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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현 May 23. 2017

천문학은 언제 배워요?

후배가 물었다, 따지듯이...

천문학과는 천문학을 왜 안 배워요?

 수강 편람(학년 별 강의 계획서)을 보던 후배가 물었다. 온통 물리와 수학으로 채워진 과목들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눈 빛이 날카로워진 그 후배는 마치 분풀이를 하듯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아니, 스무 살이 되고 부푼 마음을 안고 천문학과에 입학했을 때도, 1학년은 기본 교양을 쌓아야 한다며 필수과목만 들어야 했잖아요!  미적분, 논술, 영어요! 따분하고 지루한 수업들을 이겨내고 겨우 2학년에 올라왔는데, 왜 수업은 또 이 모양이냐고요. 온통 물리, 수학, 화학...!! 천문학은 도대체 언제 배우냐구요!"


 후배의 소나기 같은 하소연을 듣고 나니, 물 웅덩이를 밟은 차에게 물세례를 당한 심정이 되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하는 마음이 절로 들어서 였다. 그는 왜 나에게 열을 올리는 것인가. 과목을 내가 개설한 것도 아닌데.

 잘못 배달된 하소연에 정통으로 맞으면서도 나는 별말을 하지 못했다. 어벙히 서서 그저 "참아... 그래도 3, 4 학년 땐 좀 있어.."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가 생각해온 천문학은 무엇이었을까. 그때 나는 무슨 말을 해주었어야 했을까? 



 권투를 배워본 적이 있는지? 나는 대학교 2학년 때 권투를 시작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멋져 보여서였다. 권투 선수의 탄탄한 몸매가 멋졌고 무기 없이 맨손으로 싸우는 모습이 당당해 보였다. 피를 흘리며 싸우다가도 종이 울리면 포옹을 하는 모습도 매력적이었다. 무언가 '진한' 스포츠처럼 느껴졌다.

 처음 체육관에 등록한 날, 머릿속의 나는 이미 타이슨이 되어있었다. 원투 원투 어퍼컷, 주먹이 바람을 가르는 상상을 했다. 체육관 정면에 통으로 된 부착된 거울엔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섹시해 보였다. 욕구가 앞 서, 들뜬 마음으로 "뭐부터 할까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허벅지보다 두꺼운 목을 가진 관장님이 말했다.


 줄넘기부터.

 

 주먹이 오고 가는 정열의 파이터가 되고자 복싱 체육관을 찾았건만 한 동안은 주먹 한번 내지르지 못했다. 줄넘기와 제자리 스텝으로 가득한 일주일이었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주먹을 뻗었다. 도저히 스파링엔 써먹을 수 없을 것 같은 앞 뒤 스텝과 함께였다. 왼 주먹 한번, 오른 주먹 한번. 링을 눈 앞에 두고도 내가 배운건 늘 '원투 원투'였다.

  운동을 시작한 후 6개월까지도 주먹을 내지르는 시간보다는 줄넘기를 하는 시간이 더 길었다. 화려한 스파링을 기대했건만 내게 오는 가르침은 온통 기본기뿐이었다. 회중시계의 추처럼, 앞뒤로 몸을 움직이며 지루한 주먹을 뻗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견딜 수 있었던 건 잠시나마 함께 다녀준 친구들 덕이었다. 그 지난한 시간, 우리는 매일 같이 하소연했다. "도대체 스파링은 언제 알려주는 거야?" 


 천문학은 마치 복싱과 같다. 수려한 별과 우주를 연구하기 위해선 기초가 필요하다. 복싱의 줄넘기와 '원투'가 천문학에선 물리수학이다. 때론 화학이나 지구과학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것이 바탕이 되어야만 비로소 프로페셔널한 천문학에 들어설 수 있다. 융합과학의 기원은 바로 천문학을 두고 하는 말이다.

 1학년 때는 후배의 말처럼 천문학의 '천'자도 들어볼 수 없었다. 미적분학과 일반물리, 물리 실험과 같은 기본 과목만 있었다. 2학년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천체물리란 과목이 추가되었다. 그나마도 '물리'파트에 속해있었다. 천문학과의 과목은 온통 이런 식이다. 오롯이 천문학인 과목은 별로 없다. 물리학의 탈을 쓴 천체물리학이나 기본 천문학이 있었고, 대놓고 수학인 다변수 미적분학이나 선형대수학 수업도 있었다. 

 이처럼 천문학과에는 기본기에 해당하는 필수 교양이 꽤나 많다. 미적분학과 선형대수학은 물론 공업수학을 배우기도 한다. 욕심이 많은 친구들은 물리학 전공을 찾아 듣기도 했다. 일반물리와 현대물리, 양자역학과 열 통계 등등, 천문학에 도움되지 않은 학문은 하나도 없다. 심지어 C언어나 IDL, 우분투 같은 컴퓨터 프로그래밍 수업도 필수적이다. 우리는 천문학 수업을 '천문학'이라 쓰고 '종합 과학'이라 읽었다. 천문학은 열을 알아야 하나를 깨칠 수 있는 과목이었다. 스파링보다 기본기가 중요했다.


 복싱을 배운 지 4년째 되는 해, 아마추어 대회에 나갔다. 그리곤 당당히(?)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체육관을 처음 찾은 날의 상상이 흉내 내어지는데만 무려 4년이 걸린 것이다. 마지막 3,4위전 시합에서 승리한 후 관장님이 물었다. 


관장님 대회를 준비하는 동안 무엇이 제일 힘들더냐?

        4년이 지나도 시키셨던 원투 원투와 줄넘기요

관장님 짜식 힘들긴, 그래도 원투만 잘하면 아마추어는 다 잡는 거야

       저는 3등밖에 못했는데요?

관장님 그러니까 좀 더 해

        ..넵...!?

관장님 원투 좀 더 하라고.


 관장님은 스파링 보다 기본기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화려하게 주먹을 피하는 것 보다, 기본기가 탄탄한 선수가 하이 커리어에 도달한다고 했다. 어떤 학문을 하나의 원칙으로 제시하긴 어렵지만, 천문학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싶다. 기본기가 충실해야 본질에 다가설 수 있다. 천문학은 현상을 연구하지만, 현상이 쓰여지는 언어는 물리와 수학이기에. 

 천문학은 도대체 언제 배우냐는 후배의 질문이 스친다. 그 질문에 나는 어떤 답을 했어야 했을까? 아마도 이렇게 대답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것도 천문학이야.
 원투 원투, 아주 중요한 기본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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