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이름은 내가 지었지만 크는 건 자기 알아서 크는 중이다."
우리 아가는 나보다 나은 점이 많다. 어릴 때의 나보다는 물론이고 지금의 나보다도 나은 점들이. 이를테면, 자신의 일을 남에게 쉽게 떠맞기지 않는다. 바지를 입고 양말을 신는 일을 내가 좀 도와주려고 하면 “내가 할게!”하고 나선다. 물이나 두유를 바닥에 쏟은 때에 내가 그것을 휴지로 닦으려고 하면, 아가가 휴지를 뽑아 옆으로 와서 또 “내가 할게!”하고는 자기가 흘린 만큼 자기가 닦는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주변을 정리정돈하는 습관도 나보다 낫다. 쓰레기가 생기면 그 즉시 쓰레기통 있는 곳에 다녀온다. 좀 더러운 물건이 있으면 내가 “지지”, 그러면 “쓰레기야?”하고 내게 물어보고, 그렇다고 하면 쓰레기통에 넣고, 아니라고 하면 원래 있던 곳으로 가져다 놓으려고 시도한다. 물론 아예 내 도움을 안 받는 건 아니지만, 만으로 세 돌이 안 되었는데 은근히 알아서 잘 사는 구석이 있다.
그걸 내가 다 가르쳤냐 그러면 글쎄, 딱히 가르쳤다고 말하기는 뭣하다. 나는 아이에게 가르친 것이 많지 않다. 내가 아이를 돌보기 위해 배워야 했던 건 꽤 있지만, 내가 아이에게 교육한 것은 많지 않다. 아이가 잠에 들기 수월하려면 주변 환경이 어떠해야하는지, 아이가 울 때마다 무엇을 원해서 우는지, 같은 지극히 기초스런 방법부터 나는 하나도 몰랐으므로 처음부터 배웠다. 그렇게 배운 결과 대단히 능숙한 양육자가 되었다는 건 아니다. 내가 못나건 말건 시곗바늘은 돌아가고 아이는 부쩍 커가므로 때때마다 부랴부랴 대처했다.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야, 같은 진부한 말은 도저히 내뱉고 싶지 않다. 한데 아이는 인생이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만 같은 자세로 고집스럽게 새로운 것을 배우고, 배운 것을 익히고, 잘 안 되도 일단 해보려 한다. 블록을 서로 끼워 맞추다가 간혹 빠지지 않는 블록이 있을 때 바로 내게 가져오지 않고, 자기가 해결해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태엽이 내장된 모형 자동차같은 익숙치 않은 장난감을 만나면 요리조리 눌러보고 비틀어보면서 원리를 알아보려 한다. ‘어른’ 입장에서 보면 대단치 않은 일들일지 몰라도, 그들이 보는 세계는 낯설고 까다로운 것 투성이일 텐데. 그런 세계를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응수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익숙하고 수월한 일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운 나의 모습과 자연스럽게 대비되곤 한다.
또 특기할만한 점으로, 우리 아가는 굉장히 말이 많다. “두유 먹을래”, “이거 아빠 꺼야?” 같이 단어 몇 개를 이어서 문장으로 말하는 식이다. 그 정도 문장 구사력만으로 자기 하고 싶은 말은 다 한다. 장난감이나 인형 이름을 말하면서 어디 있느냐고 찾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뿐 아니고,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한다. 먹을 것을 챙겨주고, 놀 거리를 가져다주는 내 행동 하나하나마다 “아빠, 고마워”라고 하고, 종종 “아빠, 최고야!”도 한다. 그러면 나는 또 문득문득 마음이 말랑해진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면 우리 아가가 말이 많아진 데는 내가 아가를 대하는 태도 때문이 크다고 봐야겠다. 앉혀놓고 가나다를 가르쳤느냐 하면 절대 그렇지는 않고, 오히려 반대다. 내가 뭘 안 해주니 답답해서 아가가 말이 많아진 것 같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때도 나는 아가에게 “왜 그래, 얘기해봐”라고 자꾸 그랬다. 내가 못 알아듣는 경우에는 딱히 뭘 해주질 않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이래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육아에 대한 체계적인 관점이 내겐 없고, 단지 몇 가지 고정된 태도만 있다. 일정한 선을 넘지 않는 한에서 최대한 내가 편한 방식으로 아가를 대하기. 일관적으로 그렇게 대하기. 아직까지는 이런 태도가 크게 부작용을 낫고 있지는 않다. 최근에는 내가 아가가 자는 이부자리에 누워서 쉬고 있으니, 아가가 와서 내게 그러더라. “여기 아빠 자리 아니야. 아빠 자리 저기야. 아빠 가자.” 그 말을 듣고 번떡 정신이 차려져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지, 참. 내가 지금껏 “얘기를 해봐”라고 했고, 이제 또렷하게 얘기할 줄 알게 됐으니 그 얘기를 들어야만 하겠지.
