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저 아래에 빌어먹을 런던 땅이 있다. 몇 해 동안이나 거듭 나에게 비루한 적의를 심었던. 이곳에서 나는 밥은 굶어도 술은 구해야 했고, 연고는 없어도 근간은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나는 네 해 동안 견디며 필그림처럼, 저 빌어먹을 땅에 함께 발을 딛거나 애써 찾아와준 사람들과 같이 나름의 전통을 만들었다. 정체성은 시간이나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니까, 오르는 환율과 체크카드 승인 거부 메세지가 무서워도 우리는 영원해야 하니까.
이제 저렴한 감자 술에 석회 가득한 수돗물과 설탕을 섞어놓고 소주라고 우길 필요도, 멀미나는 2층 버스를 세번 갈아타 가며 애써 더 싼 버스 정기권을 살 당위성도, 멋진 사람들의 가벼운 삶을 보면서 이를 악 물 이유도 없다. 40펜스짜리 비스킷도, 다회용을 주장하던 주황색 일회용 장바구니도, 일주일치 커리도, 스산한 서클 선 철길도, 그 아래로 뛰어내릴까 고민하다가 몇번이고 가장 느린 자살인 살아가는 것을 차라리 선택했을 때 입고 있던, 눅눅한 숯덩이 향이 나는 회색 후드집업도 모두 안녕.
여전히 비행기에서는 허연과 박준, 쿤데라를 읽고 쏜애플과 자우림을 듣는다. 저렴한 23시간짜리 환승 비행기가 시베리아나 고비 사막을 지날 때 쯤이면 이렇게 몇 글자 항변을 적기도 한다. 자, 저 아래 인천 땅이 있다. 의의동망하던 종자개량이나 계층이동 따위의 꿈이여 안녕, 나의 미결사건이여 이젠 안녕.
런던 (2018~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