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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텝퍼라는 명상

일상의 움직임 속에서 만난 고요

by StarCluster

관장님의 추천대로 헬스장에서의 운동을 늘 스텝퍼로 마무리한다. 하체나 가슴, 어깨나 등을 쥐어 짜내듯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근력 루틴을 끝내면, 가장 높은 저항으로 설정한 이 유산소 기구 위에 오른다. 숨이 가빠오고 하나 둘 땀방울을 흘리는 시점에서 본격적인 운동이 시작된다.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내딛는다. 속도가 일정 수준 밑으로 내려가지 않도록 조절한다. 열심히 다리를 움직이고 있지만, 지리좌표계 상으로 나는 어디로도 나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아무도 보지 않는 웃음을 지었다.


스텝퍼에는 회원들이 힘든 시간을 견디며 영상 등을 볼 수 있도록 눈높이 아래쯤에 휴대전화 거치대가 설치되어 있다. 나도 가끔 영상을 틀어볼까 싶다가도, 막상 기구에 올라서면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들어 움직이는 근육에 집중하면서 앞을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틀지 않은 채 운동을 마칠 때가 대부분이다.


그렇게 몰입한 채로 일정한 리듬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생각들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곤 한다. 마감을 지켜내야 하는 업무, 누군가를 대할 때 어설펐던 태도, 미처 하지 못한 말, 고마움과 미안함이 얼기설기 얽힌 얼굴들까지. 처음엔 그저 스쳐 가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에는 내딛는 발처럼 생각 또한 그 흐름 속에 들어서 있음을 알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스위치를 켜고 끄듯 사고를 멈출 수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듣고, 정말인가 싶어 친구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있잖아, 생각을 안 하려면 안 할 수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생각을 안 하고 싶은데 생각이 날 때가 있어?”


“그럼 커피잔을 들고 향을 느끼면서, 카페에서 창밖 풍경을 볼 때면 아무 생각이 안 들어?”


“커피잔을 들고, 향을 느끼면서, 창 밖을 그냥 가만히 바라보는거지 무슨 생각을 해?”


“나는 단순하게 그런 느낌 속에 있다가도, 여러 생각이 계속 들어. 저절로 막 뭔가가 자라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근데 너는 그런 생각을 안 하려고 마음 먹으면 그냥 안 할 수 있다는 말인거지?”


“응, 안 할 수 있지. 너는 그게 안 된다는 거구나?”


이렇게 서로 이해가 닿지 않는 듯, 도돌이표 같은 대화를 이어가고 나니 정말 사람의 사고 과정이라는 것이 뿌리부터 다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친구와 같은 사람들은 세상을 온전히, 있는 그대로 느끼며 사는 사람이구나. 그들은 ‘생각’이 아니라, ‘느낌’에 머무는구나— 싶었다.


같은 꽃을 보아도 어떤 이는 그저 그 향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그 순간을 그대로 사랑하고, 어떤 이는 그 향기 속에서 문장이나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과 같이. 그리고 나와 같은 사람들은 그러한 생각의 흐름과 나란히 걷기로 마음 먹은 쪽에 가깝다는 것도.




오늘도 스텝퍼의 발판들을 한 발씩 디딘다. 쉴 틈 없이 바빠 여러 생각들을 미뤄놓고 살다가, 스텝퍼 위에서 떠오르는 그것들을 정리한다. 아니, 그저 ‘정리’한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아쉬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단순히 생존과 기능을 위해 무언가를 비워내는 일만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생각들에 마음을 두고 오래 바라보는 일. 그렇기에 정리라기보다는 ‘정화’라는 표현에 가깝지는 않으려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정리는 제 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을 서랍에 차곡차곡 넣어두는 일이라면, 정화는 쌓인 먼지를 정성스레 닦아내듯 말끔한 상태를 찾아가는 것일테니까.


몸을 움직이는 동안, 마음은 오히려 더 유연해지고 너그러워진다. 흠뻑 흘리는 땀으로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지난 시간의 많은 생각들을 함께 씻어내는 것만 같았다. 일정한 리듬과 속도 속에서 우연히 마주했던 응축된 감정과의 해후(邂逅)는, 점점 차오르는 숨결만큼 승화되어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생각해보면 꼭 스텝퍼가 아니어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그릇을 씻는 동안 손 끝에 닿는 물과 반복되는 움직임 속에서. 유리창에 흐르는 빗줄기를 말없이 눈으로 따라가는 시선 속에서. 하루의 끝, 따뜻한 물로 몸의 긴장을 풀어내는 순간 속에서.


그다지 변하지 않는 풍경 속에서, 마음만은 서서히 투명해지는 어떤 순간. 흘러내리는 것들과 함께 조금씩 나를 덜어내는 시간. 나만의 리듬으로 몸을 움직이는 동안, 생각은 어느덧 가라앉고 맑아진다. 우리는 그렇게 아무데도 가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스탭퍼 위에서 움직이는 나는 여전히 하나의 좌표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같은 사람으로서 서 있는 날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떤 날은 몸도 마음도 무거워 겨우 이곳에 나왔고, 어떤 날은 유난히 오래 버틸 수 있는 가뿐함으로 임했다. 또 어떤 날은 운동 후에 찾아오는 근육통이 회복되는 시간보다, 풀어내었던 생각의 깊음과 즐거움이 더 오래 남기도 했다. 그렇게 신체와 정신의 변화를 의식하며 이전과는 조금은 다른 존재가 되어 발판을 디뎠다.


고개를 들고 정면을 바라볼 때, 그 앞엔 언제나 열려 있는 창문 뿐이었다. 그렇지만 숨을 고른 내 안에 남아 있는 것은 ‘정리된 목록’이 아니라 일종의 ‘정화된 마음’이었다. 여전히 나는 스텝퍼 위에서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어제보다 조금은 더 멀리 와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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