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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주 영화평론가 Mar 30. 2020

스크린 너머로 풍기는 <기생충>의 냄새

봉준호의 영화사회학

봉준호는 영리한 시네아스트다. 그의 영화는 익살스러우면서 심오하다. 그는 기본적으로 장르영화의 재미를 추구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장르의 자장에서 탈주하는 이른바 ‘삑사리 예술’의 미학을 안다. 영화의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언제나 절묘한 줄타기를 선보였던 그는 마침내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시상식과 칸 영화제의 최고상을 동시에 거머쥐는 일대 파란을 일으키며 세계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기생충>과 아카데미상     


<기생충>은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감독상‧각본상‧국제장편영화상 등 총 4개 부문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비(非)영어권 영화가 작품상을 받은 것은 91년 아카데미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또한, 칸 영화제 대상 수상작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동시에 받은 것도 매우 이례적인데, 빌리 와일더의 <잃어버린 주말>(1946)과 델버트 맨의 <마티>(1956) 이후 64년 만이다. 참고로 두 영화는 모두 미국영화다.     


감독상의 경우 아시아계 감독으로는 이안 이후 봉준호가 두 번째로 수상했다. 이안에게 감독상을 안긴 <브로크백 마운틴>(2006)과 <라이프 오브 파이>(2013) 모두 할리우드 자본으로 제작된 영화라는 점에서 봉준호의 수상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각본상은 봉준호가 아시아계 감독 최초로 수상했는데,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2003) 이후 비(非)영어권 영화로는 17년 만의 일이다. 국제장편영화상 수상작이 작품상을 받은 것도 <기생충>이 최초다.     


‘오스카 소 화이트(Oscar So White : 오스카는 너무 하얗다)’라는 조롱 속에서 외연 확장에 힘쓰던 아카데미 시상식은 최근 몇 년 전부터 유색 인종이 등장하는 다양한 비(非)영어권 영화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기생충>이 오스카를 원한 게 아니라 오스카가 <기생충>을 원했다”는 말에서 엿볼 수 있듯이, <기생충>의 성취는 작품 자체의 우수성에도 있지만 여러 정치‧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그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플란다스의 개>부터 <기생충>까지     


봉준호 영화의 주인공들은 대개 경계인으로서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그들은 둘 이상의 이질적인 집단에 속하지만, 그 어느 쪽에도 완전하게 유입되지 않는다. <플란다스의 개>(2000)의 고윤주는 박사 학위까지 받은 지식인이지만 변변한 직장이 없다. 아내의 도움 없이는 일용할 양식조차 얻지 못하는 무능한 위치에 있다. <살인의 추억>(2003)의 박두만은 군부 독재 시대의 형사이면서 동시에 견실한 생활인으로서 가족의 안위를 위해 노력한다.     


<괴물>(2006)의 강두는 아버지와 함께 한강에서 작은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소시민이다. 그러던 어느 날 괴생명체로부터 삶의 터전은 물론 딸까지 잃는 재난을 겪는다. 하지만 국가 시스템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한다. 결국 강두는 직접 총을 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마더>(2009)의 도준은 또래와 비교해 어딘가 좀 모자라다. 그는 어쩌다 살인 누명을 쓰게 되는데, 도준의 엄마는 그런 아들을 비호하기 위해 온갖 불법적인 행위를 저지른다.     


<설국열차>(2013)의 커티스는 빈민층이 기거하는 ‘꼬리칸’의 젊은 지도자이다. 그는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는 ‘앞쪽칸’을 평정하고, 기차 전체의 해방을 위해 혁명을 일으킨다. <옥자>의 주인공 미자는 문명으로부터 유리된 듯 보이는 어느 산골 마을에 산다. 미자는 자신이 아끼는 돼지 옥자가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그를 구하기 위해 산에서 내려간다. 옥자를 구하기 위한 미자의 여정은 고군분투와 암중모색의 연속이다.     


<기생충>의 기택 가족은 반지하에 사는 하층민이다. 뚜렷한 직장이 없는 그들은 우연히 어느 부유층 집안의 과외 교사, 가정부, 운전사 등으로 취직한다. 하지만 기택 가족은 자신들보다 더 하층 계급에 속하는 문광 가족과 일자리를 놓고 대결을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봉착한다. 결국 하층과 최하층의 대결은 공멸로 이어지고, 각각의 가족에게 아스라하게 보였던 생존과 계급상승의 불씨는 완전히 사라진다.     


