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살 겨울, 그렇게 피아노 학원을 찾아가 상담을 받았다. 원장님께서는 다섯 살 때 온 친구는 있었지만 네 살 때 온 친구는 처음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잘 가르쳐 보겠다고 하셨다. 학원 입장에서도 굳이 찾아온 학생을 놓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원장님 인상이 좋으시고, 무엇보다 빨리 시켜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던 나는 덜컥 그 자리에서 등록을 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책을 받아서 돌아오는데 내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아노를 치려면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는 행위' 말고도 '눈으로 악보를 빠르게 읽어내는 행위'도 해야 된다는 사실 말이다. 그리고 피아노 학원의 이론 교재의 첫 권은 계이름을 읽고 계이름의 이름을 쓰는 문제들로 대부분 구성되어 있었다. 아직 한글은 커녕 줄긋기를 연습하던 꼬마에게 당연히 계이름을 읽는 것은 물론 쓰는 것은 굉장히 재미없는 일이 자명했다. 그렇게 책을 받아들고 조금 불안했지만, 조기교육이 좋다는게 뭐겠어라며 정신승리로 아이를 피아노 앞에 앉혔다.
그렇게 한 달간 수업을 들었는데 우리 어릴 적과 시스템이 동일한 것이 놀라웠다. 40분 수업 시간이면 선생님이랑 10분 연습하고 나머지 시간들은 혼자 연습하고 선생님이 이따끔식 들어와 보는 방식 말이다. 그리고 동그라미 그려서 색칠하는 것도. 아직 아이가 창문도 없는 연습실에 혼자 있는 것이 좀 그랬기 때문에 내가 들어가 있기도 하고 유리창 보이는데 서 있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럴거면 기본은 내가 그냥 가르쳐도 되겠는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가 선생님이 좋다고 했기 때문에 일단 계속 가보기로 했다.
다만 문제는 수업 시간이 아니였다. 바로 숙제 시스템이었다. 모든 학원이 그렇듯, 피아노는 조금의 레쓴과 많은 연습이 필요한 과목이었다. 그런데 집에 오면 숙제를 하기 싫어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나이 때는 그게 무슨 과목이던 간에 '숙제'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나이였던 것 같다. 선생님이 시키는 것 까지는 했는데 집에 와서 엄마가 시키는 것 까지는 안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세운 듯 했다. 빨리 멜로디를 완성시켜보고 싶은 엄마의 속타는 마음과 달리 이 녀석은 몇 달째 계이름만 뚱땅뚱땅 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현타가 왔다. 음악에 재능이 있다면 물만난 고기처럼 '엄마 피아노 너무 재미있어요.' 라며 본인이 더 치고 싶어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고민이 들었다. 지금 돌아보니 아이가 적어도 그런 자기 의사를 표현하거나 입장을 분명히 하려면 초등학교쯤은 되야하는 건데, 나는 너무 급했고 서툴렀다. 그래서 피아노와 사랑에 빠지지 않는 아이를 보면서 나는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프로젝트 '내 아이 아이돌 만들기 프로젝트'를 접어야 되나 생각했다. 태어났을 때 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100% 확신을 가지고 밀어왔어요 라고 하면 정말 멋있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나는 수없이 많은 순간에 이 프로젝트를 접었다, 열었다를 반복했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나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쓰는 것도 있다. 교육이 효과를 보려면 맞는 타이밍에 맞는 교수법으로 해야 되는데 시간이 더 지나서야 그 사실을 인지했고, 엄한 애만 나한테 혼나야 했다. 그렇게 숙제로 실갱이를 하던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피아노 학원 원장님 학원을 파셔서, 새로운 선생님이 인수를 하시게 된 것이었다. 아이는 선생님이 바뀌자 가지 않겠다고 했다. 설득하고 어르고 달래도 보았지만 아이는 결국 새로운 선생님이 싫다고 했다. 더 싸우다는 선생님이 아니라 피아노가 싫다고 하게 될 것 같아 일단 후퇴를 결정했다. 휴, 쉬운 것이 하나 없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유아 전문 음악 학원도 있다. '야마하 음악교실'이라는 브랜드로 여러 곳에 브랜치가 있다. 난 우리 아이가 큰 다음에 알게 되서 수강하진 않았지만 이곳은 만2세부터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으니 이른 나이에 음악을 시작하고 싶은 분들은 이 곳에서 도움을 받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이곳에서도 피아노라는 악기는 만4세부터 커리큘럼에 포함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휴전 시간을 보내다 우리 가족은 이 녀석이 6살이 되기 직전 이사를 하게 되었다. 조금 더 학원의 밀집도가 높은 동네로 이사를 결정했다. 그렇게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와서 길을 걷다가 '뮤직플러싱'이라는 간판을 보게 되었다. 보통 피아노 학원은 '000 피아노' 혹은 '000 음악학원' 이라는 상호를 쓰는데 이곳은 이름이 특이해서 무작정 들어가 보았다. 실내에는 피아노 연습실이 여러 개 있었고 그랜드 피아노가 있고 벽면이 유리로 되어 있는 큰 연습실이 있었다. 그런데 상담을 받아보니 피아노 이야기는 안하시고 '달크로즈' 교육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셨다.
달크로즈는 네이버에 검색하면 '이성, 감성, 신체를 동시에 발달 시키는 전인 교육을 위한 도구로서의 음악교수법' 이라고 나온다. 좀 어렵게 느껴지는데 전문가가 아닌 사람으로서 간단히 정리하면 '음감, 리듬감, 음악 친밀성을 키워주는 놀이 음악 수업' 이다. 말을 들어보니 취지는 너무 좋았다. 다만, 이것은 피아노처럼 '늘었다'라는 것을 바로 확인하기가 어려운 영역이기 때문에 전반적 음악성 향상을 위해 '투자' 할 것 인지를 결정해야만 했다. 그냥 "쌩" 피아노 학원의 교수법에 조금은 딘 것 같다는 생각이 있는 나에게 너무나 혹할만한 프로그램이었다.
결국 수강을 결정했다. 감사히 아이는 수업을 너무 좋아했다. 내가 봐도 너무 재미있었고 않 좋아할 수가 없는 프로그램이었다. 어느 날은 북같이 생긴 것을 치며 선생님의 리듬을 따라했고, 어느 날은 선생님이 특정한 건반 소리를 내면 춤을 추었다. 1평 남짓의 피아노 부스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스무평은 되어 보이는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스튜디오에서 마음껏 빙글빙글 뛰며 놀았다. 가끔은 이게 효과가 있으려나 싶기도 했지만 그랜드 피아노를 치는 선생님의 모습만 봐도 동기부여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년 정도 이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7살 후반에는 드디어 피아노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피아노로 멜로디를 만들 수 있게 되자, 내 본심이 점점 들어 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선생님께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노래는 언제 배우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