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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주 영화평론가 Sep 18. 2024

‘영화적 그날’로서 10·26 사건

지난해 연말 개봉한 <서울의 봄>과 올해 광복절을 하루 앞두고 개봉한 <행복의 나라>를 연달아 보면서 1979년 10월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궁정동에서 울려 퍼진 총성의 여파를 생각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심복이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건조한 역사적 사실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김재규의 행동이 개인적 일탈이었는지 민주화를 위한 결단이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두 가지 이유 모두 맞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내 관심사가 아니다. 나는 그저 ‘역사적 그날’이 아닌 ‘영화적 그날’로서 10·26 사건이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인식되는지 말하고 싶다.


10·26 사건은 대놓고 웃지 못하는 코미디(<그때 그사람들>, 2005)이면서 주군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한 남자들 사이의 유치하면서도 농밀한 멜로드라마(<남산의 부장들>, 2020)이다. 동시에 이 사건은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 세력의 집권 과정을 그린 영화(<서울의 봄>, 2023)의 발판이 되었고, 김재규의 부하 박흥주 대령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어느 변호사의 이야기를 각색한 법정영화(<행복의 나라>, 2024)이기도 하다. 이처럼 10·26 사건은 18년 장기 집권 끝에 비극적 최후를 맞은 한 인간의 얼굴에만 머무르지 않고, 코미디와 멜로, 정치와 법정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자장 안에서 생동하고 있다.


<그때 그사람들>의 경우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사람들>은 냉소로 가득하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한 여성은 내레이션을 통해 10·26 사건 직전의 상황을 짧게 요약한다. 이 내레이션은 다소 천진난만한 음성으로 들린다. 내레이션 가운데 “그가 군사 쿠데타 이후 18년째 정권을 유지해 오던 1979년 가을, 부산과 마산에서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뜻밖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뜬금없게도 박정희는 총에 맞습니다”라는 부분이 유독 귀에 맴도는데, 그 이유는 ‘뜻밖의’·‘뜬금없게도’라는 단어 때문이다. 추측컨대 시위가 뜻밖에 일어났다는 건 정권의 입장일 것이며 박정희가 뜬금없게 죽었다는 건 대중의 입장일 것이다.


내레이션이 끝나고 영화의 제목이 스크린에 박힌 뒤 카메라는 서울의 한 수영장에서 옷을 벗고 노는 여자들의 몸을 보여준다. 대통령 암살 사건을 다루는 영화의 첫 장면이 여자들의 벗은 몸이라는 사실은 무척이나 뜻밖이고, 뜬금없다. 카메라는 “뜬금없게도 박정희는 총에 맞습니다”라는 사운드와 여자들의 벗은 몸의 이미지를 차례로 몽타주하는데, 이 같은 편집은 상당히 우스꽝스럽다. 여자들의 몸이 우스꽝스럽다는 얘기가 아니라 여자들의 벗은 몸의 이미지를 배치하는 방식이 그렇다는 얘기다. 이것은 일종의 전략이다. 이 전략은 영화가 진행하는 내내 이어진다. 뜻밖이고, 뜬금없으며, 우스꽝스러운 몽타주.


어떤 영화는 자신을 현실로 포장하지만, 어떤 영화는 자신이 현실이 아니라 영화임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영화가 관객에게 “이것은 현실이 아니라 영화인데, 당신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이 순간에는 모두 김 부장(백윤식)의 부하 주 과장(한석규)이 등장한다. 첫 번째는 주 과장이 고문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감시하는 순간을 카메라가 좌우의 패닝 숏으로 포착하는 장면이다. 이때 카메라는 관객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물리적으로 통과할 수 없는 벽을 통과하며 고문당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감시하는 주 과장을 포착한다. 카메라가 벽을 뚫고 좌우로 이동할 때 관객들은 이게 현실이 아니라 영화임을 자각한다.


두 번째는 거사 이후 피범벅이 된 궁정동 내부를 주 과장이 활보하는 장면이다. 이때 카메라는 주 과장의 동선을 롱테이크의 직부감 숏으로 포착한다. 주 과장의 머리 위를 쉬지 않고 맴돈다. 이때도 카메라는 자신의 존재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데, 이곳은 실제 궁정동이 아니라 영화 세트장이라는 것을 아예 대놓고 보여준다. 앞서 언급한 두 장면에서 카메라는 현실과 영화 사이에 맺어진 최소한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며 관객에게 “당신은 지금 무엇을 보았는가?”라고 질문한다. 이 같은 질문은 카메라가 관객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화면의 전경) 현대사의 비극을 냉소와 조롱으로 관망하는 태도와 맥이 닿아있다.


