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 베이커 감독의 영화들을 중심으로
션 베이커의 영화는 재미있다. 그의 영화에는 아기자기하고 즐거우며 통쾌한 느낌이 있다. 초반부에는 온갖 기상천외한 재롱을 부리다가 후반부에 가서는 제법 묵직한 메시지를 전한다. 션 베이커는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바람에 나풀거리는 손수건처럼 리듬감 있게 돌파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를 보고 나면 재미있지만, 씁쓸하기도 하다. 관객들이 기대하는 장르적 재미를 모두 선사한 다음에 “사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바로 이거야” 하는 호쾌하면서도 처연한 기만성이 그의 영화에 있다는 얘기다. 사회의 주류에서 벗어난 인물들의 이야기를 측은하면서도 발칙하게 그리기. 션 베이커만의 장르적 재미다.
션 베이커의 영화를 얘기할 때 늘 거론되는 주제들이 있는데, 바로 ‘성노동자’와 ‘미국식 자본주의’다. 션 베이커는 이 주제들을 화려한 포장술로 감싸면서 그 천박성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그의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썅, 감옥이나 여기나 뭐가 진짜인지 모르겠어”(<탠저린>)라거나 “내려와. 여긴 정글짐이 아니야”(<아노라>)라고 말하는 등 부조리한 현실을 부정하고 휘저으며 위태롭게 서 있다. 동시에 “여기가 그런 바닥이야”(<레드 로켓>)라며 체념하기도 한다. 화려한 전광판들과 가게들이 쏟아내는 어지러운 불빛, 시궁창과 다름없는 집안의 곰팡내가 코끝을 찌르는 공감각의 이미지가 관객들의 눈에 쏟아진다.
영화 속 대사처럼, 션 베이커의 영화는 잘 포장된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동시에 그의 영화는 길바닥에 흐트러져 있는 진실처럼 보이기도 한다. 거짓과 진실의 경계에서 그가 생산해 낸 이미지들은 피에로처럼 생동감 있게 웃는다. 그의 최근작이자 제77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아노라>(2024) 역시 마찬가지다. 달콤한 사탕처럼 맛있고, 별빛처럼 반짝이는 이미지들의 향연은 관객들을 어떤 환상성에 빠지게 한다. 그 환상성에 ‘다루는 주제는 무거운데, 영화가 이렇게 재미있어도 되나?’라는 물음이 있다. 그런 가운데 이따금 돌출하는 쓰라린 무채색의 이미지들은 거대한 폭음을 동반한 수류탄의 파편처럼 관객들의 마음에 꽂힌다.
상실의 슬픔은 살아 숨 쉬는 사랑의 증표
<스타렛>(2012)부터 살펴보자. 바자회에서 싼값에 산 보온병 안에서 1만 달러의 거금을 발견하고 제인(드리 헤밍웨이 분)은 어쩔 줄 모른다. 가난에 허덕이며 포르노 배우 생활을 하던 그는 뜻밖의 횡재에 잠시 숨통이 트이지만, 얼마 가지 않아 죄책감에 시달린다. 1만 달러가 자신의 돈으로 느껴지지 않아서다. 제인은 죄책감을 덜기 위해 자신에게 보온병을 판 늙은 여성인 세이디(베세드카 존슨 분)에게 찾아가 호의를 베푼다. 그는 세이디의 장보기를 도와준다거나 취미 생활을 함께 하는 식으로 교류를 지속한다. 세이디는 그런 제인을 경계하지만, 혼자서 외롭게 살아가던 세이디의 무료한 일상은 제인으로 인해 풍성해진다.
그건 제인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막 주목받기 시작한 신인 포르노 배우인 그는 불특정 다수로부터 환호를 받지만, 정작 그의 일상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일 때문에 가족과 멀리 떨어져서 살고, 남의 집에 얹혀사는 처지다. 유기견 스타렛과 함께 힘겨운 일상을 버티는 제인에게 세이디는 삶의 공허함을 채워주는 따뜻한 보온병과 같은 존재로 다가왔을 테다. 제인은 세이디에게 갈증 난다며 물을 달라고 하고, 함께 따뜻한 맛있는 브런치를 먹으며, 스타렛을 돌봐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제인의 일상을 딸처럼 보듬는 존재가 바로 세이디인 것이다.
