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신은 공평한 것 같다.
우리 가족은 아빠와 나를 제외하고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동생 모두가 아팠다. 그래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우리 집의 ‘간병의 서사’가 시작된 걸로 기억한다. 엄마와 동생은 지금도 잔병 치례가 잦다.
가족 중에서 내가 그나마 건강한 건, 다행이면서도 다행이 아니다. 내가 동생과 엄마처럼 자주 아프지 않은 이유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래서 찾아낸 답은, 그래야지만 살아가는 동안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그나마 인간적인 사람이 될 수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가족이 아프지 않았다면 나는 다소 냉소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쓰러진 할아버지를 돌보는 할머니를 보며, 파킨슨병이 찾아온 할머니를 돌보는 엄마를 보며, 그런 엄마를 나보다 더 잘 돌보는 동생을 보며, 또 그 동생이 아파서 무너졌을 땐 엄마와 내가 마음을 보듬는 것을 경험하며, 많은 걸 배웠기 때문이다. 이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지겨운 간병의 서사는 나를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예민하게 만들었다.
남의 고통과 불편함이 눈에 너무 잘 보인다. 그만큼 타인을 신경을 쓰지만, 오히려 그만큼 많이 신경 써왔기 때문에 지쳐버린 나머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조용히 못 본 척 숨어버릴 때도 있다.
그렇지만 나까지 아팠다면 내 몸과 마음은 빨리 지쳐서 주위를 못 살폈을 수도 있다. 안 그래도 조급하고 예민한 성격인데, 굉장히 이기적인 자아로 자랐을 것 같다. 결국, 내가 아팠든 모두가 아프지 않았든 어떤 쪽이든 마음의 공간이 참 협소했을 것이다.
번갈아가면서 아픈 가족들을 보고 있자면 말로 이룰 수 없는 우울감에 빠졌다가도, ‘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내가 그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하며 내 삶의 방향을 다시 잡아본다.
얼마 전, 동생이 많이 아팠다. 이번엔 곪아있던 마음도 함께 덧난 듯했다. 가장 속상했던 건, 언니인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말‘ 뿐인 위로였다. ‘이거 사줄까? 저거 먹으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라는 애꿎은 그 말들은 그 애의 고통을 모두 감싸기엔 턱 없이 부족했다. 난 직업이 의사가 아니라서 직접 치료도 못해주고, 돈도 그렇게 많지 않아서 좋은 병원이나 유명한 교수님의 값비싼 치료비도 내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날, 엄마도 아픈 몸과 지친 마음으로 힘들어했다. 나는 또 수화기 너머로 건네는 힘없는 위로뿐이었다. 서른이 다되어 가는데, 내 위로의 수준은 여전히 10년 전쯤 중학생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어쩔 줄 몰라하며 동생이 좋아하는 이모티콘을 고민하고, 통장 잔고를 보며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비싼 화장품을 고민하는 내가 너무 한심했다. 아무리 정서적 지지를 보태도, 병을 없애버리는 약이나 치료보단 못할 것이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극심한 무력감에 그날 저녁 내내 엉엉 울었다. 어렸을 때, 아주 어렸을 때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마음먹었을 때 그 꿈을 계속 유지했다면, 우리 가족은 조금 더 행복해졌을까? 왜 나는 제일 건강한 사람으로서 이 간병의 굴레를 끊는데 아무 노력도 안 했을까.
그렇게 한참을 책상에 코를 박고 울다가도, 이런 생각들이 모이고 모여 나를 한번 더 강해지게 만들기 시작한다. 또 한 번 새로운 길과 방법을 탐구하게 만든다. 그럼 나는 콧물 범벅이 된 채로, 또 아무렇지 않게 계획을 세우고 있더라. 이렇듯 단 한 번도 끝이 부정적이진 않았다. 천성인지, 강박인지 끝내 나는 그런 우울감과 무력감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해서 머리가 맑아지는 걸 느낀다.
결국 내가 조금 더 건강하니까, 우리 가족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겠구나. 그게 내 힘이구나.
내 바람처럼 간병의 서사가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겁나진 않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더 나은 방법을 생각하고, 더 밝은 쪽을 바라보는 데 타고났으니까.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