가령 김 부장이 총을 들고 대통령에게 다가갈 때, 카메라는 김 부장의 앞모습을 포착하는 게 아니라 김 부장 뒤에서 그가 숨긴 총을 보여준다. 이어 카메라는 서서히 떠오르며 아무것도 모르는 대통령과 그의 부하들을 하이앵글로 비춘다. 카메라가 김 부장의 액션이 아닌 음주가무에 젖은 대통령의 리액션을 포착하는 것이다. 자신을 가로막는 보초병에게 격분해 육군본부를 향해 소리치는 육군참모총장의 모습 역시 카메라는 앞이 아닌 뒤에서 포착한다. 이 영화의 가장 비극적인 순간과 희극적인 순간에서 카메라는 항상 인물의 뒤에 있다. 그 뒤에서 인물의 액션이 아닌 인물이 놓인 상황의 리액션을 포착하는 것이다.


<그때 그사람들>의 주인공은 특정 인물이 아니라 제목처럼 ‘그때 그사람들’이다. 그때 당시의 상황이라고 해도 좋겠다. 달리 말하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풍자’와 ‘냉소’다. 카메라는 인물들을 시종일관 조롱한다. 온몸이 벗겨져 죽은 상태로 놓인 대통령 앞에서 참모들은 묵념하는데, 이 상황을 익명의 경호원들은 커튼 뒤에서 황당한 표정으로 라면을 먹으며 바라보고 있다. 영화의 이처럼 카메라는 결정적인 순간에 인물 뒤에서 혹은 중요하지 않은 인물의 시점 숏을 통해 시대를 목격(혹은 비웃으며 구경)한다. 첫 장면을 장식한 익명의 여자들과 총격당한 대통령이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나체로 등장한다는 사실 역시 의미심장하다.


<남산의 부장들>의 경우



<그때 그사람들>이 냉소로 가득한 블랙코미디라면, <남산의 부장들>은 감정의 파도가 휘몰아치는 멜로드라마다. <남산의 부장들>은 대통령의 신임을 얻기 위한 부하들의 충성 경쟁이 아니라 대통령의 사랑을 받기 위한 부하들의 사랑 경쟁처럼 보인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남자들의 고군분투와 암중모색을 다룬 정치 소재의 영화라기보다는 스릴러의 외피를 두른 곡진한 퀴어 멜로드라마라는 얘기다. 중앙정보부장과 경호실장 사이에서 대통령은 이른바 플러팅(flirting)을 일삼는다. 대통령은 부하들의 사랑을 시험하기 위해 시종일관 그들을 희롱하고, 시시덕거리며, 장난 삼아 연애하는 듯한 행동을 한다.


대통령은 중요한 순간마다 부하들에게 “임자 옆에는 내가 있잖아. 임자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한다. 임자는 ‘물건이나 동물 따위를 잘 다루거나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부부가 되는 짝’이라는 뜻도 있다. 대통령의 섹슈얼리틱한 ‘임자’라는 음성에 부하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대통령의 심기를 경호하고, 대통령을 위해서 자신의 신념을 바친다. 대통령이 직접 지시하지 않은 일을 알아서 수행하는데, 일종의 거사가 끝나면 대통령은 부하들을 가차 없이 버린다. 임자라는 단어, 지시하지 않은 일의 수행, 거사 후의 버려짐.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어떤 장면들은 강한 퀴어적 징후를 드러낸다.


<남산의 부장들>의 일부 장면들을 퀴어링해보자. 이는 정교하고 치밀한 장면 분석이 아님을 미리 밝힌다.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이병헌)이 대통령(이성민)과 경호실장 곽상천(이희준)의 대화를 도청하는 순간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두 사람의 대화를 옆방에서 도청하는 김규평의 모습은 애인의 변심에 슬퍼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이 순간 대통령은 김규평의 행위에 격분하며 누군가에게 전화로 “임자 옆에는 내가 있잖아. 임자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전임 중앙정보부장이었던 박용각(곽도원)의 제거를 위해 대통령이 김규평에게 했던 말과 똑같다. 대통령의 말에 김규평은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슬퍼한다.