세이디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는 남편과 딸을 잃고 홀로 살아간다. 스타렛을 돌보다가 잃어버렸을 때, 세이디가 보이는 강박적 태도는 영화에서 가장 감정적으로 도드라지는 순간이다. 세이디의 까다롭고 별난 태도는 가족을 먼저 잃고 살아가는 늙은 여성의 방어 기제일 수도 있다. 영화의 마지막, 제인은 세이디가 열여덟 살 된 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기묘한 상실감이 제인을 덮친다. 하지만 파리 여행을 앞둔 두 사람은 이 같은 상실감으로 인해 허무주의로 빠지지는 않는다. 상실의 슬픔은 나약함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사랑의 증표다. 미국의 철학 교수이자 작가 키어런 세티야의 말이다.
고달프지만 절망적이지 않은 이미지들
<탠저린>(2015)은 흑인 트랜스젠더 성노동자로 살아가는 신디(키타나 키키 로드리게즈 분)와 알렉산드라(마이아 테일러 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마약을 은닉했다가 30일간 감옥에서 지낸 신디는 출소하자마자 알렉산드라로부터 남자친구가 바람피웠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신디는 알렉산드라와 함께 남자친구와 놀아난 여성을 잡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션 베이커는 이 과정에서 트랜스젠더 성노동자의 고달픈 삶을 스크린 위로 길어 올린다. 그들의 삶은 고달프나 절망적이진 않다. 이 어지러운 와중에도 신디는 남자친구와 바람난 백인 여성과 함께 알렉산드라가 공연하는 장소를 찾아가 그녀를 응원한다. 세 여성의 소동극은 알렉산드라의 감미로운 음악에 잠시 막간을 갖는다.
<탠저린>의 비극성은 트랜스젠더 성노동자의 상품을 소비하는 사람들 역시 미국사회에서 비주류로 분류되는 노동자 계급 혹은 이민자라는 점에 있다. ‘평범한 미국인’들과 달리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일하러 나가는 한 이민자가 사실은 성매매를 위해 집을 나간다는 기막힌 설정 등은 이 영화에 드리워진 전반적인 익살스러움을 보여준다. 여기서 션 베이커는 사람을 상품화하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폭로하고 동시에 성노동자들의 주체성을 전면화한다.
성노동자들의 주체성을 그리는 것은 션 베이커의 오래된 담론이었다. 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포르노 배우(<스타렛> <레드 로켓>)이거나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시민(<탠저린> <플로리다 프로젝트> <아노라>)이다. 수동적 대상화와 능동적 전면화 사이에서 그들은 처절한 생을 견디고 버틴다.
션 베이커만큼 거리의 가게들을 예쁘게 찍는 감독도 드물다. 그의 영화들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숏들이 있다. 바로 카메라가 고정된 상태 혹은 패닝의 움직임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측면으로 포착하는 풀 숏이다. 이 같은 숏들은 특히 <탠저린> <플로리다 프로젝트> <레드 로켓> 등에서 두드러진다. 풀 숏은 인물과 배경을 비슷한 비율로 포착하는데, 돈이 없어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지 못하는 아이들을 불쌍하게 전시하면서도 그 아이들이 기어이 돈을 벌어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는 장면을 표상한다. 앞서 말한 대상화와 전면화의 교차성과 부딪힘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성노동자들에게
미국의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말처럼, 부의 진정한 원천이 생산성과 창조성 그리고 사람들의 활력이라면 션 베이커의 영화에 등장하는 성노동자들은 이 같은 생산성과 창조성, 활력을 가지고 있다. 션 베이커는 자신의 성을 팔아 경제적 이득을 획득하는 이들을 성실한 노동자처럼 묘사한다. 성노동자를 당당한 경제적 주체로 그린다는 것이다. <아노라>에서 애니(미키 매디슨 분)가 빨간색 조명 아래 남성들 위에서 몸을 휘저으며 성을 파는 모습을 션 베이커는 마치 황홀하게 춤추는 것처럼 묘사한다. 아울러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의 손님을 접대한 애니가 일을 마치고 아침 지하철에 기대 집으로 향하는 모습에는 성실한 노동자의 고단함이 묻어 있다. 션 베이커는 <아노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때, 수상 소감에서 “이 모든 상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성노동자에게 바친다”라고 말했다.
<아노라>를 범박하게 정의하면, 스트립 댄서로 일하는 미국 여성 애니가 러시아 재벌 남성 이반(마크 아이델슈테인 분)에게 배신당하는 영화다. 뒤통수 맞은 아노라를 또 다른 러시아 남성인 이고르(유리 보리소프 분)가 위로한다. 그러니까 <아노라>는 배신과 위로의 영화다. 배신과 위로의 주체는 남성이고, 객체는 여성이다. 남자 위에서 몸을 흔드는 아노라의 황홀한 얼굴로 시작한 영화는 이고르 위에서 처절하게 우는 아노라의 모습으로 끝난다. 처음과 마지막 장면으로만 재단하면, 아노라는 항상 남자 위에 있어야 자립이 가능한 사람이다. 이 같은 수미상관의 이미지 역시 수동적 대상화와 능동적 전면화가 충돌하는 지점이다.