이렇게 써 놓으니 묘하다. 자식 자랑을 쏟아내는 팔불출 아빠가 된 기분이다. 마냥 자랑이라고 쓴 건 아니다. 아이가 나보다 훨 잘낫다, 이게 지금껏 말한 내용의 요지다. 마치 내가 내 오랜 반려식물인 금식이에 대해 말하는 투랑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금식이는 금전수다. 나는 일찍이 금식이와 함께 생활했다. 햇수로 5년 됐다. 금식이는 나보다 나은 점이 많다. 지름이 두 뼘 남짓한 화분에서, 기껏해야 약간의 물만 먹고도 잘만 산다. 못 본 사이에 불쑥불쑥 새 가지를 뻗고 새순을 돋아낸다. 밥은 엄청 먹어대는 주제에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재주는 턱없이 모자란 나보다, 우리 금식이가 대체로 낫다고 말할 수밖에. 금식이가 잘 자라는 건 내 덕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금식이’라는 이름은 내가 붙여줬지만 정작 물 주는 일도 띄엄띄엄 했고 분갈이도 내 각시가 했다.
우리 아가도 마찬가지다. 아가 이름은 내가 지었지만 크는 건 자기 알아서 크는 중이다. 그러니 아가가 잘 크는 얘기는 대단히 자랑이랄 게 못 된다. 저녁이 되면 아가가 잠들 때 옆에 있으려고 불 꺼진 방에 함께 들어간다. 그러면 아가는, “아빠, 코끼리. 나, 곰.” 그런다. 그러면 나는 코끼리 인형을, 아기는 곰인형을 베고 눕는다. 우리가 하루를 마칠 때 하는 말은 고맙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날 하루 있던 일을 쭉 늘어놓고, 그 모든 일을 무사히 마치고 지금 옆에 누워주어 고맙다고, 내가 말한다. 그러면 아가는 멋쩍게 웃으며 그런다. “뭘”. 약간의 고요가 지나고, 아가가 내게 그런다. “아빠, 사랑해.” 나도 사랑한다고, 잘 자라고, “빠빠”하며 나는 방문을 닫고 나온다.
나는 내가 이따금 남기는 글이 육아 일기라기보다, 관찰 일지에 가깝다고 본다. ‘육아’라는 말은 기를 육(育)에 아이 아(兒) 자를 쓴다. 나는 이때껏 어떤 대상을 길러야지 하는 자세로 접근해서 좋게 풀린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초등학생 때 우리 집에 내가 들인 장수풍뎅이, 달팽이, 햄스터에서 하물며 롤 플레잉 게임의 캐릭터에 이르기까지. 내가 멋들어지게 길러보리라는 마음가짐은 늘 오래지 않아 사그라들었고, 내가 기르겠다고 호언장담한 그들은 예외없이 질 나쁜 일상과 안타까운 결말을 강제당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질서와 리듬이 있고, 나는 단지 가능한 범위 안에서 조력을 제공하는 게 최선이었을 텐데. 우리 아가가, 내 직계비속이라는 이유로, 혹은 의식을 갖춘 인간 동물이라는 이유로 예외가 되기는 어려울 거다. ‘기른다’는 말은 뚜렷한 능동태지만, 우리는 기껏해야 오로지 우리 자신의 삶에서나 얼마간 능동적일 수 있으니까. 그조차 매우 어려운 일이다.
초등학생 때 쓴 일기장을 최근에 다시 펼쳐봤다. 그때는 일기를 일주일에 적어도 며칠어치는 써오라고 학교에서 숙제가 나왔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수월하게 일기를 써낼까 궁리를 하곤 했다. 날마다 학교에 가고, 집에 돌아오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쳇바퀴 같은 일상을 매번 다르게 쓰기란 당시의 나에게는 꽤나 난도 높은 과제였다. 그 무렵 하루 분량의 일기를 어떻게든 써내기 위해 자주 쓴 수법은, 최대한 묘사와 수식을 풍부하게 넣어서 문장을 길게 쓰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떻게든 일기 한 쪽을 완성하곤 했는데. 이번에 다시 펼쳐본 일기장 모습은 내 기억 속에 남은 인상과는 사뭇 다르더라. 그래도 일기인 탓에 없는 말을 지어낼 수는 없었던 초등학생 때의 나는, 별 볼 일 없다고 여기고 넘겨버릴 수 있던 사소한 주위 풍경을 넉넉히 글에 담아놓았더라. 이제 보니 그게 보였다.
그때 내가 일기에 달을 관찰한 바를 적고, 교외의 공원에서 마주친 모르는 사람들의 인상을 적고, 나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동네를 누비는 할아버지에 관해 적고, 적고, 또 적었던 일기들. 내가 뭔가 이루거나 만들어내거나 길러낸 결과가 아니라, 그저 일상의 과정을 관찰한 내용이 거기에 적혀 있어서, 그래서 촉촉한 기쁨이 올라왔다.
자주 쓰게 될지는 모르겠다, 우리 아가와 같이 사는 일상을 다루는 글을. 쓰다, 안 쓰다 할 공산이 크다. 앞으로 내가 자주 쓰기를 실천할지와는 별개로 먼 훗날에, 우리 아가와 함께 지낸 시간에 대한 글이 두둑히 남아있으면 좋겠다. 쓰는 시점에서는 관찰을 글로 옮기는 단순 작업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내가 예전에 쓴 일기와 마찬가지로, 시간의 흐름이 그 단순 작업의 결과물마저 희소하고 귀한 기록으로 만들 것만 같다. 우리 아가는 오늘 일찍 잠에 들었다. 간밤에 보일러 트는 것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