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중심으로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등장(登場)하는 게 아니라 출몰(出沒)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등장과 출몰의 차이는 간명하다. 전자는 사라짐을 전제하지 않지만, 후자는 사라짐을 전제한다. 나타났다가 사라지기. 분명히 현실에 발을 붙인 채 존재하지만, 어딘가로 소멸해버리는 듯한 환상성이 그의 영화에 있다. 현실을 해체하면서 재구성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분위기가 그의 영화에 있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보자. 나에게 하마구치 류스케의 첫 영화는 <아사코>였다. 이 영화는 갑자기 사라졌다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나타난 애인 앞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아사코’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아사코 앞에 출몰한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사실 그 사람이 아사코의 진짜 애인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사코가 자기 앞에 출몰한 사람을 진짜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에 있다.
<아사코>를 보고 난 뒤에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았다. 이 영화도 출몰의 느낌이 다분하다. 바로 ‘가후쿠’의 아내 ‘오토’ 때문이다. 가후쿠는 오토의 불륜을 목격하고 혼란스러워한다. 혼란은 절망으로 바뀌는데, 불륜의 경위를 묻기도 전에 오토가 갑자기 사망한다. 오토의 장례식장에서 가후쿠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토의 죽음’이 아니라 ‘아내의 불륜’이기 때문이다. 가후쿠에겐 오토가 나를 사랑했는지 아닌지가 더 중요하다.
가후쿠의 사연을 들은 운전사 ‘와타리’가 말한다. “오토 씨가 가후쿠 씨를 진정 사랑한 것도, 다른 남자를 끝없이 갈망한 것도 어떤 거짓과 모순도 없는 것 같은데요. 가후쿠 씨는 오토 씨를, 오토 씨의 그 모든 걸 진짜로 받아들이는 게 어려운 가요?” 그리고 덧붙인다. “오토 씨에겐 수수께끼가 없었잖아요.” 와타리의 말에 가후쿠는 장례식장에서 흘리지 않았던 유예된 눈물을 쏟아내며 말한다. “나는 제대로 상처받았어야 했어.”
나는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고 난 뒤에 <우연과 상상>을 보았다. 이 영화는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 ‘문은 열어둔 채로’, ‘다시 한번’ 등 총 3장으로 구성됐다.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무엇보다 마지막 에피소드인 ‘다시 한번’이었다. 중년의 레즈비언인 ‘모카’는 사랑했던 옛 동창 ‘유키’를 만나기 위해 동창회에 간다. 하지만 그곳에는 유키가 없다. 다음 날 모카는 헛헛한 마음을 뒤로하고 역으로 향하는데, 길에서 우연히 유키를 만난다.
반가움도 잠시, 모카가 유키라고 믿었던 여성은 사실 유키가 아니었다. 의문의 여성은 모카에게 자신이 유키가 아니라 ‘코바야시’라고 소개한다. 모카가 너무 반갑게 아는 척하는 바람에 자기도 순간 도쿄로 대학 간 고등학교 동창으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코바야시에게 모카는 자신의 동네에 갑자기 출몰한 생면부지의 여성이다. 모카가 실망하자 코바야시는 유키가 되어주겠다고 제안한다. 하마구치 류스케식 농담이다.
그렇게 모카는 유키이면서도 유키가 아닌 사람, 즉 코바야시에게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는다. 코바야시는 유키인 척하며 모카의 질문에 나름의 리액션을 해준다. 여기서 잠깐, 모카는 왜 유키를 찾고 싶었을까. 대화의 흐름상 유키는 모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유키의 선택에 모카는 큰 상처를 입은 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모카는 코바야시에게 유키를 만나면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털어놓는다.
영화의 마지막, 모카는 코바야시에게 역제안을 한다. 도쿄로 대학 간 코바야시의 동창 역할을 해주겠다는 것. 둘은 처음 만난 에스컬레이터 육교 위에서 다시 한번 연기를 한다. 거짓의 프레임 안에서 진심을 발화하는 두 여성의 교감은 묘한 울림을 자아낸다. 두 여성은 잠깐의 만남에서 깊은 대화를 나누며 삶의 상처를 치유한다. 그들이 진짜 동창은 아니었지만, 각자의 인생에서 일어난 가장 멋진 일 중 하나임엔 틀림이 없다는 듯 영화는 끝난다.
