포착한 사진처럼 기억하는 장면들이 있다. 유치원에서 한글을 배우기 위해 2층 교실로 올라가던 순간, 아파트 앞마당에서 동생과 쪼그리고 앉아 개미를 구경하던 일, 어느 늦은 밤 엄마, 아빠, 동생과 함께 집 앞 운동장에서 달리기 시합을 하던 날, 집에서 엄마가 해준 맛있는 요리들을 먹었던 기억, 어딘가 여행을 가서 모래사장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던 순간.
성장기- 사춘기 시절의 기억 중에도 몇 개의 기억은 영상이 아닌 찰나의 순간으로 남았다. 나의 생일날, 아빠가 출근하기 전 새벽에 온 집안 가득 꾸며준 색색깔의 풍선들과 학교 앞 은행나무가 개나리처럼 환하게 피었던 가을날 엄마가 사준 노란 우산 등. 그 날의 움직임은 기억나지 않지만 완벽한 컬러를 입고 마음에 쥐어졌다. 이런 순간의 기억은, 물론 좋지 않은 기억도 있지만, 대부분은 좋은 순간이었다.
이런 단편의 기억은 대부분은 잊고 살다가 삶의 한가운데에서 예상치 못한 시점에 불쑥 나타나곤 한다. 나도 모르게 그 장면 무언가와 비슷한 순간, 색깔 혹은 기분을 마주한다거나 아니면 정말 힘들었다거나 아니면 정말 알 수 없는 포인트에서. 움직이는 장면이 아니라 멈춰진 이미지라서 마치 마음속에서 사진을 꺼내 든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아주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날은 아련하기도 하고 정말 그런 일이 있었던가 꿈같다. 몇 개의 장면은 너무나도 평범해서 도대체 나는 이걸 왜 기억하고 있을까 특별하지도 않은데싶다. 실제로 이 순간들은 너무 평범해서 사진으로 남아있지도 않은 순간들이라 더욱 의아할 때도 있다. 그런데 어쩌면 그 장면들이 모이고 모여 무의식 중에 나를 붙잡아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나를 붙잡아줄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어제저녁 아빠의 등에 매달려 노는 우리 하마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 순간은 너의 마음속에 어떻게 남게 될까,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나에게 그랬듯 너의 마음속 작은 곳에 자리 잡게 될까. 네가 온통 그려놓은 낙서와 키가 자라며 점점 높이까지 붙어지는 스티커들로 가득한 창문 앞에서 깔깔거리던 웃음소리를 네가 먼 훗날 기억하게 될까. 1살, 2살, 3살, 4살, 그리고 5살... 우리 삶은 너로 인해 온통 꽃밭이 되어가는데 이 순간을 우리만 기억하게 되는 것이 아쉽다. 그런 마음이 드는 날에는 사진을 찍고 글을 남기고 다시 눈에 담는다.
얼마 전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다시 보았다. 엄마는 딸 혜원에게 이렇게 말한다.
"혜원이가 힘들 때마다 이 곳의 흙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한다면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걸 엄마는 믿어"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니 어쩌면 내가 부모로서 너에게 해줘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너만의 작은 숲을 만들어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언제든 돌아와 쉴 수 있는 기억을 만들어주는 것. 비록 네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그날의 공기와 사랑을 떠올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
너도 이 순간들을 모아 너만의 사진첩을 만들기를. 이 날의 기운이 세포 하나하나에 녹아들어 가기를. 지금의 내가 그렇듯 먼 훗날 너의 삶에 파도가 향해와도 지금 우리가 쌓는 시간들이 너도 모르게 너에게 작은 힘이 되길기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