하층과 최하층의 대결    

 

이처럼 봉준호 영화의 주인공들은 시스템 안에 있으면서도 그로부터 벗어나 있는 기이한 위치에 놓여있다. 그들은 삶에 어떤 결여를 안고 있으며 그것을 채우기 위해 투쟁한다. 봉준호의 전작들과 비교할 때, <기생충>의 서사가 보다 절망적인 이유는 어떠한 희망의 불씨도 발견할 수 없는, 가능성 제로의 디제시스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평범한 삶을 살고자 하는 존재들의 곤궁했던 일상을 다시 한번 더 무너뜨리는 데에 이 영화의 잔혹함이 있다.     


<기생충>은 거대한 시스템이나 관습적 질서를 바꾸는 데 관심이 없다. 오히려 카메라는 ‘하층’과 ‘최하층’의 대결 구도를 스크린에 보란 듯이 전시한다. 문광이 초인종을 누른 뒤 펼쳐지는 ‘지하 세계’의 이미지들. 그러니까 기택 가족이 비를 맞으며 마치 지옥까지 연결된 듯한 계단을 타고 끝없이 내려가는 장면 이후부터, 영화는 익살 넘치는 블랙코미디에서 현실의 이면을 잔인하게 묘파하는 호러로 변주된다.     


“영화를 보고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으면 좋겠다”는 봉준호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영화가 끝나고 관객들은 안전한 객석의 자리에서 내려와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다. 지하철의 냄새는 누구의 것이고, 나는 왜 웃음을 멈추었는가. 봉준호가 홍수와 같은 이미지로 관객들의 눈에 쏟아부었던 것은 주지하다시피 하층부와 최하층부의 혈투다. <기생충>은 생존과 계급상승의 욕구, 그 실현 불가능성을 치열하게 형상화한다.     


평범한 삶에서 밀려난 기택 가족과 문광 가족은 제목 그대로 ‘기생충’과 같은 존재다.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와 천민자본주의가 구축한 계급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존재가 바로 그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관습적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전복의 힘을 가진 위험스러운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은 그 전복의 힘을 서로를 파괴하는 데 사용한다. 시스템으로부터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 서로를 추방한다. <기생충>의 가장 큰 비극이 바로 여기에 있다.     


스크린 너머로 풍기는 <기생충>의 냄새     


봉준호는 한국사회의 치부, 말하자면 부자와 빈자 모두 숨기고 싶었던 ‘그 무엇’을 너무도 매끈하게 스크린에 전시한다. 봉준호는 <기생충>에서,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에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발판이나 계급상승의 사다리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없는 것’과 ‘없다고 말하는 것’은 다르다. 즉 <기생충>은 해결자가 아닌, 한국사회의 커다란 모순을 그저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방관자의 위치에서 끝없이 추락하는 영화다.     


신자유주의와 천민자본주의를 그대로 체화하고 있는 박사장의 죽음이 관객들에게 어떠한 카타르시스도 제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전에 문광과 근세, 기정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죽음은 관객의 죽음이다. 어떻게든 생존할 수 있다는 믿음의 죽음이고, 성실히 노력하면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계급상승의 죽음이다. 생존과 계급상승이 전무한 현실로서의 디스토피아가 바로 <기생충>을 지배하는 이미지이다.     


고도의 조작과 양식화가 이루어진 <기생충>의 이미지는 지나치게 아름답다. 그래서 끔찍하다. 영화의 냄새가 스크린 밖으로 의뭉스럽게 전이되자 관객은 웃음을 멈춘다. 그렇게 <기생충>은 현실이 된다. ‘봉준호가 장르’라는 말은 바로 이 부분을 겨냥한다. 블랙코미디에서 호러로 변주된 <기생충>이 마지막에 당도하는 장르는 현실이다. 장르는 즐길 수 있지만 현실은 즐기기 어렵다. <기생충>은 장르의 외피를 두른, 대한민국의 어두운 단면을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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