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3학년 2학기
누군가는 '이제 본격으로 취업을 준비해야할 시기'라 하고
누군가는 '좋은 시절은 다 끝났다'라고 말하던 그 때 나는 이탈리아로 떠났다.
이탈리아학교와 옥신각신을 한 지 어언 1년, 드디어 합격레터를 받고, 비자준비를 마치고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비행기에 가족과 함께 올랐다.
이왕 갈 유럽,다 돌아보자는 마음으로 가족과 패키지 투어로 시작한 북유럽 여행.
그리고 몇 주 후, 홀로 이탈리아로 향하는 비행기가 있는 핀란드 헬싱키 공항에 덩그라니 남겨진 내가 있었다.
"나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다니까?!?!"
큰소리 떵떵치며 빨리가라고 가족들의 등을 떠밀던 나는 온데간데 없고,
혼자남겨진지 20분만에 나는 지갑을 잃어버렸다.
내 머리속에 맴돌던 한 마디는 '장난해?'였다.
그렇게 혼자 잘 할 수 있다며 어른스러운 척은 떵떵거리며 다 해놓고, 삼십분도 안되서 가지고 있던 모든 현현금을 잃어버린 나는 말그대로 멘붕이었다. 비행기에 있는 가족들에게 연락할 수 도 없고 유럽에서 잃어버린 지갑찾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말을 지겹도록 들은 나는 그렇게 한 시간만에 모든 진이 빠져버렸다.
공항 내 물품보관소에 캐리어를 맡겨두고 공항철도를 타고 헬싱키 시내로 가서 서너시간 관광을 하고 돌아와서 밀라노행 비행기를 타면 되겠다던 똑부러지고 말똥말똥한 동양 여자애는 어디가고 누가봐도 '나 돈 잃어버린 외국인이요'라는 표정을 지은채 헬싱키 공항을 돌아다는 꼴이라니.
스스로가 한심하고 멍청해 견딜 수가 없어 공항 벤치에서 나오는 눈물을 억누르며 오스트리아에 있던 S에게 전화를 해 하소연을 시작했다. 친절하고 걱정되는 말로 나를 위로해 줄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S에게서 들은 말을 꽤나 충격적이었다.
"아니 그게 뭐? 별거 아니잖아?"
뭐 임마? 별게 아니야? 니가 집 떠나서 생판 모르는 외국 공항에서 돈 잃어버렸을 때도 그렇게 말할거야? 이 자식이 자기 일 아니라고 되게 쉽게 말하네?! 장난하냐!?
안그래도 억울해서 나오던 눈물이 서러움과 함께 흐르려던 찰나, S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신분증도 그대로고, 카드도 안 잃어버렸고, 현금 10만원정도 잃어버린건 큰일이 아니야 J"
자, 여기서 난 MBTI의 T의 면모를 100퍼센트 활용해 바로 수긍해버렸다.
그러네? 생각해보니 별일이 아니네? 10만원 뭐 아깝긴해도 그것만 잃어버린게 어디야? 돈은 뽑으면 되지!
그리고 통화를 끊은 뒤 15분 후엔 나는 헬싱키 시내로 가는 공항철도 안에서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것이 나의 유럽 교환학생의 첫 사건, 첫 임펙트였다. 그러나 나는 몰랐지, 이 사건이 내가 앞으로 겪을 7개월간의 새로운 생활을 관통하는 아젠다라는 것을.
처음 물을 만나 당황해하는 아기오리처럼 낯설어하며 당황하던 나에게 유럽이란 호수는,
[이 모든 것이 별것이 아니다] 라는 명제를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