김규평이 도청을 위해 잠입하는 순간으로 되돌아가보자. 이 순간 카메라는 창문을 때리는 비를 유독 밝게 포착한다. 창문에 의해 건물 내부로 들어오지 못하는 빗줄기는 대통령의 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김규평의 존재와 묘하게 겹친다. 도청 장면 이후 카메라는 중앙정보부로 돌아온 김규평의 모습을 포착하는데, 이때도 카메라는 창문에 의해 내부로 들어오지 못하는 빗줄기를 환하게 비춘 것처럼 김규평의 모습을 빗줄기와 같은 밝기로 포착한다. 이어 카메라는 투명한 유리의 이차프레임을 통해 김규평을 포착한다. 김규평의 모습이 유리에 반사되면서 복수로 나열된다. 빗줄기와 김규평 모두 복수의 모습으로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이다.


대통령 암살 장면에서 김규평의 손에 있는 것은 물리적인 차원의 총이 아니라 일종의 리비도다. 김규평은 궁정동 안가라는 가장 어둡고 은밀한 장소에서 대통령이라는 시대의 중핵을 총으로 쏜다. 이후 몇 발의 총격이 불발되고, 부하들에게 다른 총을 가져오라며 소리치며, 거사 후 핏물을 밟아 넘어지는 일련의 영화 이미지는 김규평의 불안한 리비도를 상징한다. 그는 근친상간의 금기를 깨듯이 대통령을 저격한다. 빗줄기는 창문을 뚫지 못했지만, 그의 리비도는 대통령의 심장과 머리를 뚫었다. 그가 대통령을 저격한 후 별다른 계획 없이 우왕좌왕하다가 어이없이 체포되는 과정 역시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행복의 나라>의 경우



<행복의 나라>는 중앙정보부장과 경호실장의 권력 투쟁 혹은 대통령의 폭정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10·26 사건의 여파로 죽을 위기에 처한 사람을 살리는 데 몰두한다. 그 사람은 바로 중앙정보부장의 부하 박태주(이선균)다. 박태주의 변호를 맡은 정인후(조정석)는 이른바 ‘먹고사니즘’에 몰두하는 세속적인 변호사다. 영화에서 박태주는 강직한 군인으로 그려진다. (영화 속 대사를 빌리면) 그는 ‘어리석은 원칙주의자’이다. 감형을 받으려면 최소한의 반성적 태도를 보여야 하지만, 그는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도 상관의 명령을 따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직업적 윤리가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군인으로서 가치 판단을 하지 않고 무조건 상관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그의 직업의식은 변호사로서 그를 살리려는 정인후의 직업의식과 충돌한다. 사실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박태주의 직업의식은 너무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데, 그의 태도와 발언은 일종의 종교적 소명처럼 느껴진다. 그는 군인이 아니라 모든 압박과 박해를 물리치고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처럼 보인다. 이러한 박태주의 기괴한 고고함 때문에 그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정인후의 액션은 시종일관 엇나가고 빗나간다. 평범한 인간은 숭고한 성직자, 죽을 각오를 한 순교자를 살릴 수 없다.


평범한 인간과 숭고한 성직자 사이에 절대악이 등장하는데, 그게 바로 전상두(유재명)다. 평범한 인간은 숭고한 성직자도 살리지 못하고 절대악 앞에 무릎을 꿇는다. 전상두가 날린 빨간 골프공을 찾기 위해 물웅덩이에서 허우적거리는 정인후의 모습을 카메라는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본다. 애잔하기보다는 무력한 느낌이다. <서울의 봄>에서 쿠데타를 막지 못한 이태신(정우성)이 철조망을 넘어 전두광(황정민)에게 다가가 일갈하듯이 정인후는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전상두에게 회심의 사자후를 날린다. 하지만 두 장면 모두 장르의 관습에 편승한 채 독자적인 빛을 발하지 못한다. 힘이 없다는 뜻이다.


<행복의 나라>는 정치적으로도, 영화적으로도 실패했다. 정치적 중심을 지키려다가 서사적 중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다만 이 영화의 계보학적 의미는 있다. 이제껏 10·26 사건을 조명했던 영화들이 권력의 핵심부를 신랄하게 비판하거나 한 인간의 영웅 만들기에 집중했다면, 이 영화는 그로부터 조금 벗어나 있다. 그리고 사람을 말한다. 그것이 성공했느냐 아니냐는 관객의 판단에 달려있다.



기획회의 615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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