주민들과 외지인들의 기이한 대립
위 세 편의 영화들을 차례로 본 뒤 나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보았다. 이 영화도 하마구치 류스케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현실과 비현실의 중첩 속에 놓인 듯한 느낌을 풍긴다. 이 같은 느낌은 자연 속에 사는 주민과 외지인의 대립 구도에서 더욱 가시화한다. 여기서 말하는 대립은 마을을 지키려는 주민들과 글램핑장을 지으려는 외지인들의 불화다. 그런데 이들의 불화를 선악의 구도로 등치하기엔 어딘가 의뭉스러운 숏들이 많다.
우선 줄거리를 살펴보자. 주민들은 마을에 글램핑장을 조성하려는 외지인들이 못마땅하다. 코로나19 보조금을 받기 위해 글램핑장 사업을 시작하려는 연예기획사 직원들은 주민 설득을 위한 설명회를 열지만, 쉽지 않다. 기획사 직원인 ‘타카하시’는 마을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의 ‘타쿠미’에게 접근한다. 영화가 수렁으로 빠지기 시작하는 건 도쿄로 돌아간 타카하시가 타쿠미에게 글램핑장 관리인 제안을 하기 위해 다시 마을로 오면서다.
타쿠미는 딸 ‘하나’와 함께 산다. 건망증이 심한 타쿠미는 유치원을 마친 하나를 데리러 가는 일을 자꾸 까먹는다. 그래서 하나는 홀로 숲 속을 ‘관통’하며 집으로 간다. 이 영화에서 죽음의 이미지가 처음 등장하는 순간은 타쿠미와 하나가 함께 숲 속을 관통하며 집으로 가는 장면에 있다. 그 이미지는 총에 빗맞아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해 죽은 새끼 사슴의 뼈다. 단순히 총에 맞아 죽은 것도 아니고, 빗맞아서 움직이지 못해 죽었다는 설정은 꽤 의미심장하다.
이 영화에서 두 번째로 등장하는 죽음의 이미지는 바로 타카하시다. 그는 타쿠미를 설득하기 위해 다시 마을로 오는 길에 동료인 ‘마유즈미’에게 이곳에 정착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한다. 결혼한 후 오히려 자신이 글램핑장 관리인이 되어 마을에 살겠다는 것이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타카하시는 장작을 패고 있는 타쿠미에게 양해를 구한 후 직접 장작을 패본다. 타쿠미의 도움으로 장작 패기에 성공한 타카하시는 쾌재를 부른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타카하시는 자신의 정착 계획을 타쿠미에게 구체적으로 밝힌다. “오히려 관리인은 내가 하고 싶다”, “마을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려 달라”, “지역민과 연계해 사업을 성공하고 싶다”라고. 이어 그는 “아까 장작을 팼을 때, 솔직히 최근 10년 중에 제일 기뻐서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구나 싶었어요”라고 덧붙인다. 그러면서 타카하시는 타쿠미에게 자신의 어드바이저가 되어 달라고 부탁한다.
일상적 묘사와 비일상적 묘사의 교차
어드바이저가 되어 달라는 타카하시의 부탁에 타쿠미는 글램핑장 예정지가 “사슴이 다니는 길”이라는 다소 엉뚱한 대답을 내놓으며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 표면적으로 이 영화는 자연을 수호하려는 타쿠미와 자연을 개발하려는 타카하시의 대립처럼 보인다. 대립의 이면을 적극적으로 오독하면, 주민들이 걱정하는 것은 수질 오염이나 산불이 아니라 바로 자기들의 안위다. 사슴의 행로를 걱정하며 타카하시의 제안을 거절하는 타쿠미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초반부로 돌아가 보자. 타쿠미는 전기톱과 도끼를 사용해 열심히 장작을 팬다. 숲으로 이동해 수통에 계곡물을 받는다. 장작을 패고, 계곡물을 받는 타쿠미의 모습을 카메라는 극단적인 롱테이크로 포착한다. 앙상한 나뭇가지, 쓰러진 나무, 말라가는 듯한 계곡물 그리고 영화 도처에 깔린 총소리. 영화는 시작하고 10분 넘게 이 같은 장면들만 보여준다. 타쿠미의 행동이 자연을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착취하고 있다는 역설이 가능한 이유다.
