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물들과 그것이 지니는 무게가 있다. 어떤 것은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로, 또 어떤 것은 깃털처럼 가벼운 존재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 무수한 무게의 스펙트럼 속에서 유독 350g 즈음의 무게를 지닌 사물들 몇 가지에 애착을 느낀다. 손에 쥐었을 때 너무 가볍지도, 무거워 버겁지도 않은, 기분 좋은 감각을 선사하는 그런 도구들이 있다.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약 300g 중량의 테니스 라켓이다. 어느새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이 운동에 진지하게 임하게 된 이래로, 내게 맞는 라켓을 한참 찾아다녔다. 그러다 W사의 헤드가 가벼운 라켓을 사서 한번 사용해보고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그렇게 똑같은 라켓을 한 자루 추가로 구매하여 사용할 정도로 애정하는 장비가 되었다. 혹시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더 잘 맞는 라켓이 있을까 싶어 기회가 생기면 다른 라켓을 들어보기도 한다. 라켓이 진열되어 있는 테니스 용품 쇼핑몰에도 늘 눈길이 간다.
방학의 무더운 여름에도, 하루를 운동으로 채우고 싶어 테니스코트로 향한다. 땡볕 아래 선크림을 잘 발라보지만, 이미 얼굴이 많이 탔다. 수분을 보충할 각종 드링크와 라켓이 든 가방을 챙겨 든다. 다른 부족한 점이 아무리 많다해도, 날아 오는 공을 받을 적당한 실력과 매너만 잘 갖추고 있다면, 네트 안팎의 처음 본 사람들과도 노란 공을 매개로 즐겁고도 치열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팡-'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묵직한 공을 느낀다. 다양한 스윙과 구질을 담아 네트 너머로 다시 날려보낸다. 서로는 상대방의 움직임을 읽고, 의도를 파악하며, 자신의 최선을 담아 응수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역동적인 소통의 중심에 바로 테니스 라켓이 있다.
두 번째 기분 좋은 무게는 집이나 카페에 앉아 글을 쓸 때, 커피를 담아 마시는 머그잔이다. 부드러운 감촉과 적당한 두께가 마음에 든다. 두 손으로 잔을 감쌀 때, 두터움을 지나 전해져 오는 온기는 분주한 일상의 쉼표가 되어준다. 복잡한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나 자신과 나누는 고요한 대화의 시간을 바로 곁에서 지켜주는 무게.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어느새 식어버린 커피를 발견하고는 그만큼 깊이 몰입했었다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이따금 소중한 사람들과 머그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대화하는 시간 또한 너무나 좋아한다. 잔에 담긴 산미와 향이 그 날 나누었던 대화 주제와 함께 떠오른다. 음료가 줄어드는 만큼 우리가 한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 그의 말을 듣느라 웃고, 고개를 갸우뚱하거나 끄덕이고, 속마음을 드러내며 잔을 들었다 내려놓는 반복의 시간. 서서히 잔의 바닥이 드러나고, 목이 살짝 타는 것도 느낀다.
진심을 주고 받는 일에는 흔히 약간의 갈증이 따라오곤 한다. 잔을 다시 채운다. 새로 내린 차, 보다 묽은 커피, 혹은 물이라도 상관 없이. 그저 다시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무엇이든 음료를 다시 채우고 또 비운다. 그 시간을 묵묵히 함께해주는, 350g쯤 되는 머그잔은 말과 말 사이의 여백을 부드럽게 메워주는 도구이자, 나 자신과 가장 가까운 이들을 온전히 마주하게 하는 관계 맺기의 무게로 다가온다.
세 번째는 새로운 세계로 나를 안내해주는 400g 남짓의 책이다. 손에 알맞게 잡히는 이 종이 묶음 안에는 한 사람의 인생이, 수천 년의 역사가, 혹은 무한한 상상의 세계가 담겨 있다. 책을 펼치는 행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작가와 내밀한 대화를 시작하는 일종의 의식이다. 그의 문장은 때로는 다정하게 속삭이며 위로하고, 때로는 날카롭게 꾸짖으며 나의 행동을 촉구하기도 한다. 그로인해 나는 웃고, 분노하고, 깨달음을 얻으며 그를 따라 사색하며 걷는다.
나 또한 내가 알고 느껴왔던 것들을 그에게 내어놓아보지만, 그는 들을 수 없는 저 너머에 있다. 어쩌면 바로 그 점이 종이책이 지닌 가장 답답하면서도 묘한 매력이다. 답장을 기대할 필요도, 상대의 눈치를 살필 필요도 없다. 나는 그저 홀로 생각을 머금거나 흘려보낼 뿐이다.
글을 쓰게 된 후로는, 문장 너머의 작가를 더욱 상상해보게 된다. 이런 독특한 표현 방식이 비롯된 그의 마음은 어떠했던걸까. 이 구절은 어떤 배경과 경험에서 탄생한 것일까. 누군가는 절망의 끝에서 길어 올린 단어를 썼을지 모른다. 또 누군가는 지극한 사랑의 순전한 형태를 전달하고 싶어 애썼을지도.
그렇게 한 권의 책을 읽고 나면, 나는 어느새 그들이 살아 온 생의 일부를 내 안에 품게 된다. 작가의 지성과 감성, 고민과 고백으로 쌓아 올린 이 책들은 나의 세계의 외연을 부드럽고도 강하게 넓혀 준다. 차분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이 조용한 문장들이 모여 만든 무게는, 스스로의 내면을 마주하게 하고,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게 하는 가장 겸손하고도 위대한 형태의 위로가 된다.
테니스 라켓과 머그잔, 그리고 책. 이 한 손에 딱 들어오는 소중한 도구들을 통해 나는 사람들과 역동적인 관계를 맺고, 따스한 대화와 위로를 나누며, 지적인 사고를 확장한다. 이 기분 좋은 무게들은 단순한 물리적 중량 이상의 의미가 있다. 손에 감기는 촉감, 손바닥에 남는 온기, 손때가 배어 묻어난 사유. 그것들이 나의 일상을 지탱하는 정서적 무게가 되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나를 사람에게, 삶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닿게 만들어준다.
문득 우리가 살아가면서 맺는 관계란 어느 정도의 무게가 적당할까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분명한 존재감으로 곁을 지키는 관계의 무게에 대해서. 서로를 성장하게 하고 스스로를 잃지 않게 만드는 무게에 대해서. 삶의 온기와 건강한 자극을 나눌 수 있는, 정확한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그런 이상적이며 사랑스러운 무게에 대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