션 베이커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게임과 마약에 갇혀 지낸다. 굳이 말하면 일종의 중독 상태에 빠져 있다. 특히 인물들은 게임을 즐겨하는데, <아노라>를 예로 들면 이 영화가 그 자체로 일종의 게임처럼 설계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영화 초반부 애니와 이반이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온갖 유흥을 즐기는 장면들은 게임의 기본 서사와 세팅을 설명하는 프롤로그처럼 느껴진다. 프롤로그를 보지 않아도 게임을 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진짜 게임은 애니가 어딘지 모르게 부족해 보이는 남자 셋과 함께 ‘이반 찾기 퀘스트’를 실행하는 장면들이다. 애니가 이반을 찾았을 때, 그에게 주어지는 건 또 다른 러시아 남성 이고르다. 이 같은 서사 진행 방식 역시 애니를 대상화하는 카메라와 카메라 앞에서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애니가 끊임없이 부딪히며 길항하는 이미지와 유사하다.
대상화와 전면화의 묘한 합일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는 홀로 아이를 건사해야 하는 젊은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방세가 밀려 길바닥에 내몰릴 위기에 처한 핼리(브리아 비나이트 분)는 딸 무니(브루클린 프린스 분)와 함께 고급 호텔 앞에서 싸구려 향수를 판다. 그들이 사는 곳은 디즈니월드 외곽에 위치한 싸구려 모텔이다. 모텔에서 불법 장기 투숙 중인 모녀의 이미지와 꿈과 환상의 세계로 조각된 디즈니월드의 이미지가 대조를 이룬다. 꿈과 환상, 미래의 가능성이 조각나 버린 싸구려 모텔의 색감은 지나칠 정도로 아름답다. 캐릭터뿐만 아니라 영화적 공간들 역시 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상화와 전면화가 묘하게 교차하며 합일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싸구려 향수를 파는 것으로도 생계가 유지되지 않자 핼리는 자신의 성을 판다. 시끄러운 음악을 틀고, 무니를 목욕시키는 와중에 핼리는 익명의 남성들을 접대한다. 자신이 모르는 성인 남성의 목소리가 방문 너머로 들리자 샤워를 즐기던 무니는 순간적으로 하던 행동을 멈추고 입을 다문다. 이 순간 무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무니의 정지된 이미지를 목격한 관객들은 핼리를 철없고, 부모 자격이 없는 여성이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션 베이커는 항상 이런 불편하고 잔인한 상황들을 제시하며 관객들을 일종의 교착 상태에 빠뜨린다. 션 베이커의 대상화에도 아랑곳없이 자신의 주체성을 온몸으로 뿜어내는 캐릭터들과 서사의 진행 방식, 영화적 공간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다르게 질문하기’ 혹은 ‘거슬러 질문하기’ 등은 비평을 실천하는 전략 가운데 하나다. 사실 질문이라는 행위 자체가 기존의 시스템을 다르게 바라보거나, 거스르고 저항하는 과정에서 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자들은 질문을 두려워한다. 사회의 진보는 상대방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 타자의 존재를 그 자체로 인정하는 과정에서 불현듯 찾아오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그레타 가드는 책 『비판적 에코페미니즘』(창비)에서 ‘다르게 질문하기’가 “불평등한, 혹은 부정의한 상황을 인식하는 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지독하게 얼어붙은 통념을 빠져나와 사회에서 누락 혹은 탈락한 존재를 적극적으로 발견하기. ‘다르게 질문하기’에 내재한 효용성이다.
션 베이커의 영화들은 비평적 실천의 전략과 유사하게 ‘영화적 실천’을 하고 있다. 미국식 자본주의에 빠져 허덕이는 성노동자들을 동정하거나 연민한다기보다 다르게 바라본다. 그리고 질문한다. 존재의 긍정이 아닌 존재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타진하는 이미지들의 연쇄 속에서 그는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을 계속해서 내화면으로 호명하고 끌어당긴다. ‘그들을 이해합시다’라는 호소가 아니라 ‘그들이 여기 있습니다’라는 당위적 차원의 이미지. 션 베이커 영화들이 발산하는 에너지다.
기획회의 621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