타쿠미는 농지개척 3세대다. 패전 후 토지개혁을 통해 소작인에게 개척용으로 주어진 땅에 살고 있다. 그의 말처럼 주민들도 처음에는 모두 외지인이었다. 외지인에 의해 발전했고, 자연도 파괴됐다. 문제는 균형이다. 정도가 지나치면 균형이 깨지는데, 타쿠미 입장에서 타카하시는 균형을 깨는 사람이다. 타쿠미는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타카하시를 죽인다. 하지만 타카하시 입장에서 타쿠미는 균형을 독점하는 사람이 아닐까.
외지인들에 대한 주민들의 호전적 태도 역시 위 논의와 맥이 닿아있다. 주민들에게 마을은 안전하고 따뜻한 삶의 터전이라기보다는 생존 투쟁의 역사가 아로새겨진 불안의 땅이다. 그 투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카메라는 장작을 패고, 계곡물로 우동을 만들고, 악기로 쓰기 위해 꿩 깃털을 줍고, 땅 와사비를 뜯는 주민들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포착한다. 달리 말하면, 주민들의 집 역시 과거에는 사슴이 지나다니는 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이 같은 서사를 구축하기 위해 하마구치 류스케는 일상적 묘사와 비일상적 묘사를 수시로 교차한다. 특히 사슴과 하나가 서로 마주 보는 장면, 물 흐르는 듯 하늘을 잡는 장면, 자동차 후방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장면 등은 일상적 재현을 거부하는 숏들이다. 나는 이러한 숏들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미 없음의 의미’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수시로 틈입하는 무의미의 숏들은 일상과 비일상을 결합하여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지운다.
반복적 롱테이크 속에 담긴 일상과 비일상
타쿠미는 자신의 영역에 불현듯 출몰한 타카하시를 죽였다. 타카하시는 자연을 파괴해서가 아니라 타쿠미의 세계를 침범하려 했기 때문에 죽었다. “그럼 사슴은 어디로 갈까?”라는 타쿠미의 질문에 대해 “어딘가 딴 데로 가겠죠?”라는 타카하시의 반문은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다. 타카하시의 반문에는 새로운 세계가 출몰할 가능성이 담겼고, 타쿠미는 그 가능성을 차단하고 싶었던 것이다.
영화 속 대사를 빌려서 표현해보자. 빗맞은 사슴처럼, 타카하시는 즉사하지 않고 치명상으로 죽는다. 빗맞은 사슴처럼, 타쿠미는 도망갈 수 없으니 오히려 공격함으로써 타카하시를 죽였다. 빗맞은 사슴처럼, 하나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제각각의 이유로 총에 빗맞은 사슴들끼리의 내전인 셈이다. 동시에 사슴은 자연의 대리물이다. 사슴은 조금씩 죽어가는 피해자이면서 언제 인간을 공격할지 모르는 가해자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현실에 발을 붙인 채 현실과 유리된 서사를 구축한다. 법칙도, 맥락도 없는 일을 세공하듯 정밀하게 묘사하면서 핍진성을 창조한다. 산골 마을에서 장작 패는 주민의 행위가 ‘일상적’인 게 아닌 ‘파괴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이유는 일상과 비일상의 이미지가 동시에 담긴 숏들이 계속해서 출몰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숏들의 반복과 지속이 일상에 균열을 가하고, 그 균열의 틈에서 관객들은 각자의 진실을 본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처음과 마지막 장면은 마치 누군가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듯한 시선의 롱테이크로 촬영됐다. 이 숏이 누구의 시점인지는 알 수 없다. 항상 낮은 데로 흐르는 물의 운동성을 체화한 듯한 카메라의 움직임만 감각할 수 있을 뿐이다. 확실한 것은 처음과 마지막 장면 앞뒤로 숲 속을 ‘관통’하는 하나와 타쿠미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죽음의 이미지(꿩의 깃털, 장작, 사슴 뼈 등)가 있다.
요컨대 사슴이 총에 빗맞아 죽음을 기다리는 것처럼 자연은 언제나 주민들에 의해 조금씩 빗맞으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자연의 입장에서 숲 속을 걷는 타쿠미와 하나의 움직임은 일종의 총격이다. 바로 출몰의 이미지인 것이다. 이처럼 하마구치 류스케는 인물과 인물, 인물과 세계 사이에 발생하는 일들을 놓치지 않고 길게 담음으로써 마술적 리얼리즘의 세계를 구축한다. 그의 롱테이크에 담긴, 일상과 비일상이 교차하는 순간들이 흥미로운 이유다.
기획회의 607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