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거기 있었다는 증거
가끔 그런 검색을 한다. 딱히 급하지도, 절박하지도 않은 질문을 무심히 던져보는 일. 항공사에서 보낸 마일리지 소멸 예정 메일을 받고 궁금해져서 검색창에 문장 하나를 띄웠다.
'항공사 10,000 마일로 예약할 수 있는 항공편'
그 질문 하나에 다 셀 수도 없는 무수한 답변들이 나온다. 그렇지만 나는 제일 위쪽에 위치한, AI가 요약해 준 짧은 두세 줄만을 읽고 그 화면에서 벗어났다. 옆에 안내된 기사 원문 링크도, 그 아래로 길게 이어진 블로그 글도 굳이 누르지는 않았다. 궁금증은 이미 해소되었으니까. 참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넓고도 넓은 정보의 바다에서 내가 더 둘러볼 필요 없이, 알고 싶은 내용을 쏙쏙 뽑아 딱 요약해주는 시대.
그러다 문득 어떤 이의 공들여 작성한 글과 그 마음은 어떻게 취급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이 닿았다. 예전 같았으면 내가 찾고자 하는 내용이 어디에 있을지 글 제목들을 하나하나 살폈을 것이다. 글을 눌러 열고 문장 사이의 쉼표, 단락 사이의 여백 등을 따라 마우스 휠을 돌렸을 것이다. 어떤 마음으로 그 글을 썼을지도 한 번쯤은 헤아려 보았을 것이다. 그런 과정이 끝나고, 페이지의 마지막에 닿아서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공감의 하트나 댓글 한 줄을 남겼을 것이다. 이 작은 흔적이 누군가의 하루 속에서 알림으로 울리고 그에게 뿌듯함이 되어 돌아갔던 시절을 생각해본다.
우리는 이제 아무런 발자국도 남기지 않은 채,
누군가의 세계를 훑고 지나가고 있다.
실제로도 그런 흐름은 감지되고 있다. 금준경 기자는 「AI검색 시대, 언론사 웹사이트 접속 급감한다?」(미디어오늘, 2025.04.11.)에서 AI 검색 결과로 인해 원문을 작성한 언론사나 블로그 사이트의 실제 접속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보를 쉽게 얻는 구조는 어느덧 정보의 출처까지 잊게 만든다. 그 안에 담긴 노력과 맥락은 갈수록 불투명해진다.
AI의 발전을 걱정하는 목소리는 많지만, 그 기술은 어쩌면 인간의 욕망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최단 경로를 선호해왔고, 가장 적은 수고로 가장 빠른 해답에 닿기를 바랐다. 기술은 그런 인간의 마음을 충실히 반영하며 발전해왔고, 이제는 다시 그 기술이 인간의 감각을 재편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누군가 애써 만든 글은 화면 가장자리로 점점 밀려나고 있다. 그렇게 글을 쓴 사람의 정성은 '정보'만 추려진 뒤엔 남지 않는다. 정당한 보상은 늘 느리게 따라오고, 창작자는 점점 흐릿해진다. 그가 남긴 것은 분명한데, 이상하게도 남는 것은 사라져 간다. 그런 구조 속에서 우리는 어느새 '존재'를 놓치고 있다.
글이 단지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누군가에게 '닿는 것'으로 소중하게 여겨졌던 시절을 떠올려본다. 우리가 정보라 부르는 문장들 속에 담겨 있는 누군가의 시간과 노력을. 상대방을 보며 대화하는 것이 아니기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오래 생각하며 써 내려간 고민을. 선택하는 단어 하나하나에 스며있는 그 사람의 세계를. 그렇게 만들어진 글이 이제는 이름 없이 복제되고 퍼져나간다. 존재의 자취도 함께 희미해진다.
기술은 빠르게 확산되지만, 권리는 더디게 보호된다. 때문에 저작권이 보호하는 것은 단지 소유권만이 아니라, 창작자가 그 시간에 분명히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이기도 하다. 아무렴, 정보는 복제되어도 마음은 복제되지 않으니까. 결국 우리가 존재하는 시간 동안 애쓰며 남긴 흔적들이, 마음들이, 우리가 살아 있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